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사람 눅2:25-27
기다리는 사람 누가2:25-27 07.12.2
시부야역앞에 가면 충견 하치공 의 동상이 있습니다.
1923년 12월에 아키다현청에서 토목과장으로 있던 한 사람이 자신의 은사인 동경제대 농학부 교수인 우에노 히데사부로 박사에게 태어난 지 한달 된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로 보내줍니다. 동경 시부야에 살고 있던 우에노 교수 댁에 보내진 흰둥이 강아지는 단번에 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유독 애정을 느낀 우에노 박사는 강아지가 힘차게 땅을 박차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하치(八)” 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하치는 부럭 부럭 우에노교수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랍니다. 우에노 박사는 당시 동경 시부야에 살며, 동경제국대학 농학부에서 교편을 잡았기 때문에 시부야 역에서 전차를 타고 내렸습니다. 하치는 언제부터인지 매일 박사를 배웅하고 마중하였습니다. 하치가 박사와 함께 산지 1년 5개월이 지난 1925년 5월 21일 박사는 강의 중 돌연 쓰러져 급사하고 맙니다. 하치는 그런 불행이 있었는지 알 리가 없기에 언제나처럼 시부야역으로 박사를 마중 나가 밤늦게까지 박사의 모습을 찾아 서 있었습니다. 하치가 시부야 역의 인파 속에서 잠시도 움직이지 않고 지금은 세상에 없는 주인의 모습을 기다리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날부터였습니다. 하치는 그후 10년간 박사를 기다렸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하치를 전차 승객들과 근처의 사람들이 동정하게 되었고, "하치"," 하치" 하며 말을 거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다가 동물 애호회나 일본견 보존회 등의 유지가 발기인이 되어, 이 개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그 미담을 영원히 남기고자 당시 일본황실 예술인 안도 테루 에게 의뢰하여서 동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낯 동물에 불가하지만 하치를 보면서 기다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전철에서 내려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올 것인데, 그 속에서 자신의 주인을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고 반가이 맞이했던 하치가 아무리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오지 않은 주인이지만 자신의 생이 다 할 때가지 포기하지 않고 무려 10년이나 기다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기다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충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강절이라고 하는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성탄절 전 4주를 대강절이라고 부르는데. 이 절기는 강림절로 더 많이 불리 우는 교회의 절기입니다. '강림(降臨:Advent)'이란 “온다”, 혹은 “도착” 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어드벤투스(adventus)'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뜻합니다. 따라서 대강절이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그런 절기인 것입니다.
이 대강절은 여러 가지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데, 구약시대의 히브리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다림의 소망을 가지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메시야로 이미 오셨고, 그 후 약 천년간 성도들은 대강절을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기쁨을 가지고 지켰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기다리는 예수님은 다실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면서 “내가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기다리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주님이 오시면 이 땅에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느라고 흘렸던 모든 눈물과 아픔,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에서 살리라는 기대감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1. 기다리는 사람.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연애할 때 사랑하는 애인과 약속을 정하고 그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것을 생각하면서 기다리는 시간은 설레임의 시간이고, 즐거움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지루하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습니다. 설사 30분을 늦는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별로 인데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이라고 한다면 조금만 늦어도 금방 짜증이 나고 그것을 헤어지는 동기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목사도 기다립니다. 목사는 언제나 예배시간이 되어서 눈이 문 쪽으로 가있습니다. 이제는 한번만 훌터 봐도 누가 왔는지 안 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 내내 목사의 눈은 문에 있습니다. 언제 열려서 들어오는가! 오늘도 또 안나오면 어떻게 하는가! 혹시 어디가 아픈가! 문제가 있는가! 어디 출장을 갔는가! 하면서 오만 생각을 하면서 기다립니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말하면 기다림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약속해주셨던 약속의 자녀를 기다리는 기다림은 얼마나 기나긴 세월이었는지 모릅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자신의 꿈 해몽으로 복직을 받았던 술 맡은 관원이 자신의 억울한 이야기를 바로 왕에게 이야기해주어서 풀려나게 될 날을 얼마나 기다렸고, 금방 이면 들어갈 것 같았던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들은 40년 간을 기다리면서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답답한 시간들을 보냅니다. 그 답답함에 하나님과 대면하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다 지친 백성들이 우상을 만드는 죄악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희망을 잃고 포로 생활 속에 있을 때에도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셔서 백성들은 그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수많은 눈물과 고통의 세월을 참아왔습니다. 메시야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는 하루속히 예수님이 자신들을 이 속박에서 구원해줄 날을 기다리면서 언제 예수님이 왕이 되시나 하면서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 기다림에 예수님이 힘없이 로마병정들에게 잡히게 되니까 기다림에 지쳤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르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 하시면서는 성령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면서 기도의 시간을 보냈고, 이제는 떠나가시면서 다시오마 라고 약속해주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기다림입니다. 약속한 것이 임할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기다림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즐거운 기다림이 있고, 슬픈 기다림이 있습니다.
