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땅으로 요1:9-14
하늘에서 땅으로 요한1:9-14 08.2.3
만물유도(萬物有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만물은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길에는 正道가 있고, 外道가 있습니다. 바르고, 정직한 길이 있는가 하면 거짓 되고 탈선된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인생을 살면서도 늘 정도를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언제나 편법과 빠른 길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도를 걸으려면 왠지 답답해 보이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아서 언제나 빠르고, 쉬운 길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하학은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강이 해마다 범람하여 그 후에 전답을 측량하고 경계를 정할 필요에서 생겨났다고 하는데, 이것을 학문적 체계로 정리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유클리트였습니다.
그의 업적은 13권으로 된 기하학 원본에 담겨져 있는데 이는 당시의 이집트 왕 프토레마이오스 1세에 초빙되어 기하학을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기하학이 너무나 어려워서 싫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짜증이 난 왕이 유클리트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립니다. “나는 왕이다. 더 간단하게 설명을 해라.” 그때 유클리트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생겨난 말이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 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편법을 좋아하고 빠른 길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180도 변한다거나, 갑자기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러는 갑자기 변한 사람도 있고, 갑자기 뜨거워진 사람들도 종종 볼 수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갑자기 식어지는 것을 더불어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힘 안들이고, 편안하게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은 바른 길을 걷는 사람, 정도를 걷는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천국에 가는 길은 좁은 길이라고 하십니다. 그 길은 좁고 협착 하여 찾는 사람이 적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럼 주님이 걸어가신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런 것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고 합니다.
1. 하늘에서 땅으로
이번주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절기 상으로 보면 사순절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흔히 재의 수요일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금식한 것을 본받아서 사순절 시작 첫 주일 전 4일을 더해서 40일을 채웠는데, 참회자가 참회의 한 표로 재를 머리에 뿌리는 것을 시작으로 사순절에 들어갑니다.
이 절기는 부활절을 준비하는 참회의 기간으로 부활절전 6주간을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금식한 것을 본 따서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금식하기도 하면서 경건하게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기간 동안에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준비하는 시기이고, 죄를 참회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초기의 수세기 동안 이기간은 교회에서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사순절기간동안 우리가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자는 의도에서 사순절 묵상집을 여러분에게 한권씩 다 나눠드립니다. 이기간 동안에 매일, 매일 이것을 묵상하시면서 여러분의 신앙을 다시 한번 견고히 하시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하늘에서 땅으로”입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의 길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바로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이해가 되든지 안되든지, 믿든지 안 믿든지, 하늘에서 땅에 이르는 길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냐고 사람들은 외칠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모습입니다. 여러분! 그럼, 하나님이 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요! 그것을 바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길 위해서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한가운데 들어오셔서 여러분의 형편을 살피시고, 여러분의 아픔을 끌어 앉으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시길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옛날 좋은 임금이 평복을 입고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백성들의 눈에서 보고 백성의 피부에 맞는 정책을 펼쳤던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오신 줄로 믿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 속 깊숙한 곳으로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특히 이 땅에 소외 받고, 외로운 사람들 속으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 속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희망이 됩니다. 민정시찰을 하고 난 임금이 나중에 우리 집을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그 집의 문제는 해결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문제는 이미 다 해결되어진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 성육신의 길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계시는 “열어서 보여준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에게 보여 주시는 것에는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즉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기에 하나님은 특별히 자신을 직접 보여주시게 되었는데, 이것을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그 특별계시가 바로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 특별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특별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의 본체를 드러내지 않고 낮추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임금의 민정사찰이야기를 했지만,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임금은 임금의 왕복을 벗고 평민의 옷을 갈아입고 자기의 본체를 감추고 왕좌에서 내려와 왕궁 문을 나가 낮은곳, 더러운곳. 가나한곳으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마치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모습을 이사야는 “흠모할만한 것이 없다” 고 말하면서 불품이 없고 존경받을 만한 점이 없다고 전하고 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자기 땅에 왔으나 영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으로 오시기 위해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영원이 순간 속으로, 무한이 유한의 세계 속으로 영광이 초라한 모습으로 주인이 종의 모습으로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땅으로의 길은 철저한 자기 낮춤, 그리고 그 낮아진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역사를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 반대로 땅을 말하면서 하늘의 자리에 있으려하고, 겸손을 말하면서 교만하고, 순종을 말하면서 지배하는 모순, 속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길을 우리도 걷는다고 고백하면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그 길이 아니라 자꾸만 하늘로만 올라가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의 종국적 목적지는 하늘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로 가는 길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여 주신 그 길이어야 합니다. 다른 길로 가면 안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그 길은 성육신의 길입니다. 섬김의 길입니다. 