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고다의 길 막15:16-23
골고다의 길 마가15:16-23 종려주일 08.3.16
예루살렘을 순례를 하려면 반드시 가는 코스가 있는데, 비아돌로로사 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신 바로 그 길입니다. 비아돌로로사라는 말은 슬픔의 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로마총독 빌라도의 집무실에서 골고다언덕까지 연결된 1.5Km정도의 길입니다. 이곳에 가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지순례로 오는 코스라는 사실을 알고 십자가를 대여해주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대여해주는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함께 했던 한 목사님은 이 길을 신발신고 갈 수 없다하여 맨발에 십자가를 대여해서 걸어가면서 울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이 길은 약14개의 기념교회와 장소가 있는데, 빌라도법정, 선고교회,채찍교회,첫번째 넘어진 곳, 마리아를 만난 곳,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간 곳, 베로니카를 만난 곳,두번째 넘어진 곳, 예루살렘여인들을 위로한 곳, 세번째 넘어진 곳,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옷을 벗긴 곳, 형틀에 못박힌 곳, 운명한 곳, 아리마데 요셉이 시체를 내린 곳, 예수무덤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과 같이 거룩하게 꾸며지지 않았습니다. 그 지역은 아랍지역으로 좁은 길을 따라서 일반 가게 상점들이 줄지어 서있는 좁은 시장골목입니다. 처음에는 이길을 걷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듯이 지켜보는 그 길을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이 영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가 마음속에서 미어져 나오는 눈물이 있었는데, 주님이 걸어가실 때에도 이와 똑같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주님의 십자가는 구경거리였고, 조롱거리였고,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벌을 받나 하며서 모욕을 주는 그런 길이었을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까 얼마나 통곡이 나고 울움이 터져 나오는지요. 벌써 성지순례를 다녀온 지가 4년도 되었지만 여전히 이때만 되면 그때의 눈물과 감격이 어울어져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십자가위에서 로마병정들에게 받으신 멸시에 대한 부분입니다.
1. 거짓 평안.
오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어달리기 위해서 로마병정들에게 이리끌리고 저리 끌리면서 데리고 다나는 모양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병정이 모든 군대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에게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서 씌우고 하는 말이 “예를 다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라고 합니다. 로마병정들이 예의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오늘 그들은 왜 이른 일을 했습니까! 예수님이 자칭 왕이라고 했기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죄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15장2절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때 주님이 대답하신 말이 “네말이 옳도다” 예수님은 진정 이땅에 왕중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수많은 예언자들의 예언이 메시야를 왕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에 헤롯왕이 칼을들고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동방박사들이 한 말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2:2에 보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려 왔노라” 고했던 말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권력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자꾸만 신경을 썼던 이유는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가 왕으로 오셨다는 그 말 때문에 그렇다면 예수가 어떻게 왕이 될 것인가! 구테타라도 일으키겠다는 말인가! 하면서 예수를 경계했던 모습을 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이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이 질문은 이미 예수와의 싸움에서 승자가 되고 상대방의 목숨을 자기 손안에 넣은 입장에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거만한 질문이겠습니까! 그리고 끝까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는 예수가 얼마나 가소롭게 보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로마병정들의 눈에 얼마나 기가 막히게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조롱하려고 예의를 갖추어서 왕을 상징하는 자색옷과 왕관대신에 면류관을 씌우고는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라고 절을 했던 모습을 봅니다. 조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경멸하기 위함입니다. 평안을 빌고 있지만 그것은 평안이 아닙니다. 거짓평안을 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비웃음의 거짓평안을 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우리에게 평안을 빌 것 같습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평안을 기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세상 어느 무엇으로도,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평안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할 것 같지만 아무리 많이 가져보십시오! 평안한가! 오히려 그 돈 때문에 평안이 더 깨어집니다. 형제들과 싸움이 나고, 돈 몇푼 때문에 엄청난 비극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돈이 평안을 줄 것이라고 하면서 돈을 벌라고 합니다. 돈이 최고하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귀가 주는 돈은 우리의 영혼을 훔쳐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롯 유다의 경우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에 필요한 물질을 관리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에 돈이 들어오고 나가면서 그는 돈맛을 알았습니다. 그 돈맛이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었던 여인을 향하여 화를 내가 만들었고, 그 돈맛이 결국 예수님을 은30에 팔아버리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마귀에서 그의 영혼이 팔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돈을 자신이 한푼도 써보지도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스스로 만들고 말았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물질이 필요한지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을 소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을 위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건강한 물질을 우리에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소유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건강하게 땀을 흘려서 벌은 물질, 그런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는 평안을 얻으려고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일처음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요20:19) 이었던 것을 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 이것이 진정한 평안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불안하고, 힘들어하던 영혼속에 평안을 주셔서 어떤 상황이 와도 어떤 어려움이 와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고 기뻐하면서 모든 일을 웃으면서 아멘 할수 있는 그 평안을 주님은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이 주는 거짓평안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2. 거짓 복종.
