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의 말씀
일본선교에 있어서 복음의 토착화를 위한 대표종교연구
장경태
2010. 8. 10. 21:12
일본선교에 있어서 복음의 토착화를 위한 대표 종교 연구 (신도,불교,조상숭배를 중심으로) 장경태선교사 Ⅰ. 서 론 1986년 5월 파리에서 '일본전통공예전'이 개최되었다. 그 입구에는 전시주제로 한편에 신사를 두고 또 다른 한편에는 불단을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이는 일본의 2대 종교의 상징입니다. 신사는 일본 고대의 신도의 상징이고 불단은 지금으로부터 1,400년전에 일본에 들어온 불교의 상징입니다."라는 설명을 써놓았다. 이에 프랑스 관람객들이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일본의 불교신도는 몇명입니까?" "1억2천만 명입니다." "그러면 신도의 신자수는 얼마나 됩니까?" "1억2천만 명입니다." "일본의 인구는 몇명입니까?" "1억2천만명입니다." 1) 일본은 종교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의 수 많은 종교를 가지고있는 나라이다. 공식적 으로 800만이 넘는 神들이 있고 불교,신도,기독교등의 전통적인 공식종교를 제외한 신흥종교의 숫자도 거의 10만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되고있다. 일본인에게는 모든 것이 신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에는 山神,밭에는 밭신(田神), 불이 있는 곳에는 화신(火神또는 荒神), 연못이나 우물에는 수신(水神), 주택에는 집신(地神,地主神), 도로 경계에는 도조신(道祖神)이나 석신(石神),등 나무,돌,태양등 모든 자연만물이 다 신이 될 수 있다. 2) 이러한 가운데 일본의 기독교는 전 인구의 약 0.8%에도 못미치는 복음화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복음이 휠씬 빨리전 해졌다. 1549년에 첫 카톨릭선교사 "프란치스코샤비엘" 이 남단 카고시마(鹿兒島)에 들어온후, 1859년에는 6명의 미국 개신교선교사가 입국하면서부터 개신교 선교는 시작되었다. 복음의 시작은 우리나라보다 빨랐으나 복음화율은 우리와 비교도 안될만큼 적은 비율을 보면서 선교사의 한사람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금번 연구를 통하여 그 주된이유가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점검하는 기회가 되었고, 이에 짤지만 일본선교를 방해하는 일본의 종교다원주의가 된배경과 복음의 토착화를 방해하는 요인들을 점검해 봄으로 본 연구서를 작성하려고 합니다. 선교지의 특성상 많은 자료들이 사용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글문을 엽니다 . Ⅱ 日本의 宗敎 1.신 도 (神道) 1)신도란 무엇인가? "신도"(神道)라는 단어는 "센따오".(Shen-tao)라는 중국어로 부터 유래된 것으로서 "神들의 道"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신도는 일본 토양에 뿌리를 내린 토속적 종교로서 이 역사적 기원은일본 민족의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3) 일본 고유의 민족종교로서 신도는 자생적인 종교이다. 신도는 조상 숭배와 자연 숭배의 범신론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 그들이 섬기는 "아마테라스오오가미"(天照大神)은 일본의 전설적이 건국 신화에 나오는 태양여신으로서 모든 신들 위에 가장 뛰어난 신으로 여겨진다. 신도에는 특별한 경전이나 교리가 없다. ----------------------------------------- 1) 堺屋太一, 「日本이란 무엇인가」.동아일보사옮김. 동아일보사. 1992. pp. 116-117. 2) 유기남,「일본을 알자」.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1994. p. 17. 3) 陰斗眞, 「일본선교를 위한 신도이즘의 종교사회학적 연구」. 선교학 문학석사학위논문.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 1990. p. 17. - 1 - 단지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집단. 국가. 지배자에 충성할 것과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4) 신도의 800만 신의 개념은 번개와 태풍등 자연현상, 산.폭포.바위등 자연물인데, 거기에 조상숭배의 사상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종교의 원시형태라고도 할수 있다. 그러나 그 원시적 형태가 오늘날까지 성전이나 계율도 없는 채 계속 되고있는 것은 드물다. 결굴 신도는 종교로서의 절대적 가치관, 즉 '신의 말씀과 율법'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신도에 영원의 생명을 주었다. 