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의 말씀

기념되는 사람 막14:3-9

장경태 2010. 7. 31. 19:59

기념되는 사람                 마가14:3-9                       10.3.14

지난 벤투버 동계올림픽때 금메달을 딴 김연아선수가 대단한 줄을 알았지만 기념주화를 만들만큼 엄청난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이제 20살밖에 안된 어린 소녀인데, 벌써 그가 세운 수많은 기록들은 더 이상 깨기 힘이 들만한 기록들이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 기록을 깰사람은 본인자신밖에 없다라는 메스컴의 소식을 들으면서, 특별히 이번에 금화, 은화로 만들어진 기념주화까지 발행되는 것을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튼 만들어진 그 금화를 통해서 이미 그는 역사에 기념으로 남을 사람이 되었습니다.  순간 반짝했다가 소리없이 사라지는 수많은 스타들이 많은 세상에서 기념주화의 주인공이 되어진 것은 정말로 영광스러운 일이라 생각이 됩니다.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하고, 애를 쓰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은 남긴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 남겨진 이름 또한 좋은 이미지의 이름이냐! 나쁜이미지의 이름이냐! 가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속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가운데서도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된 사람들도 있지만 악한 이름으로 기록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냥 이름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념되는 이름으로 남겨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마리아 라는 사람입니다.
유대인 여성에게 있어서 ‘향유는 결혼 할 때 준비되는  혼수 품목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결혼 예식 중 신부가 신랑의 머리에 향유를 한 방울 떨어뜨리는 순서가 있는데 그 의미는 “이제 나의 신랑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남은 향유는 평생 간직하였다가 신랑이 죽어 장사지낼 때 전부를 그 몸에 부어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에게 있어서 소장하고 있는 향유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향유도 수많은 종류들이 있어서 신분이 높거나 경제적인 여유에 따라서 그 향유의 질은 또 달라지는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향유는 “나드” 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드’라는 말은 그 말 자체가 ‘향기가 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나드향은 주로 인도나 중국의 산지에 자생하는 “감송향”이라는 나무의 뿌리에서 채취하는 최고급 향유입니다.
100% 수입되는 향유인데다 너무나 고가라서 당시 사람들은 포도주원액에 나드향유를 섞어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헌데 본문에는 ‘순전한 나드’라고 하였으니 100%순나드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향유는 지금의 향수와 같이 휘발성이 강하여 완전밀폐용기에 담아서 사용하였는데 본문은 그것을 ‘옥합’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리아는 그 소중한 향유를 옥합을 깨어서 예수님께 다 부어서 드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는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간씩 그 내용들이 다르게 그려지고 있지만 전하려고 하는 내용은 모두가 다 같은 내용입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사랑입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마리아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가 믿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이 여인의 혈육인 마르다와 나사로의 이야기도 우리는 잘압니다. 그와 더불어 이 마르다의 행실이 바르지 않았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가정을 사랑하셨고, 그 가정을 즐겨 심방하시면서 위로하고 힘과 용기를 주셨던 사실들을 우리는 압니다. 한마디로 죄인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그 여인은 받은 것입니다.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고, 사람취급도 해주지 않았던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지만 예수님은 먼저 사랑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도 바로 이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16절 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불러주셨고, 안아주셨고, 용서해주셨고, 품어주셨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그리고 우리를 손잡아 주실 뿐만 아니라 복을 내려주시는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보답합니까! 우리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사랑을 평소에 많이 받았던 그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표현이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부어드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표현을 보면서 사람들은 비난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했지만 요한복음12장에서는 가롯유다 라고 분명하게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한말은 무엇이었습니까! “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라고 합니다. 더욱이 그 말을 할 때에 그는 분을 내어서 말을 했다고 합니다.
화를 내면서 쓸대 없는 짖을 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아까워죽겠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는 왜 남의 것을 가지고 아까워했을까요! 요한복음에서는 “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라” 고합니다. 즉 그의 생각은 그것을 팔아서 현찰로 만들어서 헌금을 하면 자기도 그것을 훔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그 여인의 행동이 여러분 눈에는 어떻게 보입니까! 그것이 얼마짜리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둘째치고, 그 여인의 행동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정말로 낭비라고 보이싶니까! 정말로 허비 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작 그 향유의 주인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낭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낭비하고, 돈 낭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녀가 데이트를 하면서 돈 생각하기 시작하면 사랑이 식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면 데이트 못합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데이트시간 한시간이 낭비입니까!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습니까! 아닙니다. 정말로 사랑하면 약속시간 한시간 전에부터도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한시간을 기다리고도 상대방이 와서 미안해하면 나도 금방 왔다고 합니다. 5분밖에 안 기다렸다고 합니다. 전혀 지루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정말로 사랑하면 일주일 내내 자기는 안 먹고 안 쓰고 하다가 데이트하는 그날 엄청나게 돈 씁니다. 무엇을 먹어도 비싼거 먹으라고 합니다. 맛있는 거 먹으라고 합니다.  제정신가지고 보면 엄청나게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하고 같이 있는 시간에는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요! 사랑이 그렇게 만들어 놓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우리 역시 주님을 위해서는 최고의 것을 드립니다. 쓰다 남은 것 절대로 드리지 않습니다.  드리고도 더 드리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비난을 해도 나는 전혀 아깝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것 생각하고, 저것 생각하고, 이것 빼고, 저것 빼고, 그렇게 해서 드린다고 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오늘 이 여인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잇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최고의 것을 드렸던 것을 봅니다. 예수님 역시 그 여인의 헌신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위를 그대로 다 받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있었습니다. 비난의 눈빛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을 바라보는 경멸의 눈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모든 눈빛을 뒤로하고 그 여인이 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행동을 정당화 시켜주십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아름답게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좋은 일을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인정해주시고, 칭찬해주시고, 또 기념해 주시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2. 전부를 드렸던 사람.
오늘 예수님이 이 여인의 행동을 보시고 하신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고 합니다. 그 여인의 믿음의 모습을 보시고 그 사랑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이야기도 함께 전해지리라 합니다. 그 이야기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의 행위에 무엇이 그리 대단했었습니까!
