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출2:11-22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출2:11-22 08.8.17
북경올림픽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게임을 보면서 느끼는 부분들은 시간입니다. 기록을 내는 선수들에게 있어서 1초는 엄청난 시간이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그 짧고 짧은 1초 동안에 메달의 색깔이 달라지고, 그 1초를 위해서 수많은 시간을 고생하면서 훈련하고 또 훈련하고, 그랬다 할지라도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서 그동안 흘렸던 땀과 수고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일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이번 올림픽이 끝나면 수많은 간증들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인류에게 감동을 주고, 희망을 줄수 있는 이야기들이 수많은 선수들의 눈물과 함께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메달의 딴 어떤 선수의 이야기가 TV에서는 다큐멘타리로 만들어질 것이고 그것을 보면서 온 국민은 또 한번 감동할 것입니다. 그 속에는 수많은 고난과 고통의 이야기들이 반드시 핵심을 차지할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었는가!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나도 비록 지금은 힘들더라도 저 선수처럼 나도 이겨야지, 하면서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다짐을 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 감동과 웃음은 메달을 딴 선수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때 있었던 “에릭 무삼바니” 라는 선수입니다. 그는 적도기니 출신으로 수영연맹의 초청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수영이라고는 바다나 강에서 해본 것이 전부였던 그가 레인이 있는 50m 수영장에서는 처음으로 수영을 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올림픽 참가가 정해지고 난 뒤에 호텔에 있는 20m짜리 풀장에서 연습해 본 것이 다였다고 합니다.
시합이 있는날 예선전에 3명이 참가했고, 그나마 두명의 선수가 부정 출발하여 결국 에릭 혼자서 열심히 헤엄을 쳤으나 50m가 지나면서 체력이 다했고, 턴을 하고 난 후부터는 정말 빠져죽지 않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서 헤엄을 쳤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마지막15m에서는 정말로 죽을 뻔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완주했을 때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정식 수영장도 없는 나라에서, 늘 바다에서 고기잡기 위해서 헤엄을 쳤던 그가 올림픽이라는 곳에 나와서 죽을 힘을 다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관중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올림픽에서 돌아온후 모국에서 스포츠 영웅이 되었고 대통령이 만찬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영국의 한 방송사에서 초청을 했고 그는 TV출연이냐 대통령과의 만찬이냐를 놓고 갈등하다가 TV출연을 너무하고 싶어서 대통령과의 만찬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는데 이 소식을 들은 대통령이 열받아서 비행기를 회항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후로 4년 뒤인 아테네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으로 자신의 기록을 57초로 당겼지만 대회직전 참가 신청서와 여권을 잘못 기재하는 바람에 대회에 참석을 못했다고 합니다. 좀 웃기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수영장도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서 올림픽에 참가해서 죽을힘을 다해서 완주한 그에게는 박수를 보낼 만 합니다.
국가을 대표하는 한 선수는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훈련과 경기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회에 나온 한 선수 한 선수 그리고 그들이 메달을 따든 못 따든 상관없이 우리는 박수를 보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당신의 일을 할만한 사람들을 먼저 찾으십니다, 그리고는 그를 훈련과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완전한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할 만한 사람을 찾으시고, 그리고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들을 찾으신다.
오늘 본문의 내용에는 한 사람이 등장을 하는데 그는 모세라는 인물입니다. 모세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어집니다. 그가 태어났던 시대적 상황은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고, 특별히 애굽에서 계속 늘어나는 이스라엘 민족말살정책이라고 할까요! 더 이상 이스라엘이 불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바로왕이 히브리인들이 태어나게 되면 남자아이는 다 죽이라는 엄한 명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는 그의 어미에 의해서 바구니에 담겨져 그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겨진 체 나일강에 띄어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마침 나일강에 목욕을 나온 바로의 공주에 의해서 건져져서 "모세"라 이름지어지고, 주님의 뜻으로 그의 생모는 공주의 유모로 들어가서 바로의 궁에서 살게 되어집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양육하면서 그의 귀에다가 날마다 심어주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너는 히브리인이다. 하면서 여호와 신앙"을 집어넣어 줍니다. 바로의 왕자로 자라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늘 나는 히브리인이다. 나는 여호와를 섬기는 자다"라는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자란 것을 봅니다.
강한 민족적 자존심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 민족적 자존심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아무리 그 민족적 자존심을 가지고 나라를 사랑한다해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민족적 자존심이 좋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구약의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었던 "요나"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에게 붙어 다니는 별명은 무엇입니까? "불순종"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가 불순종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그의 강한 "민족주의"였습니다. 자신의 나라의 적대국이라고도 하는 "니느웨"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말씀 앞에서는 그가 다른 말씀은 다 순종해도 그것만은 할 수 없다고 하는 강한 자기 자존심입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애국"으로 대변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닌 것입니다. 자기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대립될 때에는 자신의 생각을 접을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 모세는 강한 민족정신으로 무장이 되어 있다가 마침 길거리로 나갔다가. 애굽사람과 히브리인이 싸우는 것을 바라보고 그가 12절에 보면"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했습니다. 애굽사람이 자기 민족을 치는 것을 보고 분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는 좌우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무도 없는지를 확인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살핀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면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의로움입니다. 자기 의는 좌우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이라면 그는 마땅히 하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사람을 살피는 것, 환경을 살피는 것, 좌우를 살펴보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이 아닙니다. 모세는 그 자기 의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을 했습니다.
