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의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1:14

장경태 2010. 7. 31. 17:2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1:14                      12.13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는 “성육신” 이라는 말입니다. 성육신은 글자 그대로 영이신 하나님이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말이지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의문을 갖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로, 저런 말로 이야기를 하지만 이해가 되는 분도 있지만 처음 믿음을 가지신 분들에게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함박눈이 몹시 내리는 성탄절 날이었습니다. 믿음이 좋은 남편을 따라 성탄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며 아내는 계속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계속적으로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실 수 있지? 난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을 수가 없어요!" 남편은 의심하는 아내에게 계속 설명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집 문앞에 왔는데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참새들이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먹이를 얻지 못해 집 문앞에 비실비실 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얼른 집으로 들어가 먹이를 가져와서는 새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푸드득 하며 날아 가 버렸습니다. 남편은 실망하여 "새들아! 난 너희들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야, 이것을 먹지 않으면 너희들은 굶어서 얼어 죽는다구......"  새들이 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날아가는 새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뜻을 어떻게 너희에게 전할 수 있겠니? 내가 새가 되지 않고서는 ......"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내가 순간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속 사랑을 베풀었지만 인간들은 하나님 품을 떠났던 거야.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야. 그리고 그 사랑을 십자가로 표현 하셨던 거야......"  아내는 고개를 떨구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를 깨달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시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방법을 통해서 그리고 선지자들 통해서 죄 많은 인간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도 않고 죄악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 수단으로 하나님 당신이 인간의 몸으로 오시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이요, 이날이 바로 “성탄” 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다음주면 우리는 성탄주일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성탄절이 있기 위해서 하나님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얼마나 많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셨는지 모릅니다.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바로 여기에 있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오늘은 성탄주일을 앞두고 이 성탄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기는 기회를 삼고자 합니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헨리 나우엔이라는 사람은 20세기 말 영성의 대가였습니다. 그는 1932년 네델란드에서 출생을 했습니다.
1957년에 예수회의 사제로 서품을 받았는데, 그는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미국으로 가서 계속적으로 심리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마침내 30대에 노틀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후에 1971년에는 예일대학에서 교수가 됩니다. 정말로 승승장구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심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일대학의 교수로 있다는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살수 있는 일이요, 개인적으로도 자랑스럽고 명예스러운 일이지만, 헨리 나우엔은 자신의 풍요함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강단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 페루의 빈민가에 가서 빈민들과 한동안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하바드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의 영혼을 괴롭히는 공허함 때문에 그는 영혼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다가 마침내 그는 다시 강단을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정신박약 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쉬의 카나다 토론도 공동체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그는 1996년 9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여러분 성육신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당신의 자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하늘의 자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풍요의 자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왜! 버려야 할까요! 무엇 때문에 버려야 할까요!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통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일로 인하여 마음이 아프지 않고, 괴롭지 않다면 절대로 나의 자리를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온통 이스라엘백성들로 인하여 가슴아파하고, 힘들어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시고, 알려주셨지만 끝내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헤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고 전하셨지만 끝내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던 것을 봅니다. 그런 일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처다 보시면서 눈물지었던 모습을 우리는 압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면서 모든 것을 누리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높임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경외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예배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를 뒤로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형편없는 사람들을 섬기시려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이것이 성육신이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11장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 라고 합니다.
