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에 고후6:11-18
멍에 고린도후서6:11-18 08.8.10
이번 북경 올림픽 때 80개국의 정상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 나라의 왕이든지, 대통령이든지, 수상이든지, 총리든지, 80개국의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들은 무엇일까요! 스포츠를 통한 외교 목적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실리 관계 속에서 이득이 된다면 누구하고도 악수를 해야하는 것이 정상들의 외교전쟁 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하고는 끌어안고 인사를 하고, 어떤 사람하고는 가볍게 악수로 인사하고, 또 어떤 이하고는 눈으로만 마주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서로의 실리가 있는 국가의 원수하고는 끌어안고라도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대인관계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기 불편한 사람들도 있고, 안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 나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 이런 실리 속에서 만나는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은 아마도 마음이 넓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무엇이든지 이해해줄 수 있고 또 받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어떤 이야기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이 좁은 사람을 만나면 어떻습니까! 말 한마디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무슨 말을 했다가도 혹시 오해하면 어떻하나! 하는 염려가 남게 됩니다.
사실 이 땅에서 가장 마음이 넓은 사람은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세상에 우리처럼 많이 용서받은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마음이 넓은 사람은 고생을 하면서 산 사람보다도 사랑을 받으면서 산사람이 더 넓은 마음과 이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만큼 마음을 넓혀야 하는가 하면 여러분이 용서받은 만큼 넓히시길 바랍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가 용서받은 만큼만 나도 남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받아주고, 이해하고 사랑하자! 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13절에 보면"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바울이 하는 말마다 반대를 하고 나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믿지 않고 반대를 하고 받아 주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반대는 무슨 반대인가 하면 "반대를 위한 반대"입니다. 내용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무조건입니다. 그런 반대에 부딪치고 나면 어떤 말도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어집니다. 그들의 마음은 좁아질 대로 좁아졌습니다. 그들은 불행한 삶을 살게 되어집니다. 늘 반대만 하면서 살아가는 인생 속에 긍정적인 일들이 어떻게 생겨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그런 일들이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한번 사람이 싫어지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다 싫어지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왜 그렇게 속이 좁게 되었는지를 지적을 하면서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권면을 하는 바울의 심정은 어떤 심정인가 하면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12절)라고 합니다. 즉 부모의 심정으로 사랑하는 자녀에게 하는 마음으로 권면 하는 내용입니다.
1. 믿지 않는 자와 메는 멍에
오늘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왜 그렇게 그들의 마음이 좁아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지적하는 내용이 그들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그렇게 변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 있는데 "멍에"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소나 말에게 일을 시킬 때 달구지나 쟁기를 끌게 할 때 목에 거는 막대입니다. 그것을 목에 걸고 끌게 해서 밭을 매기도 하고 짐을 나르기도 합니다. 밭을 갈거나 할 때는 두 마리에게 동시에 이 멍에를 씌우기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멍에를 같이 멘다는 것은 같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일심 동체처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 교회 성도들 안에 불만이 많고 속이 좁은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이렇게 불신자들하고 같이 멍에를 메고 그들과 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교제하는 것을 통해서 그들의 영향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하고 교회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이야기를 합니다. 같은 교회의 누구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긍정적이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꼭 누구 욕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욕하는 이야기는 장단이 얼마나 잘 맞는지 모릅니다. 믿다가 떨어진 사람들하고도 교회에 대해서나 사람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는 장단이 잘 맞습니다. 사람이 한번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면 그의 영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받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그런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놓고 믿지 않는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그들이 바울에 대해서 속이 좁아 졌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바울이 하는 말이 다 부정적이고 우습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오해를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세상 많은 사람들과 교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을 구원할 수 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멍에를 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멍에를 지는 것은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이 세상 속에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과 복음을 위해서 교제는 하지만 같은 행동과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달라야 합니다. 다른 말을 해야 하고 다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을 복음으로 이끌 수 있고 전도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의 의견은 강합니다. 그들의 말도 강하고 논리도 강합니다. 아마도 마귀가 힘을 실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보이고, 모든 것이 다 부정적이고 우습게 보이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본인의 영혼은 점점 병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 절대로 누구하고 만나서 누구 욕하는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장단을 잘 맞추고 있는 것 같지만 함께 장단을 맞추고 있는 그 사람은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 지 아십니까? "이 사람 조심해야 하겠구나, 나하고 돌아서서 다른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어떻게 할지 모를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달라야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무엇이라 합니까!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14-16)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둠의 자녀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긍정적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라.