절대적인 가치관이 없는 탓에 다른 가치관과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2)신도와 천황제 천황제를 종교적으로 성립시키고 있는 "기끼신와"(記紀神話)를 보면 하늘에서 봉림했다는 니니기의 자손으로부터 "덴무"(天武)천황이 출현하고, 니니기가 봉림할때 '아마데라스'로부터 부탁받았다는 "덴죠무규 노 신쵸규"(일본땅을 치리하라는 명령)을 기도로 해서 일본을 정복하고 처음으로 나라를 개국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제1대 천황이라고 한다. 6) 이러한 배경을 가진 천황이 신도(애니미즘적인 토착민간신앙)를 교묘하게 받아 들여 신격화시킨것이 최초의 천황제 시스템이라 할수 있겠다. 이 천황제는 많은 시간의 흐름속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오면서 한때는 그존재조차 잃어버린 시기도 있었다.7) 그러나 도꾸가와 막부 말기, 메이지 유신의 시대적 전환기가 시작되면서 국가신도 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내용을 지닌 사상과 고대 국가주의(식민지주의)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의 배경을 지닌 국가중심으로 나타나게 되었다.8) 기끼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메이지에 들어서면서부터 만들어졌던 천황가의 우지가미(氏神,본래 천황가만이 신이라 하는 것)였던 아마데라스를 기원하는 이세징구(일본황실의 종묘 즉 천황계의 조상신 묘지)를 정점으로 한 황실신도 아래 일본에 있는 신들을 (기독교 포함)통합한다고 하는 교묘하고 강력한 종교의 국가적 통합을 이루게까지 되었다.9) 이것은 밀려오는 외세에 대항하기 위한 자구책이라고도 볼수 있겠다. 천황을 중심으로 강력한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명령에 따라서는 목숨까지도 희생시킬수 있는 절대국가의 중심을 천황에게 두었던 것이다. 또한 근대 천황제를 확립시키기 위해서 메이지 헌법에서는 제1조에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함', 제3조에서는 '천황은 신성이므로 침범해서는 안됨'이라 하면서 천황이 일국구의 '신'이라는 것을 헌법으로 절대화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천황이 신성절대통치권을 빌려 군의 통수권까지도 장악하였다.10) 2. 佛 敎 불교가 처음 일본에 들어온 것은(고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긴메이 천황시대(539-571)라고 한다. 이때 긴메이천황은 백제로부터 전해 받은 불상을 "소가노 이나메"에게 주어 모시도록 했다고 한다. 즉 천황이 즉 정부가 불교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본의 신도가 명확한 규칙.원칙.계율등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를 관대하게 인정할수 있었을 것이다. ---------------------------------------- 4) 유기남, pp. 18-19. 5) 堺屋太一, p. 120. 6) 데라다 유이찌, 「일본선교의 비밀을 벗긴다」베다니출판사. 1995. p. 45. 7) 도꾸가와 막부시대(AD1603-1869)에 일본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견고한 지배체제에서 행한 쇄 국정치의 의해서 천황제는 그 종재조차 잃어버렸던 시기도 있었으나 그 시기는 짧았다.(Ibid., p.56) 8) Ibid., p. 57. 9) Ibid., p. 61. 10) Ibid., p. 63. - 2 - 일단 불교신앙의 자유가 인정되고 나서 귀화인의 증가와 새로운 문화에 대한 동경 등으로 이러한신흥종교는 급속히 펴져 나갔다. 특히 불교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동반한 것이 그 보급을 앞당겼다.11) 1)불교와 신도의 대립 이로써 고대 야마토 왕국이 번영하고 산업도 융성해지면서 토지개발이 진전되었다. 당연히 불교도의 정치적 발언권이 이 강화되고 필연적으로 민간신앙만이 아니라 정부와 천황자신의 신앙으 로 할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일에 긴메이 천황의 뒤를 이은 비다쓰천황시대(572-585)는 그런대로 지나갔지만, 그 다음의 요메이 천황시대(585-587)가 되면 "천황이 비로소 불교를 믿게 되었다"는 기록이 (고사기)에 나타난다. 그러나 요메이 천황의 행위는 개인적인 예불이었을 것이다. 이에 소가씨를 비롯한 승불파들은 "공식예불을 하라"고 주장했다. 즉 종교가 비로소 큰 정치적인 문제로 발전한 것이다. 천황이 공식적으로 예불을 하고 불교를 국교화하려면 당연히 신도를 버리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메이 천황은 이 문제를 그대로 남겨둔 채 재위 3년만에 죽고 말았다. 