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의 말씀

밀알신앙 요12:24-27

장경태 2010. 7. 31. 20:00

밀알신앙                요한12:24-27                 사순절  10.3.21   

1347년 도우버 해협 양쪽에 두 나라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치열한 그 유명한 백년전쟁 이야기입니다. 1년 가까이 영국은 프랑스의 북부도시 '칼레'를 맹공격했습니다. 그러자 그 마을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결국 백기를 들고 항복 사절을 영국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그 동안 끝없이 맹렬하게 저항하던 칼레 마을과 주민들 전체를 몰살시키려고 했습니다. 항복 사절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영국 왕은 그 동안 수많은 영국 군사가 희생된 것의 보상으로 전멸시키려고 하자 항복 사절들은 결사적으로 매달려 애원을 하니 왕의 마음이 차츰 누그러지면서 이렇게 명하였습니다.
'좋다. 칼레 시민들의 생명은 보장하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동안의 어리석은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 칼레의 시민을 대표하는 6명은 교수형에 사용할 밧줄을 목에 걸고 맨 발로 걸어 내 앞에 나와야 한다.'는 조건부 수락입니다. 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누군가 6명이 그들을 대신해 죽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용감하게 나선 6명이 있었습니다. 모두 그 도시의 핵심인물이며 축복을 누리던 부유한 귀족이었습니다.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위스타슈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희생을 자원하자 뒤이어 '장 데르, 자크 드 위상, 장 드 피에네, 피에르 드 위상, 앙드레 당드리에'가 목에 밧줄을 매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맨 발이었습니다.
그런데 처형하려던 마지막 순간 에드워드 3세는 임신한 왕비의 간청을 듣고 그 용감한 시민 6명을 살렸습니다. 550년이 지난 1895년 칼레시는 조각가 '로댕'에게 그 용감한 여섯 명의 동상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이 작품이 오늘까지 남아 있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라는 동상입니다. 비장한 슬픔으로 얼룩진 이 조각상은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준다는 교훈을 강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 밀알이 자기사신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바로 그런 밀알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은 사순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말씀해주시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1. 죽어야 되는 밀알.
오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밀알로 비유하시면서 밀알은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죽어서 없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열매로 부활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열매로 맺혀질때는 한알이 한알로 맺혀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열매로 맺혀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소망인 것입니다. 죽음은 희망이고, 죽음은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짖기 위해서는 농부들이 수확을 하고, 두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내년도 다시 심을 모판심을 볍씨로 남겨두고,  그 나머지를 팔아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농사꾼은 그해 아무리 가뭄이 들고 힘이 들어도 절대로 이 볍씨를 먹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볍씨는 내년을 위한 생명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이런 볍씨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어도 반드시 구분해서 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십일조입니다. 그리고 주일입니다. 이두가지는 우리의 내일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 절대로 먹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어야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우리에게 더 많은 풍요로운 열매를 가져다 주고, 우리의 영적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밀알은 바로 우리에게 더 많은 열매를 기대하면서 땅에 심어서 죽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배에 집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모판이기도 한 하나님의 성전에 심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심겨져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풍부할 때는 쉬울 수 있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는 수많은 유혹이 있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우니까 그것으로 당장 한끼를 해결하고 푼 유혹이 수없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이기고 모판에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밀알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생명입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살려고 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으려고 하면 살게 되는 것이 밀알 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목숨을 걸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쓰는 말이 “죽을 각오”라는 말을 씁니다. 죽을 각오를 가지고 하면 산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살길을 먼저 모색하고 도망할 곳을 생각해두고 하는 사람은 그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여차하면 도망갈 궁리만을 하는데, 그런 사람은 오히려 죽는 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제일 미운 사람이 약삭빠른 사람입니다. 자기살길만 챙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얄밉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더욱 골탕 먹일 때가 있습니다.  내가 살라고 준비해둔 것, 그것이 밀알입니다. 그것을 땅에 심어서 죽여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일수도 있고, 명예일수도 있고, 자존심일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식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신의 생명 같은 가장 아끼고 또 아끼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독생자였습니다. 그런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자식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을 들었습니다. 울부짖으면서 밤을 세워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는” 간절한 부르짖음, 십자가상에서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부르짖는 그 소리를 듣고 있는 하나님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얼마나 중간에 중단하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그만 하라고 하고 싶고, 자기자식을 채칙 하고 있는 로마병정들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당장이라도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동원해서 전쟁이라도 치루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것을 꾹 참았습니다.  왜 입니까! 죽어야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밀알로 오셨기에 죽어야 되었습니다. 그래야 부활할 수 있고, 그래야 수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야 수많은 부활의 열매로 이 땅에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우리 모두를 포함해서 온 인류를 구원 하실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것들이 혹 없습니까! 죽어야할 밀알이 없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아까워서 땅에 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아무리 아까워도 심어야 합니다. 밀알도 심겨지지 않은 밀알은 언제까지나 한알 그대로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겨지지 않은 밀알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한알 이상의 변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재생산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손을 떠나서 땅에 심기워지면 그때서야 그 씨가 죽어서 그 안에 있는 생명이 싹을 내기 시작하고 진짜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잎이나고 싹을 내어서 후에는 수많은 열매들을 맺기 시작하고 그 열매가 주인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손안에 있는 심겨지지 않은 밀알이 있다면 이제는 믿음으로 심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2. 미워해야 하는 생명.