슬픈 기다림은 어떤 것입니까! 사형수가 자신의 형이 집행될 것을 기다리는 시간은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옛날에 군대에 있을 때 밤마다 불려나가서 매를 맞았는데, 순서대로 맞습니다. 앞에서 매를 맞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쓰러져 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것은 맞는 것 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결과가 임할 것을 기다리는 기다림은 우리의 생을 고통스럽고, 힘들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다리는데, 다시 오실 주님은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 그 앞에서 자신의 모든 죄가 다 들어 날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재림의 주님이 무섭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 이것이 아니라 할 수만 있거든 나중에, 나중에 오시옵소서, 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학생이 공부를 안하고 있다가 갑자기 시험을 본다고 했을 때 의 당황함과 같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가 그 심판대 앞에 설 것인데, 그 날이 언제 임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어느날 갑자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날을 두려움으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즐거움으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2. 준비된 기다림.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그 주님, 메시야를 기다린 사람인데,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 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고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시므온은 이 기다림을 두려움으로 맞이했던 사람이 아니라 기대감으로 성령이 충만함으로, 기쁨으로 기다린 사람입니다.
마치 신랑이 신부를 기다리는 그 기다림처럼 기다린 사람입니다. 정말로 준비된 기다림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준비된 기다림을 갖는 사람은 행복입니다. 시험준비를 잘한 사람은 오히려 시험 날이 기다려집니다. 시합을 앞두고 열심히 운동하면서 준비한 사람은 그 날이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출근한 남편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면서 따뜻하게 저녁을 만들어놓고 기다리는 새색시의 모습은 행복입니다.
신랑이 올 것을 미리 알고 기름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처녀들은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교회의 부흥을 준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부흥의 날을 반드시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날을 위해서 오늘을 준비해야 합니다. 목사는 지금 100명이 앉아 있지만, 400명, 500명이 올 것을 믿음으로 준비하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저의 목소리는 비젼 만큼 큰 것입니다. 목사 목소리 크다고 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교회의 시설들을 조금씩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조금씩 교회의 모양을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이미 예배 후에 식사자리는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지난주는 권사님들이 앉아서 식사를 못하고 부엌에 서서 식사를 했습니다. 어떤 날을 밥이 떨어진 날도 있고, 국이 떨어진 날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교회의 시설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조금씩 준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새로온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하고, 기존성도들이 새로운 성도들을 따뜻하게 잘 맞이해 주어야 합니다. 각자의 기관에서 새로운 성도들을 최고로 대접을 해주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내가 대접받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이제 기존의 성도들은 섬김의 자리로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성도들이 편안한 교회를 만드는 것이 부흥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준비된 교회를 부흥시켜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준비된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준비된 사람에게는 행복입니다. 기쁨입니다. 그리고 기대감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준비된 기다림으로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은 마지막날 주님의 맞을 날을 기다립니다. 그 사람의 기다림은 심판의 주님을 기다리면서도 상주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위로의 주님을 기다리고,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닥아 주시는 그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시므온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삶을 얼마나 경건하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한순간의 흩틀어짐도 없이 영으로 깨어서 기도하면서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을 성령이 그 위에 계셨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 아래에서 고통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기도하는 모습으로 바뀌었고, 더욱 경건에 힘을 쓰면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래야 합니다. 