그것은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옥합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향유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향유만 부으면 되지 옥합을 깨뜨린 것이 무슨 중요한 것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합니다. 그 향유 못지 않게 그 향유를 담고 있는 옥합은 중요하고, 또 귀했습니다. 고가품 입니다. 그러므로 속에 있는 향유만 쏫아서 예수님께 부어 드려도 충분히 그의 마음이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옥합을 깨뜨립니다. 다시는 그 속에 다른 것을 담을 수 없도록, 깨었습니다. 오로지 이 옥합은 예수님께만 드리는 것이기에 아에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완전한 헌신인 것입니다.
여러분! 전부를 드려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남겨놓는 것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가 드리는 전부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하나님의 전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전부가 얼마나 되는가를 보지 않으십니다. 그가 얼마를 드렸든지 그것을 100%로 생각하시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헌금을 드리는 두 사람을 보셨습니다. 부자들이 많은 액수를 헌금하는 것과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는 하시는 말씀이 과부의 것을 두 렙돈을 칭찬하십니다. 그 칭찬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는 전부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있는 것 중에 일부였지만, 가난한 과부는 100%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전부를 드려보셨습니까!
어느 시골교회 주일학교 시간에 헌금 바구니가 지나갈 때 한 꼬마가 헌금 바구니를 뺏어 땅바닥에 놓더니 그 안으로 들어 가 있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으니 내 몸이라도 다 드립니다.
결국 꼬마는 예배 순서를 방해한다고 꾸지람만 받았습니다. 그 사건 후로 모든 친구들의 기억에서 잊어젔으나 이 꼬마는 그 때 자기를 예수님께 드렸으니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는 생각으로 언제나 열심히 믿음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그 사건이후로 하나님께서는 그 꼬마의 헌신을 귀중하게 받으시고 꼬마를 높이 들어서 사용하셨습니다. 그 꼬마는 잘 자라서 일평생헌신의 삶을 드려 남부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가 된 “바비 모팻”입니다.
여러분 전부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인생전부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드렸던 그 여인의 믿음을 주님은 복음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사람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3. 기회를 잡은 사람.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여인이 기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께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잘 잡았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 여인은 그전부터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도 그 가정을 한 두번 방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시간들 중에서 오늘날을 잡은 것입니다. 무엇이 이런 결단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습니까! 평소에 예수님께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퀘계로 잡아죽일 방책을 구하여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만 알고 있었던 분위기는 아닙니다.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가 느끼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아마도 오늘 이 여인도 그런 분위기를 미리 감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어떤 큰일일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눈치 빠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밤이 지나면 영영 기회를 잃어버릴 것 같은 위기를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을 기회로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상황이 지금 상황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왕이면 사람들이 얼마 없을 때, 상황을 다 이해해줄 사람들만 있을 때, 아니면 예수님 혼자만 계실 때 했으면 이런 분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기회는 없습니다. 우리가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늘 어려운 일들이 함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기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헌신하려고 할 때, 시간도 되고, 물질도 되고, 형편도 되고, 마음도 되는 그런 기회는 없습니다. 늘 이것이 되면 저것이 안되고, 어쩌면 헌신하지 못할 상황들이 더 많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그녀는 시간을 본 것입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을 다시는 보지 못 할 수도 있겠다는 긴박함을 느낀 것입니다. 실제로 이 일이 있고 난 다음에 최후의 만찬으로 이어지고 겟셋마네 동산에서 기도의 밤이 지난 후에 예수님은 로마병정들에게 잡히고 마는 것을 봅니다.
가장 중요한 기회를 그녀는 잡은 것입니다. 우리가 헌신할 때도 기회가 있습니다. 주님을 섬길 때도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봉사할 때도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를 잡지 못하면 다음의 기회는 없습니다. 오늘이 내가 주님 앞에서 섬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못하면 다음에 하면 되지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다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이 다음의 기회를 잡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기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그 날은 오늘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6:2“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이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라고 하면서 오늘, 지금이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날이라고 합니다.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지금 이라고 합니다. 내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래가 미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미래는 있는 것이고, 지금 만나는 사람,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성공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결단해야 할 시간은 먼 내일이 아닙니다. 날마다 오늘 매 순간, 순간에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섬김과 헌신도 다음에 해야지 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결단하시고, 오늘 섬기시고, 오늘 헌신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면서도 내일 또 할 것이라고 남겨두는 사람은 오늘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여인은 예수님께 온전한 헌신을 했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있어도, 비난하고, 야단치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녀는 잡은 기회를 놓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엇이 이 여인을 예수님께서 복음과 함께 기념되겠다고 하게 하셨습니까!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는 낭비도 낭비가 아닙니다. 그것마저도 거룩한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난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보였습니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것을 염두하고 행하지도 않았지만, 결국은 그의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리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지내게 됨을 준비하는 정말로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은 거룩한 믿음의 행동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헌신하는 이 헌신의 모습을 낭비라고 생각하고 야단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전부를 드려서 주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잘 잡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여인이 사람이 많다고, 분위기가 안 좋다고 다음기회를 엿보았다면 영영 복음과 함께 기념이 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주님이 칭찬해주었던 기념에 남을 여인의 신앙이 여러분에게도 새겨져서 여러분의 좋은 믿음과 헌신과 사랑의 이야기가 복음을 전할 때, 좋은 신앙의 간증으로 남아서 대대에 믿음을 남길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