제일의 말씀

눈 감으면 보이는 것 요9:35-21

장경태 2010. 7. 31. 07:50
눈감으면 보이는 것                      요한9:35- 41                07.10.14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소경이 된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때 흔히들 생각하던 대로 부모의 죄 때문인지, 혹은 그 사람의 죄 때문인지 제자들이 물어볼 때, 예수님은 그러한 통상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파격적인 대답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놓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은근히 남의 불행을 즐기려고 하는 못된 심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그러지 마시길 바랍니다. 잠언24장17,18에서는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너희에게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원수의 불행도 기뻐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하물며 이웃의 불행을 놓고 그것을 즐기는 일은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오늘 예수님은 그 소경의 눈을 고쳐주십니다. 침을 뱉아서 진흙을 이겨서 그것을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못에 가서 씾으라고 했더니 그의 눈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면서부터 보지 못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의사 되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을 완전히 치료해주셔서 온전히 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일이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사건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한 팀은 '이 사람이 안식을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께로서 온 사람이 아니다', 또한 팀은 '죄인이라면 어떻게 놀라운 표적을 행하겠느냐?'하는 논쟁으로 시끄럽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예수님께 적어도 두 가지 법을 어겼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고칠 때에 훍을 이긴 것과 그리고 그 이긴 흙을 눈에 바른 것입니다. 랍비의 교훈에 의하면 금식 때의 침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안식일에는 눈에 바르는 것을 금했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에 등잔에 기름이 떨어져 가도 접시에 가득 붓지 말고 불이 꺼지지 않을 정도만 조금씩 부으라"고 했습니다. 만일 기름에 접시를 가득 차게 부으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더운 지방이므로 유대인들은 흔히 "샌들"을 신고 다니는데, 안식일에는 못박은 샌들을 신고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못의 무게가 있기 때문에 안식일에 짐을 나르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손톱을 깎거나 머리를 깎는 것이 금지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법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도무지 이해도 할수 없을뿐더러, 예수님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습니다. 내 판단과 기준만 절대시하다 보면,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논리 앞에서는 다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사람은 출교 하기로 결의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유대교에서 출교라 함은 완전히 그 사회에서 격리되는 것입니다. 출교 당한 사람은 공중 회석에 나갈 수 없고 사람들은 출교 당한 사람 곁에 4규빗 즉 (한규빗은 손끝에서 팔꿈치가지 약45Cm)1m80Cm 이상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와 교제하거나 물건을 사고 팔지 못하며, 물론 음식도 같이 먹지 못하게 금지하였습니다. 이것이 출교입니다.
그런데 오늘 소경 되었다가 보게 된 자는 이 일이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당합니다. "왜 자꾸 물어보느냐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느냐"(요9:27)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를 다시 만나고는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당당하게 받아 들이게 됩니다.
그는 소경으로 태어났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영으로, 육으로 볼 수 있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1. 눈감으면 보이는것.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소경은 분명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소경이 아닙니다. 본다고 하는 것을 단지 육신의 눈으로만 제한할 때 는 소경인지 모르지만, 그는 적어도 영적으로는 소경이 아닙니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을 고쳐 주신 분이 누구 신지도 몰랐습니다. 단지 선지자중의 한사람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나서는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을 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일인지에 대해서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는 더 이상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소경이 아닙니다.
몇 년전 미국 시카코에서 열리는 세계한인선교사대회에 참석을 했다가 강사로 등장한 강영우박사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분은 미국 백악관 장애인정책 보좌관으로 차관급에 해당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분으로 한국이 낳은 위대한 인물이면서 신앙인 입니다. 한국의 최초의 맹인박사이기도 하면서 미국사회에서 저명한 인물 중에 한 분입니다. 현재 미국의 일리노이대의 교수이기도 하십니다. 그분의 자녀 키우는 이야기 속의 한 장면입니다. 그의 큰아들인 강진석군은 하바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강진석군은 어릴 때 기도했던 것이 있는데, "주님, 저도 눈뜬 아빠를 가지고 싶어요, 아빠가 저와 야구도 하고 엄마처럼 운전도 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곤 했답니다.  어린 진석군은 맹인 아빠에 대한 이런 불만과 함께 또한 앞을 못 보는 아빠가 얼마나 답답할까해서 아빠의 눈을 뜨게 해주려고 그가 안과의사가 되려고 어려서부터 작정을 했답니다.  그가 하바드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시험 중에 하나가 에세이를 쓰는 것인데, 그 주제가 "당신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경험 또는 사건"라는 주제 였답니다. 그때에 그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썻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운전도 못하시고 야구 코치도 못해 주신다는 것을 불평하고 있던 어느날, 아버지는 눈뜬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실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불을 끄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에게 동화와 성경이야기를 읽어 주시는데, 나는 정상인은 불을 끄면 책을 읽을 수 없는 것 깨닭았던 어느날 정상인은 할 수 없는 일에 자유로운 아버지를 발견했다, 고합니다. 그리고는 아들은 육안이 있어도 불 수 없는 세계를 보여 주신 맹인 아버지를 갖게 된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를 깨닭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맹인이 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본다고 하는 사람들은 불이 없으면 그 자유가 구속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맹인들은 오히려 자유롭습니다. 불이 있거나 없거나 그들의 행동에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우리보다 훨씬더 밝은 사람들입니다.
92년도에 나왔던 영화 캐빈코스트너주연의 "보디가드"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영화를 보면서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미모의 여가수 레이첼의 보디가드를 맡은 전직 대통령의 경호원이었던 프랭크가 래이첼을 경호하는 중에 그만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프랭크는 사랑에 빠지면 경호를 할 수 없다면서 경호원직을 그만두는데, 레이첼의 아들까지 위험에 빠지자 다시 프랭크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지요. 그때 아무도 모르는 프랭크의 별장으로 피신을 하는데, 괴한의 습격을 받고 서로 총격전을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온통 눈으로 뒤덥힌 곳에서 힌옷을 입은 괴한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때에 프랭크가 상대방을 찾을 때의 그는 두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감각으로 정확하게 상대방을 찾아서 총을 쏘는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눈감으면 상대가 보이는 것입니다. 두 눈을 가지고도 볼 수 없는 상대가 눈감으면 보이는 것입니다. 눈을 감는가는 것이 우리에게 오히려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점점 어두워져 갑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많은 사람들은 주춤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점점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영안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영안으로 보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제대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복잡한 일이 있을 때 앞길이 보이지 않고, 빠져나갈 길도 보이지 않을 때에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을 때에 눈감고 기도하면 영안이 열려서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눈감고 기도하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가 보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가 보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가 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감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서 눈을 감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해서 눈을 뜨게 해줍니다. 우리가 세상에 눈을 감고, 주님께 눈을 뜰 때에 우리는 그제서야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주님을 볼수가 있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보입니다. 그러고 나면 내가 어디로 가야할 지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보이면  우리는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좌, 우로 방황하지 않고 바른길을 선택해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시는 분이 있습니까! 내 인생의 한치 앞을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일단 눈을 감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동안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도 있습니다.
 