이후 차기 천황의 인선문제와 관련하여 불교를 국교화하려는 승불파와 일본 고래의 '간나가라(隨神)의 도'를 보 호하려는 배불파간에 대전쟁이 일어났다. 이것이 일본역사상 유일한 종교전쟁인 소가(蘇我)-모노노베(物部)전쟁이다. 이때 압도적으로 많은 호족들이 소가씨를 수령으로 하는 승불파에 가담해서 승불파의 승리로끝나게 된다. 그 결과로 승불파로 보이는 스슐천황(587-592)이 소가씨에 의해 옹립된다. 그러나 스슐천황도 곧 불교신앙의 정치적 위험성을 깨닫게 된다.12) 2)신도신화의 부정- 천황가의 위기 원래 천황가가 일본의 최고위에 있을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신도신화에 있다. 일본은 아마데라스오미가미(天照大神)의 자손인 진무(神武)천황이 강림해서 건설한 나라다. 그 진무천황의 자손이 천황가라는 신도신화에 의해 천황가가 일본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신도를 부정하는 것이고, 아마데라스오미가미도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천황가에게는 물론, 일본 정치체제 전체의 문제였다.13) 이때문에 스슐은 이리저리 불교의 국교화를 미루면서 신도를 지키려고 한다 그 결과 5년 후에는소가노 우마코에게 살해되고 만다. 일본의 역대 천황중에서 '살해된' 유일한 천황이다. 3. 신불유습합(神佛儒習合) 스슐천황이 죽고 나서 그 뒤를 이어 천황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스이코천황(592-628)인데, 이 사람은 명확한 역사기록으로 남아 있는, 동아시아최초의 여제다. 그 때 천황가에 성인 남자가 없었 던 것은 아니었지만 소가씨들의 유력호족이 조정하기 쉽게 여성을 추대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여자의 아버지는 긴메이 천황이었지만 어머니는 소가씨 가문 출신의 가다시히메였다. 이때에 천황가에 대 천재가 출현하게 되는데, 우마야도노 도요토미미 황태자, 즉 쇼토규(聖德)태자다. 태자는 고모인 스이코천황의 섭정으로 정치적 발언권을 확보하고, 불교와 천황제도를 양립시킬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소위 '신불유습합(神.佛.儒習.合)'의 사상이다. 즉 '신도를 근간으로 하고 불교를 기술로서 발전시키며 유교의 예절을 장려하여 현실적인 번영을 이룩한다' 는 논리를 짜맞춰내고, 하나에 하나를 더한다고 해서 다른 것이 부정되는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당시의 많은 일본인이 고뇌하고 있던 문제에 대한 적절하고도 현실적인 해답이었다.14) ---------------------------------------------- 11) 堺屋太一, pp. 120-121. 12) Ibid., pp. 121-123. 13) Ibid., p. 123. 14) Ibid., pp. 125-126. - 3 - '신들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존경을 해도 징벌을 내리기도 하는것이 일본의 신들이다. 이 징벌을 막아 줄 수 있는 것이 불교다. 때문에 우리는 불교도 숭상해야 한다.' 태자는 그런 취지로 논하고 있다. 신들에 대한 공포를 더욱키워서 이를 폐지하는것을 억제하는 반면, 자애를 설파하는 불교의 일면을 강조하여 그 신앙도 긍정했던 것이다. 이때 부터 일본에 더이상의 심각한 종교적 대립은 없어졌다. 동시에 엄격한 종교논리나 신앙심도 없어졌다. 이것이 그후 일본에끼친 정신적 영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은종교적 계율에 사로 잡히지 않고 외량 문화를 받아 들일 수 있게 되었고, '신의 말씀과 율법'을 전면적으로 믿지 않고 모든 문화를 경우에 따라 좋은 부분만 취하는 습관을 체득하게 되었다.15) 4. 조상숭배 일본에는 문자가 없었던 8천년이란 긴 시간이 있었다. 즉 석기시대로부터 승문시대까지로 원시시대(BC8,000-300)였다. 특히 신도는 이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 조상 숭배의 원리이다. 그래서이 원리가 일본문화의 기초가 되었고, 이 원리를 제외하고 생각할 수 있는 문화란 일본에서는 없는 것이다. 이 조상숭배는 개인의 가치관을 다루고 있으며, 이가치관이 가문을 받들고, 혈육을 받들고, 지역을 받들어서 종국에는 나라를 받드는 근본 원리로 확대된다. 신도는 이것들을 이용해서 성립된 것으로 조상숭배 원리가 무너지면 자동적으로 신도는 무너지고마는 것이다. 16) 1)죽음에 대한 공포와 조상숭배 조상숭배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형성되었던 자연발생적인 원시 토착종교이다. 신도는 그것을 의식화했고 형식화했다. 따라서 신도의 본질 역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여러 가지를 두려워하며 인간의 안정을 해치는 것들을 두려워하는 것들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것들을 두려워하는 표현이 신도의 제사이다. 