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터널 같은 인생 사29:17-24
긴 터널 같은 인생 이사야29:17-24 09.8.16
가끔 차를 운전해서 지방으로 가다 보면 터널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 터널이 짧은 구간도 있지만 어떤 구간은 터널이 긴 구간도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자동차 터널은 노르웨이에 있는 뢰르달 터널입니다. 자그만치 그 길이가 24,51km나 됩니다. 그런가 하면 기차로 달리는 터널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긴 터널은 바로 일본에 있는 츠가루(津輕)해협을 사이에 두고 혼슈(本州) 와 홋카이도(北海道)를 연결하는 세이칸(靑函)터널은 전체길이 53.85km로 세계에서 가장 긴 터널입니다. 길이가 얼마나 길면 그 중간에 길이 23.3km에 이르는 해저부에는 두 개의 역이 만들었습니다, 홋카이도쪽의 요시오카(吉岡)해저역과 혼슈쪽의 탓피(龍飛)해저역입니다.
여러분 이 터널들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둠입니다. 터널은 어두움을 상징합니다. 아무리 대낮이라도 터널에 들어가면 라이트를 켜야 합니다. 그런데 터널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터널은 지름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왜 터널을 뚫는가 하면 빨리 가기 위해서 뚫는 것입니다. 그 터널이 없으면 산을 둘러서 멀리 둘러서 가야 하겠기에 지름길을 만들기 위해서 터널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징은 반드시 끝이 없는 터널은 없다는 것입니다. 터널을 들어가면 아무리 그 터널이 길어도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우리나라에서는 광복절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종전일이라고 하는 8,15를 보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일제 강점기의 36년간의 세월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터널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세월도 끝이 나고 말았던 것을 봅니다. 그런데도 세월은 그렇게 해서 끝이 났지만,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터널을 보내는 것 같은 분들의 고통은 남아 있습니다. 위안부라고 불리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분들의 고통과 이 일본 땅에 강제노동자로 끌려와서 광복을 맞이해서 모두들 돌아갔지만 오랜 세월동안 돌아갈 곳도 잃어버려서 아직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인생의 긴 터널도 예수안에 있으면 끝이 나고 광명의 날을 맞이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가 속해 있는 재일대한기독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런 어두운 터널을 지낸 교회입니다. 100년 전에 이땅에 들어와서 온갖 모진 세월을 복음하나만 붙잡고 일본 안에서 우리의 말과 우리의 글로 된 찬송과 성경을 예배를 지키기 위해서 겪어야 했던 고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한때는 일본기독교단에 강제로 통패합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고 교회에서 목사들의 설교를 감시 받아야 하는 어둠의 세월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세월도 지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인생이 어렵고 힘들 때의 모습을 종종 터널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내 인생이 캄캄할 때 인생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한나라의 경기가 어려울 때도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 어려운 시절이 지나가고 광명의 날이 닿아오면 그 긴 터널을 이제 다 지났다고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 속에는 이런 터널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이 터널을 지날 때 우리는 좌절하게 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절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지금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것은 지름길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어둠은 끝이 나고 저 터널 뒤에는 광명 한 햇빛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1. 어둡고 캄캄한 연단의 세월(20-21)
오늘 성경에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어둡고 긴 터널의 세월 속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이야기 해줍니다. 그들이 지냈던 어둠의 시기에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 20절에서 21절에 보면 그 세월을 강포한 자 와 함께 하는 세월, 교만한자에게 부딪겨 살던 세월, 죄악을 엿보던자(사기꾼)에게 당하던 세월, 억울한 재판으로 인하여 고통받던 세월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를 흔히들 말하기를 암흑의 시대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어진 영적 인 암흑기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것도, 선지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말씀도 있었고 선지자도 있었지만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듣지 않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선지자의 음성을 외면했던 시대였습니다. 노아의 시대가 또 그렇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내려졌고, 노아는 목이 터져라 방주로 들어 오라 외쳤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예수님의 시절은 또 어떠했습니까?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그렇게 외쳤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외면하고 돌아서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그 음성은 암흑의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목 박혀 운명하시는 그 순간은 하늘도 빛을 잃었습니다. 기독교가 자유화되고 로마의 국교로 선포되었던 그 시절은 또한 어떠했습니까? 온갖 죄악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은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모든 것이 타락해버린 시절이었습니다. 그 타락의 중심에는 교회가 자리잡고 있었던 시절이 아닙니까? 시대를 이끌어갈 교회가 빛으로 이끌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으로 이끌어 갔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암흑의 시절 터널 같은 시절이 각 사람에게는 왜 또 없겠습니까? 