그리고 또 로마병정들이 “꿇어 절하더라. 고합니다. 절을 한다는 것은 복종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복종을 진짜복종이 아닙니다. 거짓복종입니다. 거짓으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입니다. 어는 이혼을 앞둔 부부가 가정상담을 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서로는 예의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상담원에 비친 모습을 전혀 이혼할 것 갖아 보이지 않는 부부였습니다.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상담원에게 자신의 부인과 남편을 욕하지 않았고 예의를 갖추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상담원은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거짖 된 모습이고, 거짓된 예의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참이야기를 하다가 한쪽에서 참지 못하고 하는 말이 ”집에서 하던 대로 해봐! “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 있다고, 거짖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 거짓된 복종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 그에게 복종하는 척만 하고 있으면 아니꼽고, 더러워도 지금 이 순간만 참자! 하면서 거짓된 복종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순간이 지나가면 본색을 들어내기 시작하면 무서운 복수의 칼을 들이댈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복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거짓 복종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헤롯왕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을 동방박사들을 불러놓고 자세하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 가서 아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고합니다. 헤롯에 정말로 예수님께 절을 하려고 알아보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거짖 복종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을 찾기만 하면 그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던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거짓 복종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무릎을 꿇는 것처럼 보입니까! 세상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마귀는 절대로 우리에게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에게 무릎 꿇리려고 했던 것이 마귀입니다. 금식기도가 끝이 난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 고 요구했던 것이 마귀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자신 앞에 무릎 꿇리려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신에게 무릎 꿇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절대로 세상은, 마귀는 우리에게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실패시키고, 좌절시키려고 합니다. 절망시키려고 합니다. 순진하고 착한 사람들이 간사한 거짓복종에 속아서 그 사람이 충신으로 알았다가 모든 것을 맡긴 후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후회하는 이야기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없는 복종, 순종, 웃음, 말 한마디는 상대방을 죽이려고 하는 계략일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섬김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낮추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우리들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보여주신 이 복종, 순종, 그리고 섬김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이곳에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진신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창세기40장에 보면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이 감옥 속에 갖혀졌을 때, 후에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같은 감옥에 들어오게 됩니다. 간수장은 이 사람들이 아무리 죄수로 왔다 할지라도 정부의 고관이기 때문에 그들의 수종을 요셉에게 들게 합니다. 요셉은 성실하게 그 사람들에게 복종을 하면서 그들을 섬깁니다. 비록 같은 죄수의 몸이라 할지라도 요셉은 마음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얼마만큼 했는가 하면 그들의 얼굴색까지 살필 정도로 마을 담았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다한 섬김의 모습이 그들의 꿈을 해석하게 하였고, 후에 그가 총리가 되어지는 일의 동기가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거짓복종, 거짓 섬김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담은 모습, 남들이 보든 안보든 성실하게 섬기는 그 모습을 우리에게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3. 거짓 위로.
또한 예수님을 골고다로 끌고 가서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는 고통을 덜어주게 하는 포도주입니다. 앞으로 당할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하는 마음인 것 같지만, 그것마저도 거짓 위로가 됩니다. 그들은 주님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것 같았지만 주님의 죽음 앞에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서 누가 가져갈까 하면서 탐내고 있었던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는 결코 주님을 위하려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위로를 줄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는 언 듯 보기에 괜찬을 것 같지만 그것은 순간입니다. 그 후에 더 큰 고통이 닿아오게 됩니다.
어떤 믿음의 사람이 하루는 너무 실망해 보입니다. 그래서 하루를 그를 위로해 준다고 하면서 술 한병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마시라고 합니다. 아무도 안보니까 괜찬다고 합니다. 나만 아니까 안심하고 마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믿고 한잔 마셨습니다. 그런데 후에 보니까 두고두고 그 사람이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넘어뜨리게 하는데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 어느 집사님도 술을 마셨는데, 괜찬아! 하면서 마귀가 한사람을 넘어뜨리고는 간증거리로 삼고 있었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 세상이 가져다 주는 위로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진정한 위로가 아닙니다. 순간 위로가 될 것 같지만, 후에는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귀가 가져다 주는 거짓 위로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위로입니다. 죄악 속에서 짖눌려 살던 사람들에게 죄로부터 자유함을 주셨고, 죄인된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셔서 그들의 마음속에 진정한 기쁨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진정으로 우리의 위로자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더 이상 외로워하지 않았고, 힘들어하지 않았고, 위로 받고, 새힘을 받아서, 새로운 인생 길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들을 봅니다. 거짖된 위로 속에 우리가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거짖된 평안과, 복종과 위로는 겉으로는 위하는 것 같지만, 그들이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예수님께 고통을 가져다 주는 거짖 된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거짖된 것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섬김과 위로하심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한 주간 주님이 걸어가신 골고다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고통하면서 걸어가셨던 길입니다. 모든 거짖된 것들을 물리치는 길이었습니다. 진리가 죽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약하게 보였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이 한 주간을 더욱 경건한 삶으로 살아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