조상에게 해를 끼치는 것들에 비는 행위를 통해서 재해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을 남기고 죽은 사람이나 비참하게 죽음 당한 사람의 영을공양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신으로 받들어 신사에 모심으로써 화근을 모면하려는 것이었다. 조상숭배는 그러한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는 당연한 행동이었고,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자연스러운 수단이었다. 17) 2) 조상숭배의 가치관 조상숭배의 원리는 결국 인간의 죽음을 사람들이 얼마나 잘 이용하는가 라는 면을 보여준다. 일본인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데, 조상숭배란 죽은 자의 영을 기원한다는 의식에 따라 죽음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데 있다. 여기에서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두개의 가치관이 나타난다. 즉, 놀랄 정도의 현실주의(경제동물이라고 불리우는 점)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우상숭배이다(가미다나, 부쯔단, 진자등).18) 일본인들은 죽음을 냉철히 바라보며 배우고자 하는 것보다 그것을 의식화하여 죽음을 항상 가까이에 둠으로써 공포를 가볍게 하자는 것이었다. -------------------------------------------- 15) Ibid., pp. 128-129. 16) 데라다 유이치,. p. 110. 17) Ibid,. p. 113. 18) Ibid., pp. 113-114. - 4 - 3)영혼의 순환 일본에서는 죽은 사람의 영은 산으로 간다고 하는 산중타계설에 있어서의 영혼관은 조상숭배원리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일본인의 사생관에 있어 죽은 후 죽은 사람의 영은 아직도 개 성을 지니고 있으며, 시예(신도에서는 죽음을 더러운 것으로 생각함)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손들이 이것을 받들어 모시지 않으면 끝까지 깨끗해지지 않고 영적 권위를 가지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해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받들어 모심으로써 죽은 사람의 영이 점점 격한 개성을 잃게 되어 '시예'도 정화되어간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산의 낮은 곳에 있었던 죽은 자의 영이 의례가 반복되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 마침내 더러움이나 슬픔, 분노 등을 초월하여 깨끗하고 부드러운 영으로 되어간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해서 완전하게 정화되어진 죽은 자의 영은 '소레이'(神靈)가 되고, 이 소레이가 더 승화되면 조상신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승화된 조상신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리하여 새로운 생명으로서 어느 날엔가 나까쯔구니(이 세상)에 재생한다는 것이다. 19) 생→ 사→ 소레이(조상신)→ 재생이 조상숭배의 근본원리가 되는 영혼의 순환이다. 4)조상숭배에 의한 귀속의식 조상의 영을 모시는 사람은 다음 대상으로 자기 자신이 받들어 모셔지게 된다는 것과 또 그 모셨던 조상신들이 집이나 마을에서 그 모시는 협동체를 보호함으로 말미암아 조상숭배의 공양을중요하게 생각하고, 스스로가 그 일부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이것은 집안에 있는 부쯔단(佛壇)을 지키고, 묘를 지키며, 여러가지 행사를 지키는 것이다. 이런 행사를 통해서 일본의 집이나 마을이 하나의 협동체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어렸을 때는 그다지느끼지 못했던 귀속의식을 40대가 넘은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이 그러한 공양을 지키는 것으로 말미암아 귀속의식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20) 반대로 이러한 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에서 완전한 '이지메'(따돌림)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일본인은 외국인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조상숭배에 강한집착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들이 얼마나 죽음의 문제를 심각하게 그들의 삶의 중심에 두고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한 예들로 무덤들이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외국인들의 눈에는 마치 죽은 영들과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실제로 무덤주변의 어떤 집들을 다른 집보다 더 선호하는 사 람들도 있다. Ⅲ 일본인의 종교의식구조 표면적이 일본인의 종교의식은 대부분의 일본인은 자신을 '무종교'라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당신 집의 종교는 무엇입까?'