인생에서 자신의 계획하던 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던 절정기가 있는가 하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절망가운데 죽음을 생각하던 암흑의 시절이 또한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 암흑의 시절을 이겨보려고 몸부림치는 그 몸부림은 또한 얼마나 처절합니까? 그 암흑의 시절에 당하는 일들이 강포한 자에 함께 하는 세월입니다. 나를 위협하고 힘이 있다고 돈이 있다고 권력이 있다고 나를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그저 그가 말하는 것이면 뭐든지 웃으면서 순종해야 하는 고통의 시절입니다., 코는 하늘만큼이나 높은 교만한자들에게 날마다 부딪기면서 살아야 하는 서러움의 시절입니다. 또한 늘 사기꾼들은 내 주변에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 험악한 세월을 보내면서 겨우 모아놓은 그 재물을 잠도 안자고, 못 입고, 못 먹으면서 모았던 그 피 같은 돈을 죄악을 엿 보는 사기꾼들에게 빼앗기도 만 세월입니다. 공의는 없어지고, 억울함을 법에 호소해보려고 했지만 법은 늘 힘있는 편에 서있고, 돈 있는 사람 편에 서있던 그 세월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러한 어둠의 긴 터널을 지금 지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희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그 터널이 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 터널은 끝이 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희망으로 모셔들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 답답했던 긴 터널을 끝을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2. 연단 후에 주어지는 축복(18-19)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해주셨습니까?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우리가 기다리던 이가 당신이십니까? 라고 물어 볼 때에 예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5) 오늘 본문에서도 18-19절에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 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 긴 터널의 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도 그 터널의 끝은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광명한 세상을 우리에게 민족에게 주기 위해서 가장 많이 일을 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그 긴 고통의 세월의 끝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문제는 물론이고 우리의 육신의 모든 문제까지도 한꺼번에 해결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대답입니다. 어떤 문제도 예수님으로 풀려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만 하면 우리의 캄캄하고 답답했던 문제들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 만났다고 해서 우리의 망했던 사업이 갑자가 풀려지고, 암 덩어리가 갑자기 녹아 내리고 그러지 는 않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주님이 그렇게 역사 해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경우는 망해가던 사업 계속 망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모시기 전에는 그것밖에 보이질 않았는데, 그래서 그것에 목숨을 걸고, 그래서 늘 불안하고, 움츠리고, 억울해하는 삶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더 이상 우리의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것이 전부인줄만 알았는데,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났더니, 우리의 생명의 가치가 예수 만나고 났더니, 영원에 있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 됨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났더니 갑자기 내가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그것의 가치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지금 나에게 망해 가는 사업은 사실 내가 그렇게 심었기 때문에 심은 대로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우리의 건강도 마찬가지요, 모든 부서지고 망가져 버린 우리의 삶의 모습도 다 내가 그렇게 심었기 때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니 이제 마음속에는 평안함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기 시작합니다. 때린 사람은 쪼그리고 자지만 맞은 사람은 두 다리 뻗고 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차라리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까지 것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주님나라에 갈 때 가져갈 것도 아닌데, 네가 왜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걸었나 싶어서 도리어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상황은 변한 것이 없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났더니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느낌입니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났더니 그동안 각박하게 사느라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기 시작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듣기 시작하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 늘어나고, 친구가 그리워지고, 주변의 모든 것이 소중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나니까! 그동안 막혔던 문제들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났더니 삶의 여유까지도 생기는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소경이 눈을 뜨여지는 것을 느낍니다. 막혔던 귀가 열려지는 것은 느낍니다, 사도행전의 앉은뱅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서야 주님은 우리에게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하나 하나 돌려주시기 시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제 심한 병에서 낳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건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다시 돌려주어도 다시 실패하지 않고 잘 감당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주님은 마치 욥 에게 그가 잃었던 것을 다시 돌려주시던 것처럼 돌려주십니다.
