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의 말씀

자기 십자가 막8:27-38

장경태 2010. 7. 31. 16:34

자기 십자가          마가8:27-38                       09.3.15

 

어느날 주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서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각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건네주시며,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습니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만에 첫 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드렸습니다.  주님은 첫 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 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시다니요! 제가 이제 온 것도 그 때문이라구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그런데도 앞사람은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저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 맸다 이 말씀입니까?" 주님이 그에게 타이르셨습니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아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에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늘어났던 거야. 앞에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준 거야.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거지."
여러분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 십자가를 지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믿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십자가를 어떤 마음으로 지느냐에 따라서 그 십자가의 무게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는 십자가를 자연스럽게 묵상하게 되어집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빌립보지역을 여행하시면서 길거리에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의 한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어보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동안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그동안 많은 일을 하셨는데, 사람들의 아픈 상처를 고쳐주시기도 하시고, 귀신 들린자를 자유하게 해주시도 하시고, 때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배고파 할 때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배부르게 먹이시기도 하셨던 많은 사역들을 사람들이 보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궁금하셨던 것입니다.
 역시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답을 합니다.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들이 마치 지금은 순교하고 없는 세례요한의 복사판처럼 느꼈는지 세례요한이라 하고 예수님의 기적과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장면을 보면서는 능력의 대명사로 불리는 엘리야를 연상하기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는 선지자를 연상시키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자들은 들으면서 별로 나쁘지 않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냐? 라고 다시 물어봅니다.
다소 당황스러운 질문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이 대답이 나왔습니다. 말하면서도 왜 자신이 이런 놀라운 대답을 했는지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16장의 내용으로 보면 예수님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에 대답을 하십니다. 즉 이 대답은 베드로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대답이 아니고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입에 집어 넣어준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이런 일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누구와 상담을 하다가 멋있는 대답을 나고 모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어떻게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있었지! ”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의 말씀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시고 만족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직 이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셨기에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에 오늘 저는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주님은 3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십자가 없이 예수님만 믿으려고 합니다. 아니요!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는 예수님만 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가시는 길을 그냥 혜택만 받으면서 따라가기를 원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은 저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어느 누가 대신 지어줄 수 없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반드시 본인이 지어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런 저런 병에 걸릴수도  있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면역력을 갖게 되고 그 병을 이길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런 아픔은 부모도 대신 아파줄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아이들 사랑한다 해도 대신 아파줄수 없고, 대신 죽어줄수도 없습니다. 반드신 본인이 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1. 예수님의 자기 십자가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31절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신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듣자 마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사정을 합니다. 예수님 그러시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시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죽을 일 있다면 자기가 대신해서 죽기라도 할 모양으로 간절하게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래 고맙다! 니가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줄을 몰랐다”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사단에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느 누구도 대신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반드시 예수님만이 지셔야 하는 십자가였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구원의 상징처럼 생각하는 십자가는 처음부터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처음부터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저주의 상징입니다. 죽음의 상징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나 십자가형으로 처형하지 않고 범죄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사람들을 죽이는 사형틀 이었습니다. 그 형이 너무나 끔찍해서 로마인들은 아무리 악한 죄를 지어도 자국민들에게는 내려지지도 않았던 흉악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죽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상징이 될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의 상징이 된 것은 그 십자가에 예수님인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는 예수님만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간청하는 베드로를 향해서 “사단아 물러가라!” 하면서 엄하게 명하셨던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십자가를 놓고 도망하거나, 피해가지 않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짐이 너무나 무거워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끝내는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하면서 끝내는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위해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지고 오늘날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지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인류구원을 위한 십자가는 어느 누구도 대신 지을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지어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2. 제자들의 자기 십자가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한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지어야 할 십자가가 있고 제자들이 지어야할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지어야 했던 십자가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지어야할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21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장면이 나옵니다.  어부출신이 대부분이었던 그들이 다시 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간 것입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헛수고만 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는 말씀으로 엄청난 고기를 잡은 제자들을 해변가에서 불피워놓고 떡과 지금 잡은 고기를 가져 오라해서 구워놓으시고 해변의 아침식단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을 세 번 하시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제자에게 “내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 하면서 다시 사명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하시면서 그가 어떤 죽음의 십자가를 저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로마의 황제 레오의 독특한 취미로 시적인 영감을 얻는다는 핑계로 로마시내에 큰불을 지르고 맙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원성이 생기기 시작하자 그 불을 기독교인들이 질렀다는 소문을 내어서 결국은 기독교인들을 붙잡아서 엄청난 박해를 시작합니다.  박해가 심해지자 지도자들이 베드로에게 일단은 로마를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그래야 복음을 더 많은 곳에 전할 수 있겠다는 것이지요. 결국 베드로가 로마를 벗어날 때에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발걸음은 로마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한말이 유명한 말입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때의 주님의 대답은 “내 양들이 로마에서 날 부르고 있노라 네가 내 양들을 버리니 내가 다시 십자가에 달리러 로마로 가노라” 결국 베드로는 도망하던 발걸음을 로마로 다시 향하고 결국 십자가에 거꾸러 메달려 순교를 당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제자들만이 이어야한 자기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지어야할 십자가를 그들은 다 지었습니다. 그 십자가로 인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도 자기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육신을 찌르는 가시가 있었는데 바울은 이것을 벗어놓기 위해서 하나님앞에 세 번씩이나 간절하게 기도를 했지만, 하나님은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 라는 말씀으로 바울이 끝까지 자기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러나 주님은 그 대신에 바울이 그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도록 “누가” 라는 의사를 붙여주셔서 바울을 돌볼수 있게 하시고, 그 누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누가복음서를 쓰게 하시고 사도행전을 쓰게 하셨던 것을 볼수 있습니다. 바울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했던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그냥 고난과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는 구원을 이루고 제자들의 십자가를 통해서는 교회를 이루었던 것들을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십자가는 어떻습니까!