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일본인은 명확하게 '우리집의 종교는 불교이고, 무슨무슨 종(宗)입니다'라고 대답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자연스럽게 '무슨무슨 진자(神社)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반드시 '그렇지만 저 자신은 별로 믿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말을듣게 된다. 이것이 일본인의 종교의식의 특징이다.21) 이러한 측면에서 일본인이 세계에서 가장 무종교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일본인은 세계에서도 가장 완고한 종교의식을 지닌 민족에 속한다. 이것이 일본인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종교의식이다. --------------------------------------------- 19) Ibid., pp. 123-124. 20) Ibid., p. 125. 21) Ibid., pp. 174-175. - 5 - 1.일본인의 종교관 일본인들이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종교란 어떤것을 말하는가. 어느 종교조사에 의하면, 대부분의 일본인은 '나에게 있어 종교란 그다지 필요하다고 생가지 않는다. 종교가 없어도 살아 갈수 있다. 그렇지만 종교를 부정하려는것은 아니다. 약한 자나 불행한 자, 노인이나 여자들에게는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런 점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어떠한 종교를 믿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할 생각이 없다. 너무 깊숙히 빠지지만 말고 그 상태에서 믿어라. 하지만 나에게는 필요치 않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22) 이런것을 볼때 일본인은 종교를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연약한 사람들만이 가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자신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만 자신의 삶을 둘려싼 것들을 살펴보면 어느것 하나 종교와무관하지 않는 삶을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면 집에는 부쯔단,가방이나 소지품중 하나는 반드시 부적을 몸에 지니고 있고, 마을의 신사나 절을 지날때면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숙이고 경건하게지나가는 모습들을 어디에서나 볼수 있다. 2. 최종 결정 원리로서의 집단 일본 사람들의 의식은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조상숭배의 원리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조상숭배의 중심은 집이나. 마을, 나라 등의 집단을 보호한다는, 결국 자신들의 이익과 생활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잘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당연히 일본인으로서 중요한 역활을한것이고, 훌륭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즉 조상숭배란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고 그 집단의 결속을 뭉치기 위한 정신적, 상징적 원리이다. 실로 천황이 일본을 하나로 뭉치기 위한 상징적 원리로삼은 것이다. 이것은 집단을 뭉치기 위한 하나의 상징적 원리는 될지 몰라도 개인의 종교는 될수없다.23) 3. 일본인의 귀속의식 일본인은 자기가 어느 집단에 소속해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귀속의식이라한다. 다른 종교를 갖는 것도 좋지만 집이나 회사에 방해를 주지 않고 집단으로서 정한 것은 반드시 지킬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야말로 일본에서는 '최대의 악'이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한게 받아 들이고 있다.24) Ⅳ. 