이 땅에는 자기 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된 사울도 자기 의로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신앙의 잣대로 상대방을 재었던 사람입니다. 철저한 유대교인이었던 그 자신의 잣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재어 봤을 때 그들은 마땅히 없어져야 할 존재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메시아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분명히 모독하는 사라들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의로 스테반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섰으면,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체포영장을 받아 쥐고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신앙기준으로 평가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의로운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찾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를 찾으셨고, 요나를 찾으셨고, 그리고 바울된 사울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2.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그리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명자로 만드셨습니다. 모세가 그렇고, 요나가 그렇고 사울이 그랬습니다.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간섭을 하셔서 그들의 자기 의를 꺽으시고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은 사람들로 만들어 가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를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그가 애굽의 왕자에서 갑자기 살인자가 되어서 바로 왕에게 쫓기는 도망자의 신세로 만드셨습니다. 왕궁에서의 그 좋은 삶을 한순간에 다 잃어버리고 그는 광야의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디안에서 목동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양을 치고, 물을 먹이고, 그리고 똥을 치우면서, 양떼를 거느리고 그리고 미디안에서 이드로의 딸과 결혼을 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시간은 1,2년이 아닙니다. 자그만치 40년이나 그런 무명의 삶을 살아갑니다. 한때는 그에게 꿈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서 모든 학술을 익히고, 무술을 배웠으면, 높은 교양을 간직했던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양을 치는 목동에게 궁전에서 배웠던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양을 치는 기술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바울이 된 사울이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 하는 자라"(사도행전22:3) 라고 고백한 그의 지식이 예수를 믿고 났더니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만들어 가실 때 하시는 방법이 먼저 자신을 부인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의 것을 버리는 방법입니다. 먼저 우리의 생각과 방법을 버리게 만드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8장 34절에 "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주님을 따르는 첫째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들어서 쓰실 때에도 자기를 부인하게 하셨습니다. 아니 자기를 죽게 했습니다. 그는 모든 광풍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을 아시고 뱃사람들에게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우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죽었을 때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물고기 뱃속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깨뜨리고 회개하게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울 역시 다메섹에서 주님께서 만나주시고 그의 눈을 가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3년간의 침묵의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을 좋아하시지만 자기의 의로 가득한 사람을 그대로 쓰시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훈련과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3.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모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바라보면 무의미한 시간이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모세는 아무런 꿈도 없어지고 그저 하루,하루 양떼들만을 돌보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이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나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할 나이, 80에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 그때에 부르신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서는 바로의 궁 에서 왕자로 있었던 그 기품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양떼들을 돌보느라고 거칠어진 얼굴을 가진 할아버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한때는 학창시절의 푸르른 꿈을 간직한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먹고살기에 바쁜 자신의 초라한 모습 때문에 스스로 실망한 적은 없으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반드시 이렇게 만드시는 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우리의 의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 생겨나기 위하여 즉 우리가 믿음으로 의로워 지기 위해서 우리를 철저하게 낮추시고, 낮추셔서 예수님을 배우시게 하십니다. 도저히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혹시 고통이 있으십니까?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으로 만드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치 울통 불퉁 거친 쇠 조각을 용광로에 넣어서 달구고 녹이고, 그리고 다듬어서 전혀 다른 그 무엇으로 만들어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일생에 대해서 어느 분이 3가지시기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나는 할 수 있다"는 시기였습니다. 사도행전7:22 에 보면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력도 있었고, 능력도 있었고, 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시기에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살인"밖에 없었습니다.
다음은 "나는 할 수 없습니다."의 시기였습니다. 그가 부름을 받았을 때는 그의 나이 80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 앞에서 몇 번이나 거부했던 이었습니다. 출애굽기6:30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고하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를 들으리이까" 고 고백했던 그였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을 받는 시기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진지한 자기 부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들어서 온전히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사용하신 시기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서 쓰시는 시기는 바로 이시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끊는 시기에 우리를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믿음으로 의인된 사람들을 쓰십니까.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때가 되어야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것을 원하신다고 한다면 자신의 온 삶을 미련 없이 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가 아니고 예수로 말미암은 의로움을 간직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자기의 잣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신앙의 폭이 있고, 관용이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인격과 덕스러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이 택한 사람들을 그대로 방치해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택한 사람을 방치하는 것은 불성실입니다. 죄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대로 방치해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그대로 자신의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을 했지만 하나님은 때가 되었을 때에 그를 부르시고, 그를 통해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행한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은 일을 그의 노년에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택하신 여러분들을 이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만들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의로워 졌을 때에, 이제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을 때가 될 때까지 주님은 끊임없이 여러분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란도 주고, 고생도 하게 하고, 땀도 흘리게 하고, 때로는 억울한 일도 당하게 하고, 아프게도 하셨다가, 그런가 하면 오랜 시간동안 침묵도 하셨다가 하시면서, 그런가 하면 때로는 행복도 주시고, 기쁨도 주시고, 찬양과 감사도 주시면서,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때가 되면 우리를 통해서 이 일본 땅에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우리를 크게 들어서 쓰실 날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소망을 잊고 살아가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들어서 그 민족을 구원하는 도구로 쓰셨던 것처럼, 오늘 여기 모여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이 일본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크게 사용하실 날이 반드시 올 줄로 믿습니다. 그 날을 위해서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고, 그리고 우리를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 편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그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바 되어서 모세처럼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