우리는 오히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서 그분의 생각을 하고 그분의 말을 하고 그분의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주님의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 대해서 그렇게 핍박을 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1절에"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전히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여전히 그들을 향하여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들을 용납하고 또 그들에게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한번 누가 나한테 뭐라 그런다고 그 다음부터는 말도 안 하는 사람들은 속이 좁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여전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변하질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내가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습니까? 나는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았다! 아무런 죄 없이 살아왔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한번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없습니까? 나는 한번도 사람들을 속인 적이 없습니까? 나는 한번도 죄를 짖지 않았습니까? 그 물음 앞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 의인은 없습니다. 단지 이 땅에 용서받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 중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용서를 받고 살아갑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늘 잘못했다고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많이 하는 사람이 많이 용서를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런 용서의 사랑을 매일같이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주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오늘 우리에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예수의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가장 큰 신앙의 목표가 있다면 "예수님처럼 사는 것"일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면 우리가 바로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멍에를 잘 메어야지 밭을 잘 갈 수 있습니다. 멍에를 씌우는 목적을 밭을 갈기 위함입니다. 밭을 갈아서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싹을 내고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풍부한 농사를 짖기 위해서 멍에를 씌우는 것입니다. 고생을 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해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멍에를 매고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 성도들이 되어집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 주님의 일을 통해서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과 멍에를 메는 것은 생산적인 일이지만. 믿지 않는 이와 멍에를 메는 것은 파괴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생산적이 성도가 되겠습니까? 파괴적인 성도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성도들이 되겠습니까? 파괴하는 성도가 되겠습니까? /교회를 세우는 성도들이 되겠습니까? 교회를 무너뜨리는 성도들이 되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십시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하는 길입니다. 생산적이고 많은 열매를 맺어서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일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3. 제대로 멍에 맨자의 축복
18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정말로 제대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17절 후반부터 이어집니다.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축복입니다.
챨스 스펄전 목사님이 쓰신 "기도와 영적 싸움" 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에 대한 목록표를 만들어야 한다면, 다음과 같이 적으십시오.
“그분은 나에게 그분의 아들의 권리와 본성을 주셨고,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다.
그분은 나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셨고, 지금 나는 그 옷을 입고 있다.
그분은 나를 그분에게 나아가게 하시고 은혜의 보좌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분은 나에게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을 주셨다.
그분은 나에게 그분이 갖고 계신 모든 것을 주셨다.
그분은 나에게 그분의 아들을 주셨다.
그런데 그분이 어떻게 나를 거절하실 수 있겠는가?
그분은 유일하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나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당신의 자녀에게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때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탕자의 비유의 내용에 나오는 큰아들처럼 생활할 때가 많습니다.
집을 나간 동생이 거지가 되어서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끌어안고 옷 갈아 입히고, 잔치 벌려주는 것을 바라보는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갖는 불만이 무엇이었습니까! " 내가 지금까지 아버지를 위해서 그렇게 일을 해왔는데 나에게는 친구들하고 먹으라고 염소새끼하나 주지 않더니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저놈을 위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습니까!" 라면서 불만합니다. 그때에 아버지가 한말이 무엇입니까? "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15:29-32) 라고 말했습니다.
큰아들은 아들 된 특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녀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녀 됨의 가장 큰 축복은 "아버지 것이 다 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것을 바로 당신의 자녀이신 예수 믿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만드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지금 내 주머니 속에 없다고 근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세상의 모든 것을 어떻게 우리의 그 작은 주머니 속에 넣어주시겠습니까?
이 땅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우리를 위해서 주셨기 때문에 온 세상에 펼쳐놓고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쓰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는 소유하는 이가 아니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소유는 부모가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뼈빠지게 일을 해서 사다 놓으면 사용은 누가 합니까? 다! 애들이 합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시고 우리는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넓게 사시길 바랍니다.
사실 소유한사람은 힘이 듭니다. 세금내야지요. 유지해야지요. 관리해야지요. 그러나 사용하는 사람은 간단합니다. 그 힘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하시고 우리는 그저 편하게 사용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런 축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을 좁게 해놓는 것 같습니까? 세상사람들과 함께 멍에를 메기 시작하고 그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의 마음과 모든 것이 좁아집니다. 편협해집니다. 이상한쪽으로 자꾸만 발전해 갑니다.
성도의 삶은 그것이 아닙니다. 본인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져 갑니다. 왜냐 하면 사단이 뒤에서 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 사단이 그렇게 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과 사궈야 합니다.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 됨의 정체성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함께 멍에를 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도로서의 삶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멍에를 멜 때에 농사는 풍작을 이루어서 우리에게 풍부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의 삶의 모습 속에 하나님께서 자녀 삼아 주시는 축복을 받아서 아버지 것을 다 우리가 마음껏 사용하면서 누리면서 살아가시는 축복된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