결 론 이상과 같은 일본의 대표적인 종교인 신도와 불교와 조상배, 더불어서 일본인의 종교의식에대하여 알아보면서 일본의 혼합주의적인 종교를 알아보았다. 이와같은 종교적 배경속에서 그동안 많은 선교사들이 일본의 복음화를 위하여 애써왔으나 아직1%를 넘지못하는 복음화율의 원인은 앞에서 연구해본바와 같이 '신불유습합'의 사상아래 형성되 어진 그들의 종교관과 조상숭배에 대한 강한 집착력과 집단으로서의 귀속의식속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 22) Ibid., p. 176. 23) Ibid., pp. 178-179. 24) Ibid., p. 181. - 6 - 복음의 토착화란 그나라의 전통문화와 토양에 뿌리를 내려서 원주민에 의한 원주민의 교회로세워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일본내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그 지역의 바른 연구가 없고서는 있을수 없다. 1938년 마드라스 선교 대회에서는 토착화를 다름과 같이 정의 했다. "토착교회"란 동양이나 서양의 교회가 그 땅에 뿌리를 박고, 그리스도에 복종하며,그 환경에 자연스럽고 친숙한 사상과 행동 양상을 사용한다. ... 선교 교회가그들의 신앙고백과 의식에 기록한 경험과 교훈을 염두에 두면서도 피선교 교회 가 새 언어로 같은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하는것이다. 즉 그 나라의 문화적, 종교적 유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하는 것이다.25) 현대 기독교 선교의 주요 과제는 타종교와의 대화의 문제이다. 19세기까지 기독교는 기독교의절대성과 우월감을 가지고 타종교를 정복하는 자세로 선교에 임하였지만 ,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상대주의 사상이 등장하고 타종교에 대한 태도가 정복적인 태도에서 유화적이 태도로 변해 버렸다. 1960년대에 타종교에 대한 선교는 전도가 아닌 대화로 발전하여 버렸다. 이러한 신학적인 사조로 인하여 기독교이외의 여러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일이 빈번해 졌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까지 연구한 신도와도 대화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타종교의 실체와 신학을 인정하고,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 는 등의 여러가지 모순된 점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신도이즘과 불교와 조상숭배등 여러가지 혼합종교속에 있는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신도의 실체를 인정할 수 일을 런지는 모르나 그들의 잡다한 신학과 인간적인 선행을 바탕으로한 구원관을 인정할수 있을까? 하는 중요한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26) 그러면 우리는 이 타종교속에 있는 이들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킬수 있을까? 그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타종교속에 있는 그들에게 복음을 들고 접근해 갈 수있을까? 타종교인에게 복음을 전할때는 상대방과 공유할수 있는 접촉점에 근거해서 접근하는 것이 바랍직하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신의식으로 첩촉점을 삼는다. 사도바울은 아덴에서 헬라사람들에 게 전도할때 "아덴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종교성이 많도다"(행17:22)고 지적하였다. 종교성을 곧 인간의 신의식을 말한다. 인간은 타락하였으나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고 하였다(롬1:19,20) 따라서 신의식과 하나님의 형상은 접촉점이 될 수 있다. 일본에서는 神을 '카미사마'라고 한다. 또한 기독교의 하나님역시 "카미사마"라고 한다. 이 동일한 카미사마를 유일신개념으로 설명하기란 다신론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넘어야 할 많은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일본속에서도 반드시 부흥의 계절이 올것을 굳게 믿는다. 본 연구를 통해서 일본인의 신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를 갖는 기회가 되어졌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조금더 많은 데이타와 자료의 사용으로 깊은 연구가 부족한 아쉬움을 남기며 다음기회에좀더 깊은 연구를 다짐하면서 본 연구를 마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