헨리 나우엔이 계속해서 교수로 있었다면 개인적으로는 많은 명성을 얻었을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그는 능력 있고 유능한 교수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면서 존경을 받으면서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편안한 자리, 안정된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미련 없이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장애인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비로서 참된 기쁨을 얻고, 만족을 얻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모습 속에서도 이런 일들은 없겠습니까! 자신이 마땅히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군가를 위해서 내려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땀흘려서 일해서 벌은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면 어느 누구도 뭐라 그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일해서 번 돈인데도 나만을 위해서 쓰는 것이 죄책감으로 느껴지고, 불편하게 느껴져서 이 땅의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내어놓을 때에, 오히려 더 행복해진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육신의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2.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
그런데 오늘 육신 되어 오신 분은 어디에 계신다고 합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합니다.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그분이 계신 곳은 우리가운데 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든지 공평하고, 편안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우리”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우리나라, 우리회사, 우리사장님, 우리식구, 우리 아버지, 우리엄마, 우리아들, 우리딸,  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교회, 우리목사님, 우리장로님, 우리권사님, 우리집사님 합니다. “우리”라는 단어 속에서는 누구도 소외되거나, 차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병든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권력자이든, 약자이든, 남자든, 여자든, 죄인이든, 성직자든, 상관없이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고, 소외시키지 않으시고, 함께 하셨고,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의 모두를 “우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은 이세상의 모든 크리스챤들이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족이 되고, 우리형제가 되고, 우리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땅 어디에 가든지, 그 사람이 예수 믿는 다고 하면 그렇게 반갑고, 고맙고, 믿음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계시는 것이 아니고, 가운데 계십니다. 중심에 계십니다. 모든 것을 아는 자리입니다.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중심이 있는 사람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육신이 힘들어도 힘든 것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특별히 약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먹이시고, 입히시고, 고치시고, 힘주시는 우리의 삶을 주장하시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니까! 초대교회의 진실한 성도들은 어떠한 핍박에서도 신앙을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로마 황제 가 그들을 가장 처참한 죄인으로 몰아 감옥에 쳐 넣으면 그들은 감옥에서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가 그들을 독방에 가두면 그들은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이리 해도 어찌할 수 없고, 저리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특별한 존재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우리 가운데 계신 분'으로 확신했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움에도 신앙의 절개를 꺾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죽는 일'을 가장 고상한 일이요 가장 큰 상급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처형당할 때우는 사람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했다고 전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계시는 그분이 너무나 귀한 분이고, 나를 구원하신 분이시고, 나를 축복하시는 분이기에, 지금 당하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요,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은 우리에게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들이 우리 안에 계셔주시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히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영광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함께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라는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관심하게 되고, 어떤 이는 핍박을 하게 됩니다. 결국 그 사람들은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그런 사람들을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3.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
또한 우리에게 영광을 주시는 그분 안에는 무엇이 있다고 합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그분, 예수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이분을 만나기만 하면 은혜 속에 들어갔습니다. 진리를 만났습니다.
여러분 은혜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아무 댓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호의라는 뜻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호의를 가르쳐서 은혜라고 합니다.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용서를 받았습니다. 죽음을 기다렸는데 생명을 얻었습니다. 지옥을 가야 하는데 천국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좋은 것으로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진리는 무엇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또한 진리는 모든 일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힘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모든 것은 이것을 전제로 출발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출발도 “태초에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고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의 존재가 진리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 예수님은 모든 일을 이루는 원리가 되고,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이런 진리가 충만하기에 이 땅에 모든 문제들, 생로병사의 모든 인간사의 문제들, 생사화복의 문제들을 예수님을 통해서 해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진리가 예수님께는 충만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이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됩니까! 주님께 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진리 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문제를 풀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것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다음주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메시야의 오심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을 이루어주신 그분이지만, 아직도 그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분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입지 못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그런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을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회개 시켜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구원의 주님, 메시야 되신 예수님을 이제 우리의 모든 영혼의 마음속에 모셔 드려야 하겠습니다.
말씀으로만 계시지 않고 우리의 눈에 볼 수 있게, 우리가 느낄 수 있게, 우리와 함께 호흡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 원해서 오신 그분 예수님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그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요일1:1-2)
이 복음의 계절에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그 사실을, 우리 안에 계시면서 영광을 보여주시는 그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분 안에서 내 영이 영생을 누리며, 이제 그 “우리”라는 동경제일교회의 공동체를 더 넓혀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