그 다음에 하는 말이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합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왜 자기 생명을 미워합니까! 생명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의 이야기는 역설적인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강조하기 위해서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높아지기 위해서 낮아질 것을 이야기하고, 존경을 받기 위해서 섬기는 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부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가난한자가 되어야 부자가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진정한 생명의 사랑은 오히려 미움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생명이 죄악 된 인간의 욕심으로 가득 찬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생명은 자기 중심적 생명입니다. 이기적인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행복과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에게 채칙을 가합니다. 자신의 본능을 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과 상반된 것은 스스로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같은 사람도 날마다 나를 처서 복종시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이 미웠다는 고백을 합니다. 로마서7장에 보면 “율법의 신령한 것을 알면서도 도리어 율법이 미워하는 것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 선을 행하는 것이 좋은 줄을 알면서도 악을 행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는 스스로 이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가 미울 때가 언제 있습니까!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할 때 아닙니까! 안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 아닙니까! 그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속상해 합니다. 이런 내가 나도 밉다고 합니다. 그래요 주님은 그런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된 모습을 솔직히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된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입니까!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말하기를 죄를 지으려면 확실하게 죄를 지으라고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죄인인 것을 스스로 분명하게 자각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 앞에 더 나아가게 되고,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간절히 바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짖는 것도 아니고, 안 짖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의인인척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고 해도 뭘 회개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너무나 다른 바리새인, 회칠한 무덤과 같은 바리새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그런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평생자신을 저주하면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말하면 예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수많은 욕망들,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마음들,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들, 칭찬 듣고 싶고,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남들의 노력으로 내가 살고 싶어하고, 높아지고 싶은 마음, 폼잡고 싶은 마음, 이런 마음들이 왜 없습니까! 우리 안에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욕망스러운 마음들을 미워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지 미워할 수 있을까요! 경건의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내 안을 채우는 것입니다. 찬양으로, 기도로 내 안을 채우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속에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서서히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이 승리하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 있는 욕망들이 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렇습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자신의 죄된 육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로 인하여 거듭난 생명으로 영원토록 영생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3. 귀히 여김을 받는 밀알.(26)
우리가 그런 썩어서 죽는 밀알로 살아간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방법이 밀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밀알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은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무엇입니까! 죽음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십자가 죽음의 길로 하나님은 내 몰으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죽으셨고, 그리고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영광의 길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밀알 되는 모습을 간직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의 자식으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귀하여 여겨주시는 사람은 밀알 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죽이는 사람입니다.
오래 전 어떤 미국 선교사가 중국에 와서 전도하는데, 때마침 이름 모를 전염병이 유행하여 수많은 중국인들이 희생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교사는 병균을 유리병 속에 담아서, 면역체를 만들기 위해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려 할 때에, 검역소 직원들이 방역조치를 위해서 철저하게 승객들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 선교사는 병균을 자신의 입속에 털어 넣고 유리병은 바닥에 버렸습니다. 조금 뒤에 그의 온몸에 병균이 퍼지면서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서 의사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몸에는 지금 중국에서 번지고 있는 전염병이 감염되었으니 이 병균을 뽑아서 면역체를 만들어서 중국에 보내어 많은 사람을 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밀알로 사는 사람이고, 이것이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귀하게 여겨 주시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겨주시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겨 주시는 사람은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겨 주시는 사람은 보호를 받습니다. 안전합니다. 어디를 가도 그 사람으로 인하여 주변이 복을 받게됩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겨 주신다 에서 여긴다’는 말의 원어(티마오)에는 ‘값을 매기다, 가격을 정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물건의 값은 그 물건의 수준이나 가치를 나타냅니다. 값어치가 없으면 값이 싼 것이고 값어치가 있으면 값이 비싼 것입니다. 흔하면 값이 싸지고 희귀해지면 값이 비싸집니다. ‘귀히 여긴다’는 것은 값을 높게 매기는 것이고 가격을 높이 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아무도 구하려고 하지 않는데, 한사람이 뛰어 들어가서 허우적되는 사람을 살려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너무,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때에 그 사람이 좀 다른 말을 합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생명은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구해줄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라고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겨 주실 때의 모습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당신의 아들 독생자를 희생시켜서라도 우리를 귀하여 여겨 주실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밀알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이 귀히 여겨주시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한 성공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모래 위에 쌓은 집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어서 쌓아도 하나님이 불어버리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주시는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욥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 23:12)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귀한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이 먼저이고 무슨 일이든 하나님이 최우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귀하게 여겨주시는 백성은 예수님을 섬기며 귀하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우리가 하나님께 귀하게 여김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우리는 주님을 섬기되 밀알처럼, 자기 자신을 죽이는 마음으로 섬기시길 바랍니다. 자존심도 죽이고, 자신의 경험도 죽이고, 자신의 생각도 죽이고, 땅에 심겨집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사순절기간을 보내면서 한알의 밀알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묵상하며 은혜를 나눕니다.
한알의 밀알은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밀알 되라는 것은 수많은 것을 잉태시키라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헌신과 수고는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자꾸만 복음을 증식 시켜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나 혼자서만 예수믿고 있으면 안됩니다. 처음에는 나 한사람으로 시작했지만 우리가 밀알신앙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면 한사람이 두사람되고, 두사람이 네사람되고, 네사람이 여덟사람되고 여덞은 열여섯이 되고 열여섯은 서른둘이 되고, 서른둘은 육십넷이되고 육십넷은 백이십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복음은 확산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언제나 혼자서만 나오는 우리들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죽어서 누군가를 데리고 나올수 있어야 합니다. 전도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 밀알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나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수많은 밀알들이 열매들로 여러분의 주변에 생겨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안에 이런 밀알의 축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