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의 말씀

생명의 양식 요6:22-35

장경태 2010. 7. 31. 16:35

생명의 양식.                               요한복음6:22-35   (26-27)                  09.3.29
 
교회사에 보면 영국과 미국의 많은 개신교회들이 소위 지정석 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교회 건물을 멋있게 짓고 그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서 돈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자리를 지정해주고 그들로부터 매년 일정액의 자릿세를 받는 제도입니다. 지정석에는 다른 사람이 앉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제도는 사실상 교회를 상류층만의 교회로 만들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감리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였기 때문에 웨슬리는 지정석 제도를 반대했습니다. 감리교회의 교리장정에는 “모든 감리교회는 평범하게 지어져야 하며 누구나 자유롭게 앉을 수 있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화려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는 부자들을 필요로 하고 그러면 교회는 그들에 의해서 지배되게 된다”고 못박았습니다.  그런데 감리교회가 부흥하자 이런 원칙들을 무시하고 교회 건축 붐이 일어났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모임인 감리교회가 상류층 교회의 건축양식을 본받아서 화려하게 교회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감리교는 부자들의 돈이 필요하게 되었고 지정석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반대한 사람이 자유감리교회의 창시자 로버츠입니다. 로버츠는 예수님의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놓고 와서 예배드릴 수 없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놓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가 참된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준의 하나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은 이런 지정석 제도를 폐지했습니다.
또한 19세기 중엽, ‘헨리워드 비쳐’라고 하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유명한 설교자였고, 그의 누이동생은 미국 노예의 참혹상을 폭로한 유명한 소설 ‘엉클 톰스 캐빈’(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스토우 부인입니다. 헨리워드 비쳐 목사님의 설교는 화려하지도 않았고, 재미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그런 설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헨리비쳐 목사님의 설교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주일 설교시간. 교인들은 당연히 비쳐 목사님이 설교하실 줄 알았는데, 손님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겁니다. 알지도 못하는 손님 목사. 그래서 일부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신 손님 목사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헨리 비쳐 목사를 예배하기 위해 오신 분들은 지금 다 나가십시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기 위해서 오신 분들은 그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랬다는 겁니다.
요코하마에 가면 "가이칸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는 일본인의 손으로 지어진 최초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면 행복하게 산다는 소문이 났는데, 그런데 그 교회에서 결혼을 하려면 두 사람 중에 한사람이 세례교인이어야 하는데, 그래서 결혼식을 교회에서 올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고 있으면 또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1. 배부른 까닭에.
오늘 본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온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에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바로 앞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바로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어른 남자만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았던 그 유명한 기적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기적의 떡을 먹었겠습니까? 그것도 쪼금만 먹었던 것이 아니라. 6장11절에 보면"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라고 기록합니다. 원하는 대로 주었다고 합니다. 배가 가득 찰 때까지 그들은 먹었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계속 주시는 그 은혜를 그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즐거움이 있지만 그 중에서 먹는 즐거움은 참 큽니다. 더군다나 배가 고팠던 사람들에게는 "싫컷 먹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는 즐거움처럼 그들을 행복하게 한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그 행복한 기억을 되살려서 예수님께 찾아 온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들은 앞에서도 나열했듯이 다양할 수 있습니다. 어떤이는 병 낳으려고, 어떤이는 부자되려고, 어떤이는 출세하려고, 어떤이는 복을 받으려고, 어떤이는 대학에 합격하려고, 어떤이는 사회생활속에서 받은 스트레스들을 풀곳이 없어서 오랜만에 한국사람들이랑 수다나 실컷하고 나면 속에 후련해져서 나오는 이들도 혹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정말로 영혼에 대한 깊은 고뇌 속에 교회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회를 찾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는 그런 목적을 다 충족시켜 줄 수는 없지만, 분명 우리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다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기복신앙이니. 뭐니 하면서 비난하는 소리들도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역시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이런 결과들이 충족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 하나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분명 이땅에 계시면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도 수많은 병든자를 치료하시고, 문제들을 해결하시고, 그리고 가난한자에게 부를 주시기도 하셨던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여기에만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병이 든 신앙입니다. 신앙이 어릴 때에는 분명 이런 것이 최고처럼 느껴집니다.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어 지면 하나님은 살아계신분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요구가 이루어지면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합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왜요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초기에는 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께로 이끌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시지 않았고 그저 예수님이 말씀만 하셨다고 한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리고 그 모여든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신 것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복음전도의 방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필요를 체워 주는 것은 좋은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필요를 교회에서 체워 주면서 복음의 기회를 삼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세상을 위해서 열어놓는 모든 프로그램, 즉 요리방이니, 한글교실이니, 영어교실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그런 것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국선교사들도 일본선교를 위해서 시작했던 것이 영어교실입니다. 그래서 영어를 통해서 교회에 발을 딛어놓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튼 어떠한 방법으로든 교회에 나오게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2. 생명의 양식을 위하여.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몰려온 사람들에게 한 단계 성숙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는 썩을 양식이 있고, 생명의 양식이 있다는 그 사실을 복음으로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는 썩을 양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리 맛이 있는 음식이라 하더라도 몇 일만 두면 상하고  썩어 버리고 맙니다. 이 땅에 있는 음식은 다 썩기 마련입니다. 만약에 썩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방부제 때문입니다. 방부제는 우리의 몸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일을 하면서도 먹고사는 것만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럼 썩을 양식과 생명의 양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썩을 양식은 쉽게 말하면, 믿음과 상관없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는 그 모든 것이 썩을 양식입니다. 