2. 본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눈뜬 소경이 신앙고백을 하는 장면에서 39절에"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의 말이 그럼 우리도 소경인가! 라고 반문을 하니 대답하시기를 41절"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본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이 감기고 육의 눈만 있으면 우리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다 죄 짖는 것들뿐입니다.
인류의 최초의 죄악의 출발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 : 6)에서 보면 선악과를 따먹도록 사탄의 심부름꾼인 뱀이 충동질을 했을 때에 하와의 눈에는 그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사탄의 세 가지 전략입니다.
이 세 가지 전략을 요한일서에서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 : 16)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안목의 정욕은 인류의 죄악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여자는 그전에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서 영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런 유혹도 되지 않았었는데, 사단이 그의 영안을 감겨버리고 났더니 본다고 하는 것이 인류의 최악의 출발점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단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소경 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자기의 욕심만을 보게 합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보게 합니다. 내 것만 보게 합니다. 내 자식만 보게 합니다. 우리를 넓게 보지 못하고 옹졸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버립니다.  육신의 정욕을 위한 것만, 보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율법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영화이야기를 하나 더하면. 타이타닉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웬 만한 분은 다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미국 최초의 호화 유람선으로 첫 항해 중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유물을 찾아 나선 보물 사냥꾼 브룩 라벳이 최근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건 여자의 누드화인 '바다의 심장'이라는 그림을 건졌습니다. 그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는 자신이 모델이라고 주장하는 한 할머니의 전화를 받게 되지요. 그 할머니는 그림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이 됩니다.  그 내용은 너무나 다 잘 알겠기에 생략합니다. 그런데, 그 눈물겨운 이야기를 다 듣고 그 보물 탐험가가 하는 마지막 맨트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그들은 보물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안에서 죽어갔던 1523명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안목의 정욕은 사람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본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분명 축복이지만, 그러나 무엇을 보는가가 문제입니다. 똑같은 것을 똑은 장소, 시간에서 보아도 어떤 시각을 가지고 보는가에 따라서 그것에 내리는 평가가 전혀 반대 일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땅을 정탐했던 12명이 똑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사람들, 환경, 을보고 왔지만 그들의 대답은 10대 2로 전혀 다른 대답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다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본다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보느냐, 어떻게 보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저는 본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실 때에 한 말씀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하심이라"(요9:3)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으신 일, 즉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일은 소경의 눈을 뜨는 것을 통해서 그의 영안 까지 열어주어서 하나님을 고백하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창세 이후로부터 소경으로 난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했다"(32)는 고백은, 하나님 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눈을 뜨게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뜨기 위해서는 육의 눈을 감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영의 눈이 뜨인 사람의 육의 눈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것, 하나님이 고쳐주시고, 보호해주시는 것, 무엇을 보아도 하나님의 것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 호숫가에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이야기를 합니다. 할아버지는 하나님이 보여요. 나는 아무리 봐도 안 보이는데, 그때 그 할아버지가 호숫가를 처다 보면서 하는 말이 "이제 나는 하나님말고는 아무것도 안보인단다" 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 안에는 무엇이 보이고 있습니까? 안목의 정욕입니까? 그것은 죄입니다. 그 눈은 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만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떠져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39절에"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이 한 주간에 깊이 새겨서 주님이 보게 하시는 은총이 깆드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