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의 길 눅24:13-35
엠마오의 길 누가24:13-35 부활주일 08.3.26
지난 사순절기간동안에 했던 설교의 내용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애굽에서 광야로, 갈릴리의 길목, 사마리아의 길, 예루살렘의 길, 골고다의 길이었습니다.
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난에서 고난으로, 희생에서 희생으로의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우리도 따라가면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우리에게 자신을 따라오는 것이 진리와 영생에 이르는 길임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고난의 길이지만, 그럼에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을 때 우리는 부활의 영광의 길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걷고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이 부활의 의 소식은 분명 기쁨이고, 승리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두려움이 되었고 의심이 되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던 것을 봅니다. 제자들이 그동안 예수님께서 내가 죽을 것이지만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기회 있는 대로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들었었는지, 아에 부활을 기대도 하지 안고 있었던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두 제자는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엠마오로 즉 고향으로 낙심이 되어서 낙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풀이 죽어 절망감 속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닭 쫒던 개처럼, 멍하니 처다 보다가 하늘만 처다 보다가 낙향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왜 엠마오를 향해서 갔을까요!
1. 기대감의 상실.
그것은 기대감의 상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다는 말을 듣기는 들었어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남아 있지 않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19절에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1절에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 할 자라고 바랐노라” 고합니다. 그들의 기대감이 나옵니다. 그런데 상상도 못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그가 20절에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이 그들의 머릿속에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일과 불행한 일 중에 어느 것이 더 머릿속에 많이 남아있습니까!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은 어둠의 생각입니다. 부정적인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이런 것들을 들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말해주어도, 그러면 뭐해! 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주님께서 분명히 죽음과 함께 말씀을 해주셨던 “다시 살아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분명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말하기를 23절에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 부정적인 말이 모든 기대감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단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불어넣어 주어서 인간을 파멸시키려고 합니다. 부정적인 사고에 사람이 한번 사로잡히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어도 그것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로마사람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쫒아내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었을 때, 그때 한자리들 하려고 예수님을 쫒아 다녔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 믿으면 복을 받지 않을까! 예수님 믿으면 출세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지는 않습니까! 지금 한국에서는 어떤 한 교회가 한국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대통령이 장로로 있는 모 교회가 시끄럽습니다. 갑자기 그 교회에 등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서로들 대통령과 인맥을 댈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어떤 고위 정치인이 교회에 등록을 하면서 담임목사에게 교회의 직분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들 그 교회에 다니면 무엇인가가 생기는 줄 알고 몰려온답니다. 그것 때문에 정작 그 교회에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까지도 세상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빌라도에게 찾아왔던 아리마대 요셉 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빌라도에게 나타나서 예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모시겠다고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그도 예수의 제자라”(마27:57)고 합니다.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을 하고 숨어있는 이때에 등장했던 요셉은 예수에게 무엇인가 얻으려고 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신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성경에 그는 부자였다고 합니다. 괜한 오해를 사서 빌라도에게 어떤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기대 할 것이 없었지만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갖는 기대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기대감이 교회를 다녀도 체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제자들은 그 기대감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실망과 좌절로 다시 고향 엠마오를 향하여 낙향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이전생활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기대감을 상실하게 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2. 찾아오신 주님.
그런데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은 찾아가 주십니다. 상실감속에서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옆에서 누가 와서 이야기를 해도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가 봅니다. 본문16절에 보면 “저희의 눈이 가리워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 바로 옆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데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에게 계속해서 말씀으로 자신의 부활이 이미 구약성경에 다 기록이 되어져 있었던 일이었음을 풀어서 설명을 해주십니다. 27절“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의 이야기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오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어느날 갑자기 생각이 나서 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두고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그리고 모든 것은 완벽하게 이루신 것을 봅니다. 누구를 구원하기 위한 오랜 계획이었습니까! 바로 여기 앉아 있는 한사람, 한사람을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운데 어느 누구도 무시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내가 미운 사람이 있고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할지라도 우리는 미워하면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오늘 실망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친히 찾아가 주셨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실망한 영혼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절망 속에서 어두움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스승을 잃은 두려움 속에서 문을 잠그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만나주시고 다시 그들이 소생할 수 있도록 회복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3. 회복의 은혜.
오늘 제자들이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면서 해가 저물어가고 그들이 한 여관에 들어가서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들어가서 음식을 먹을 때 주님이 그들에게 먼저 떡을 떼어서 축사를 하시고 그들이 그것을 먹으면서 그제서야 저희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30,31)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 하는 순간에 주님은 저희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말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뜨겁지 아니하느냐” 그리고 그들의 발걸음은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순간에 그들의 실망하고 좌절했던 그 영혼들이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 회복이 그들의 발걸음을 다시 사명의 길로 옮기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충만해졌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루터가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서 낙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낙심과 번민 중에 있는데, 하루는 그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 들어왔답니다. 그래서 루터가 부인에게 “누가 돌아가셨소! 웬 상복이요!”라고 물었더니 “주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루터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자 그의 아내는 주님이 돌아가시지 않고서야 당신이 이렇게 나약해지고, 낙심할 수가 있겠느냐!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에 루터가 다시 일어나서 주의 일에 힘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의 소식은 우리를 실망하게 만듭니다. 좌절하게 만듭니다. 무능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식은 우리를 다시 회복하게 하고, 힘을 얻게 하고, 용기를 갖게 합니다. 다시 일어서리라는 결단을 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소식입니다. 이 부활의 사실이 이제 여러분의 삶 속에서 느껴지고 만나져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찾아오셔서 다시 우리의 발걸음을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엠마오의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낙향의 길입니다. 실망의 길입니다. 절망의 길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우리의 모습도 이렇게 됩니다.
이것은 평상시의 모습이 아니라 문제를 당했을 때, 큰일을 당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고 당황해 하다가 엠마오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다가 중간에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기대한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이 예수 부활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알기는 알았지만 만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 부활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온 세계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알면서도 엠마오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은 삶이 달라지고, 얼굴색이 바뀌어지고, 삶에 용기가 나기 시작하고, 언제나 밝게 웃으면서,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와도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실 바랍니다.
그런데 그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찾아가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찾아와서 만나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은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예배 중에 찾아오셨습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찾아오시기도 하고, 친구의 모습으로 찾아오시기도 합니다. 엄마의 모습으로 찾아오시기도 하고, 아버지의 모습으로 찾아오시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의 모습으로도 찾아오시기도 하십니다. 성도가 함께 식사를 할 때에 그 식탁의 자리에 찾아오기도 합니다. 마음을 열어놓고 있으면 영의 눈을 열어놓고 있으면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그 순간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발걸음은 다시 예루살렘,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던 사명의 자리로 옮겨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부활주일에 바로 그 주님을 만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