돈을 벌어도 그저 자기 혼자만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것은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 복을 받겠다는 것도 복을 받고 난 다음에, 아니면 복을 구하는 이유가 결국 자신의 삶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썩을 양식을 위한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찾아 나온 사람들은 먹고 배불렀던 그 기억 때문에 찾아 나온 것입니다. 또다시 그런 일이 혹시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찾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서 구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기적을 통해서 보시고 싶었던 것은 그들이 기적이후의 삶을 보고 싶었습니다. 10명의 문등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 고침을 받고 난 다음에 행동을 주님은 주목하셨습니다.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한 사람은 사람은 단 한사람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10명이 다 고침을 받았는데,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는 모습을 통해서 주님은 기적이후에, 축복이후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의 행동은 어떠했습니까? "자신의 전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혹시 누구에게 억지로 빼앗은 것이 있거든 4배로 갚겠습니다."라는 그의 고백을 들으시고 주님은 기분이 좋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누가19:10)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삭개오는 구원이후의 삶이 아름다웠습니다.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하든 그것은 생명의 양식을 위한 것입니다.
나의 생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고 한다면, 영혼을 살리는 일에 쓰임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됩니다.  주님은 그런 분들에게 건강을 주시기를 즐겨하시고, 그런 분들에게 하늘의 복을 내려 주시시기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 땅의 물질이 그런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 "살리는 일"을 위해서 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지 그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고린도전서10장31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이 썩을 양식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 일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3. 예수님이 생명의 떡
그럼 진정한 생명의 떡은 무엇입니까? 오늘 예수님은 바로 자기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떡은 양식이라는 것인데, 양식은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생명의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27절에"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35절에도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은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를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하실 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일년에 4차례의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그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영원한 양식으로 주신 그분의 몸과 피를 기념하면서,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주심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주신 그분의 생명이 오늘의 저와 여러분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살리는 양식되어 오늘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육신의 배만 부르게 하는 그 신앙의 차원에서 이제는 우리의 영을 살찌워지시는 그 생명의 양식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어떠한 동기로 교회로 나왔든지 이제는 믿음의 깊이를 좀더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내가 잘살고 복 받는 것이 목적이었다가. 이제는 그것보다도 나를 위하여 자신의 온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그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분을 위하여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좀 어렵게 살아도,  우리의 몸이 좀 아프다 해도, 우리가 사람들에게 비난을 들어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 안에 기쁨으로 그 모든 것을 맞을 수 있는 믿음의 아량이 생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다 맞추어 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고 싶다고 해도 그것을 하지 못하고 거절 당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오후에 임시공동의회를 통해서 교회의 항존직을 선거하는 일을 합니다. 선거를 하다보면 되는 사람도 있지만 안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매년 교회에서 서리 집사를 임명을 할 때에도 탈락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 기관에서도 임원을 뽑을 때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 들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내가 그 당사자가 되어지면 쉽게 상처를 받고, 시험에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을 당할 때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웃는 사람,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고, 더욱 섬기는 사람, 그런 성도가 생명의 양식을 먹는 성도들 인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온몸을 드리면서 살았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모습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살던 사람이 이제는 남을 생각할 줄 알고 기꺼이 자기를 내어줄 줄 아는 사람들이 바로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의 모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생명의 양식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성격이 나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으라 한 것을 먹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광우병이 왜 생겨났습니까? 소는 풀을 먹어야 하는데, 육식을 먹여놓으니까 생겨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生靈을 불어 넣어주셔서 우리가 靈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영의 사람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영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먹지 않고 세상의 썩을 음식만 먹을 때에 우리의 영이 죽어 가는 것입니다.  당장에 우리의 입맛에 달콤한 맛을 주는 것은 결코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지 못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는 두 가지 양식이 있습니다. 썩을 양식과 영생하는 양식입니다. 우리가 먹어야 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영생하는 양식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잠도 못 자고 땀을 흘리고 있습니까?  썩을 양식을 위해서 라고 한다면 그것처럼 우리를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가치를 영생하는 것 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처음에는 맛있는 것만 골라서 먹는 어린 아이들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들 들면서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년이 되어서는 음식을 맛으로 먹어서는 안됩니다. 맛이 없어서 자신의 몸에 이로운 것을 억지로 라도 먹어야 합니다. 마치 병원에서 수술을 한 사람은 병원에서 그 사람에 맞는 음식을 제공해주는데, 그것이 자신의 입에 맞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먹어야하는 것처럼, 그래야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고 그 후에는 다시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을수 있는 것처럼. 생명의 양식을 먹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고 손해가 되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 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생명의 양식을 먹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을 지내면서 여러분의 영적 건강을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여러분의 삶에 새기기 위해서 생명의 생식을 먹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