 

3. 우리들의 자기 십자가
우리 역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한다면 우리가 지어야 할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바로 어는 누구도 대신 해줄수 없는 자기십자가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따르겠다. 우리가 지어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은 것이니라”(막8:34)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제자들처럼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일수도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십자가가 된 사람들도 있고, 너무 없는 사람에게는 물질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학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그것이 십자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많이 안다고 하는 학식이 주님의 복음에 방해가 될까봐 그 많은 학식을 내가 분토와 같이 여기노라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부족한 어느 부분이 십자가일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성격이 십자가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 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참고 살아야지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이런 병도 십자가로 생각하고 견뎌야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병의 원인입니다. 이 사람은 평소 너무 많이 먹고 불규칙한 식사 생활로 인해 위장병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몸 관리를 잘 못하고 음식에 지나친 탐욕을 부리다가 얻은 병을 십자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가난이 한때 방탕하고 사치해서 생긴 것인데, 그렇게 해서 생긴 가난을 십자가로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이 다 십자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분명한 잘못과 실수로 야기되는 고난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는 두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착각의 십자가’와 ‘복음의 십자가’입니다. ‘착각의 십자가’는 고난은 고난이되 신앙 때문에 얻게 된 고난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죄로 인해서 생긴 고난입니다. 반면 ‘복음의 십자가’는 신앙을 버리면 겪지 않아도 될 불이익과 고난이지만, 순전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맞게 되는 고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어야할 십자가는 착각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는 언제 지는 것인가 하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면...”입니다. 즉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지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는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로 인한, 자신의 욕심이나, 무절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보다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억울함을 당하고, 알면서도 속아주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도, 알고도 속아 주는 것도 결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을 위한 것이고,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내가 손해보는 것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교회에 대해서 성도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질수 있다고 하다면 그것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래서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런 감정을 억눌러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중에 하나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안되면 십자가를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아픈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버릴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고 가는 그 십자가에다가 못박아 죽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시고 다음에 하신 말씀이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고 하십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죽는 것이 자신의 목숨을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6)에 말씀하십니다.
결국 자신이 부인되어지고 자신이 죽는 것은 결국 그것이 다시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중에 가장 위대한 복음은 부활인데, 이 부활은 죽음이 전제되어지지 않고서는 있을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죽어야지만 부활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죽는 것이 구원을 받는것이라 합니다. 결국 내가 지었던 그 십자가가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주여 , 너무도 힘듭니다! 주여 너무 힘듭니다!" 그녀는 날마다 이렇게 한숨지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뒤에 오는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턱썩 주저 앉아 엉엉 우려 예수님을 찾았지만 이미 소용은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자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쫓아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우리에게 있는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자기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이 사순절에 그 십자가를 다시 짊어 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힘들지만 한걸음씩 주님을 따라서 걸어가십시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영광의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