그때 돌려 받을 때는 나는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았는데, 주님은 두 개로 주십니다. 마치 동화의 이야기처럼 물에 빠진 도끼를 다시 돌려 받을 때, 정직하게, 금도끼도, 은도끼도 내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에 내 이빨 빠진 도끼와 함께 금도끼, 은도끼도 함께 선물로 받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의 날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3. 축복을 소유한 성도의 삶(23-24)
이제 우리의 삶에 다시 회복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건강해 졌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먼저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22절에 보면 야곱이 이제 부터는 부끄러워 아니하겠고 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다시는 야곱에게 부끄러운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은 당당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이제는 당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제는 당당해야 합니다. 식당에서 어떤 비즈니스 관계의 사람을 만나서 식사를 해도 당당하게 식사기도를 하고 밥을 먹을 수 있고, 예수님을 섬기는 이로서의 당당함을 이제는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을 주님이 계속해서 축복해 주실 수 있습니다.
부모의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은 부모가 연탄장사를 하던, 호빵 장사를 하던 부모가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호빵을 팔아서 자식을 훌륭하게 키운 부모님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를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더 이상 예수님이 챙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실을 세상사람들에게 숨지기 마시길 바랍니다. 나 예수 믿는다고 당당하게 말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세상이 더 이상 여러분을 유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늘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 줄 때에 세상은 여전히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앞에서 당당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신 축복을 지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또한 주님의 축복을 받았으면 우리의 살이 거룩해야합니다.
오늘 성경은 23절에 보면 그 자손은 나의 손으로 그 가운데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자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룩하다 하며 섬기는 방법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세상의 온갖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다 떨쳐버리는 삶인 거룩한 삶입니다. 전에 TV에서 길거리에서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터뷰의 내용은 만약 당신의 삶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런 저런 대답을 합니다. 가족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겠다 , 사랑하는 이와 함께 인생의 남은 시간을 보내겠다. 뭐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한 중년의 신사가 대답하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심풀하게 하고 싶습니다. 사회자가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하는 말이 그동안 자신의 삶 속에 필요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욕심을 다 떨쳐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면 좀 가볍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대답 속에서 거룩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 신사는 다른 의미에서 말을 했겠지만 저는 들으면서 저것이 거룩이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룩은 심풀하게 하는 삶입니다. 거추장스러운 명예나 권력, 재물에서 우리의 관심이 떠나고 오직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살고 싶어하는 모습,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 할 수 있는 모습, 이것이 주님을 거룩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는 때로는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괴로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터널을 우리로 하여금 지나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를 인생의 지름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터널이 우리에게는 괴로움의 시간이고 고통의 시간 인만큼 우리의 신앙은 더욱 그만큼 주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더 빠른 시간에,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일이 잘되고 어려움이 하나도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발전도 없고, 주님과의 거리는 늘 좁혀 질줄 모르고, 맨 날 그 모양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하기를 환난 당함이 내게 유익이라 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주님을 멀리했는데 환난이 주님 앞에 나오게 만들고, 환난이 기도하게 만들고, 환난이 부르짖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긴 터널은 우리에게 주님 앞에 나아가는 지름길이 되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터널을 통과한 우리의 인생은 성숙해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깨달아 아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변해져있습니다.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셔도 겸허한 마음으로 아멘 할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그렇게 성숙한 믿음을 간직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