세상에 믿음으로 사는 것이 힘들면 힘들수록,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기대했던 일들은 생기지 않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만이 우리에게 엄습해 올 때, 한다고 했는데도 일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에 더욱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더욱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말씀을 붙잡고 씨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욥에게 당한 시련이 얼마나 컸습니까! 그런데 그 시련 앞에 부인도 저주를 하고 도망을 가고 없을 때에도, 욥은 더욱 믿음을 가졌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은즉 적신으로 돌아가 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욥1:21),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2:10)
이것이 경건입니다. 시므온은 이런 마음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한편으로는 괴로운 시간들입니다. 빨리 그 날이 왔으면 하는 마음은 지금의 시간이 힘이 들 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이 힘이 듭니까! 그럴수록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되 준비된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날을 떳떳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만남의 기쁨.
오늘 시므온은 그 날을 떳떳하고 정말 축복 속에서 맞이했습니다. 그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26절에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라고 합니다.
그는 기도의 응답을 받고 기다리는 것이 피곤하거나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날마다 성전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응답의 날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을 봅니다.
응답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현실의 고통은 고통이 아닙니다. 응답을 받은 사람은 결과를 이미 아는 사람입니다. 결과를 미리 알기 때문에 고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일 하는 야구나 축구경기를 바쁜 일들 때문에 그 날 못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경기가 끝이 나면 이미 신문이나 TV를 통해서 결과를 미리 압니다. 그리고 나중에 재방송을 봅니다. 재방송을 볼 때 결과를 알고 보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 팀이 수에 몰리고, 고전을 면치 못해도 머릿속에서는 저러다가 언제 역전이 되어지나! 그것만이 생각납니다. 후반5분전까지만 해도 알고 있는 결과에 3골씩이나 차이가 난다면 오히려 후반5분은 흥분입니다. 5분 안에 3골이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더 신이 납니다. 그리고 소리지를 것만을 준비합니다. 이것이 결과를 알고 보는 게임과 결과를 모르고 보는 게임의 차이점입니다. 결과를 모르는 게임은 손에 땀 만지다가 낙심도 하지만, 결과를 아는 게임은 더욱 신이 나는 것입니다.
응답을 받고 날마다 그 날을 기다린 시므온은 시간이 지나고 자신이 늙어갈수록 더욱 그의 영은 맑아져서 주님오심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인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오신다는 응답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 성경 속에 이미 모든 것이 성취되어지고, 이루어진 것을 미리 알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순간, 순간 당하는 일들이 바로 이런 승리의 쾌감을 더해주는 자극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승리를 위한 기쁨과 쾌감의 자극제로 오늘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밑으로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가 위로 올라갈 때의 기쁨은 밑으로 떨어진 시간과 고통이 클수록 더욱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우리는 노숙자생활을 하던 사람이 성공한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을 합니다.
죽을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일어나서 성공을 하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감동을 줍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렇습니까! 지금 고통하고, 절망하고, 낙심하고, 힘들어하는 사람, 그리고 포기를 하려고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런 사람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소냐! 라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힘들게 믿음을 지키다가 주님을 맞이할 때의 감동은 바로 그런 감동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시므온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아기 예수를 맞이하고 안아보고 찬송하는 그의 기쁨과 감동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기쁨과 감동은 준비된 기다림을 갖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므온처럼 준비된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맞이할 때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생활 속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준비는 신실함과 경건함,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본 땅에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간절함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온 세상에 주님의 오심의 참된 의미를 선포하여 세상사람들이 경건하게 이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삶을 주님께 드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