낮아짐의 길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내려놓음의 길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길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그 길을 들어설 때 우리는 하늘 길로 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3. 영광의 길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성육신의 모습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낮아지셨으나, 비하되셨으나, 아버지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길은 비참하고, 비천하고, 비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며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있어도 그 본분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사람됨의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왕자와 거지 이야기속에 나오는 거지 옷을 입은 왕자가 있습니다. 비록 옷은 거지이지만 그의 품위만은 여전히 왕자입니다. 사람이 되셨으나 거기에는 사람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 기품, 품위, 권위가 보여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라함만 보지말고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만 보지말고 하나님을 보아야 하며, 사건만 보지말고 섭리를 보아야 합니다. 성육신 속에 숨겨 있으나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바로 주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동시에 이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으니 은혜이며, 하나님이 죄인을 찾아 주셨으니 은혜요, 누추한 곳에 오셨으니 영광이며 비천한 죄인들이 감당하기에 분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입니까? 나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데, 감당할 수 없는데, 그리고 어떤 것을 차지 할 수 있는 실력도 없는데, 그런데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해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용서해주시고, 복을 주셨으니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가까이 오시고,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또한 독생자의 영광 속에서 우리는 진리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 자체가 진리이면, 진리의 전달자이며, 가르치시는 자요, 진리로 이끄시는 분이며 이것이 우리에게 바른 길, 바른 도가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심이 그리고, 자유케 하고, 모든 결단의 순간, 방황의 순간에도 올바른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가게 하는 기준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땅으로의 길은 하나님의 단순히 오심이 아니라 완전한 오심이며, 이는 하나님의 영광, 은혜, 진리를 조금도 부족함 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육신하신 사건은 하나님의 영과, 은혜, 진리를 나타내는데 모자람이 없고,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길에서 사람들이 살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성육신의 사건을 영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해 주셨는데, 사람들은 영접하지 아니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영접은 고사하고 오히려 분노하고, 경멸하고, 배척하고, 결국은 죽게 했습니다.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진리, 생명, 진실, 은혜, 영광이 핍박을 받습니다. 배척을 당하고, 크나큰 희생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땅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시고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문제는 영접입니다. 이 영접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영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관계의 형성입니다. 이것이 가장 우선적인 관계의 형성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가장 희생적인 사랑의 관계 형성입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하고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하나님이 먼저 원하신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 속에 나오는 집을 나간 둘째아들은 돌아오면서 품군을 원했지만 아버지는 “아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즉 “나는 아버지다” 하시면서 아버지가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하나님은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접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믿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접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특권을 받아들이고 누리고 감격하는 믿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특별한 권리로 아는 것이 믿음이며, 은혜입니다. 인간이 “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분의 그 풍성함이 모두 우리의 것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낮추시고, 비우시고 오셨습니다. 이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만나야 하고 걸어야 할 믿음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이 되셨나! 그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자격이 없고, 나는 잘 믿지 못했으나 아버지는 날 기다리시고, 아버지 집은 풍성하고, 아버지는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아버지를 영접한 믿음의 자녀로 돌아가는 믿음의 길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의 길에 우리가 있어야만 은총도, 보상도, 축복도, 승리도 가능한 것입니다.
미국의 제22대 대통령이었던 클리브란트의 이야기는 그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 줍니다. 클리브란트는 청소년 시절에 매우 방탕하게 살았었습니다. 매일 술친구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면서 허송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날도 클리브란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친구와 함께 손을 잡고 잡담을 주고받으면서 술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한 교회당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클리브란트는 그 교회당을 쳐다보면서 지나가다가 예배당 문에 써 있는 성경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 말씀을 읽던 그 때, 클리브란트는 자신의 가슴에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말씀이 강하게 찌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이 마치 자신의 행동과 모습에 사형을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예수를 믿기 시작했고 자신의 삶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클리브란트는 대통령에 당선되어서 백악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함께 교회당 앞을 지나갔던 그 친구는 무기 징역의 죄수가 되어 형무소로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인생의 길을 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결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인생의 길을 걸을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힘이 들고 어려워도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우리가 성경에서 들었던 믿음의 사람들을 우리가 다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이 길에서 주님을 만났고 그 길로 갔습니다. 목자들이 그랬고 동방박사들이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고 지금도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그렇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길은 느긋하고 여유 있는 낙관적인 길이 아닙니다. 모두가 어려운 길이며, 험한 길이며, 냉혹한 길이며, 결국에는 십자가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길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빛나고, 영광은 드러나고, 목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내 믿음에 주어지 은총의 특권으로 알고 속죄의 능력을 힘입어 하늘 길을 걸어서 주님 앞에까지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