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의 말씀

자유케 하는 진리 요8:31-33

장경태 2010. 9. 4. 16:25

자유케하는 진리                    요8:31-33                           10.9.5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바닷가는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나 물속에 사는 물고기들에게 있어서는 최고로 안전한 장소가 바로 바닷물속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들에 있어서 하늘을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있어서 하늘을 가장 안전한 곳이고, 자유로운 곳입니다. 꽃은 흙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가장 자유롭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자유로운 곳은 진리 안에 있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의 한 연구팀이 동물의 지능한계를 알아보기 위해 15세 된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갖은 노력을 다해서 140여개의 단어를 가르치고 이 단어들을 자기 생각에 따라 결합할 수 있도록 해보았습니다. 이 침팬지가 수화를 통해서 어떤 의사를 표현하는지가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침팬지가 맨 처음으로 표현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Let me out.” 나를 놔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발 당신들 때문에 귀찮아 죽겠으니 나를 좀 자유롭게 해달라는 의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유란 짐승도 원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놀라운 실험결과입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은 어떠하겠습니까? 패트릭 헨리가 말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1955년 12월 1일, 미국 몽고메리 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로자 파크스는 일을 마치고 잔뜩 지친 몸으로 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 안에는 백인이 앉는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지만 파크스는 그 자리를 피해 흑인 지정석에 앉았습니다. 당시엔 인종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버스에도 흑인과 백인의 자리가 따로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몰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한 파크스는 자리에 앉자마자 금세 잠이 들었는데, 한참 뒤 누군가 자신을 깨우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좌석이 이미 꽉 차 있는 가운데 백인 한 명이 자리를 잡지 못해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때 운전사가 파크스를 쳐다보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어이, 깜둥이! 어서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란 말이야!" 파크스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가 치밀어 오른 파크스는 인종분리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은 곧 수많은 흑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던 흑인들은 다음날부터 절대 버스를 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먼 길이라 도 걸어 다니거나 요금이 비싼 택시를 이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흑인들을 상대로 영업하던 버스 회사들은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백인들은 흑인들을 상대로 더욱 심한 탄압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흑인들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년 뒤, 몽고메리 시에는 인종 차별이 없는 버스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 사건을 미국 전역으로 퍼져 버스뿐 아니라 많은 인종 차별법의 폐지를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몽고메리의 기적'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부터의 자유를 얻어야 할까요.!

1. 죄로부터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의 삶을 가장 얽어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두가지 죄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원죄와 자범죄입니다. 원죄란 우리의 조상 아담이 지은 죄를 말하는 것이고, 자법죄란 우리스스로가 지은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엄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인간도 이 두가지의 죄악속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는 죄의 삯으로 얻어지는 영원한 사망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이 모든 죄로부터 자유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누군가가 대신해야 하는 죄의 짐을 예수님이 친히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어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게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죄사함의 은총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죄의식,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이 죄책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갈라디아서3:13-14절에 보면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고합니다. 또 갈라디아서5:1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고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이미 있게 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자유가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는 율법을 무기로 사용하여서 인간을 다스립니다. 사탄은 인간이 저지를 죄를 가지고 인간을 부리면서 살아갑니다.

창세기의 50장에 보면 요셉의 형제들은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동생을 애굽에 팔아버린 것으로 인해서 요셉의 얼굴을 들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야곱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버지를 봐서라도 요셉이 자신들을 임시로 용서하고 있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아버지가 자신들의 방패막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자 그 형들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15절에 보면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하고” 라고 합니다.  그들은 깊은 죄책감속에 사로 잡혀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고통하면서 울부짖는 아버지의 울음을 들으면서 그들은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자고 다짐을 했던 죄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동생을 죽이려고 했던 죄악이었고,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팔아넘겼던 죄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책감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 계속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들이 순간적으로 저지른 잘못이, 죄악이 그들의 한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아가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죄악은 묻어두고 지나갈 수 없습니다. 가슴속에 평생 묻어두면서 살지 못하는 것이 죄의 문제입니다.  언젠가는 다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묻어놓고 지나가시는 분이 아니라 해결하고 지나가시는 분이신 줄 여러분은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그 것 때문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더 이상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지 않도록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죄책감은 사람들을 어떻게 만드는 줄 아십니까! 비굴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비굴한 모습은 자신들이 직접 요셉을 만나지도 못하고 중간에 사람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전하게 합니다. 16,17절에 보면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데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셨다 하라,” 라고 합니다. 요셉의 아버지는 자신들의 아버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용서해주라고 했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굴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중간에 사람을 넣어서, “우리아버지가” 가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렇게 비굴해지는 것 같습니다. 매사에 자신이 없습니다. 자기가 살길만 찾습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작 요셉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이 형제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용서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잊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들을 사랑하고 있었고, 이미 그들을 품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형제들을 보는 요셉의 마음이 더 아팠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미 우리의 모든 죄악들을 다 용서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죄악에 사로잡히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면 그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더 아프고 답답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2. 질병으로 부터의 자유

진리는 또 무엇을 자유하게 해주시는가 하면 질병으로 부터의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상당한 부분들이 질병을 치료하시는 사역이었던 것을 봅니다. 눈먼자 문등병자, 손 마른자, 혈류병, 앉은뱅이, 예수님이 고치신 사람들의 모습들이 얼마나 많이 기록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죽은 이도 살려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역을 이야기할 때, 질병을 고치는 사역을 빼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의학이 고치지 못하는 수많은 질병들을 믿음으로 고쳤다는 간증은 여러분이 수도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한번 질병이 생기기 시작하고, 병들기 시작하면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다 허물어낼 수 있을 만큼 질병에 약한 존재입니다. 오죽하면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람이 병들기 시작하면 아무리 효자라 하더라도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사로잡혀 사는 또 하나의 병입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병들게 합니까! 그 시작 역시 죄였습니다. 창세기3장에 보면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맛있는 과실을 내어야 할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즉 환경을 파괴한 것입니다. 이 환경의 파괴가 결국은 인간들에게 수많은 질병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칠 때에 하셨던 말씀이 너의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질병의 원인이 죄에 있었기에 죄의 용서를 통해서 그의 육체적 질병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결국 병이 드는 것은 어디에서 부터입니까! 마음에서 부터입니다. 마음이 병들게 되면 육체도 결국은 병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의 처방 속에서도 이런, 저런 약을 주면서도, 하는 말이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 합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그 약이 듣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마음의 치료를 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자연건강학교를 운영하시는 분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분의 글에 의하면. 암의 주된 원인을 크게 나누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거나 받았던 경험이 있었던 경우와 그 외 각종 음식공해, 공기, 물, 세제, 화학섬유, 새 집 증후군 등을 들수 있는데, 주범인 스트레스는 마음이 힘들고 불편하게 한 것인데, 이것은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에 따라서 몸은 즉각적인 반응을 합니다. 예를 들면 근심 걱정이 많으면 밥맛도 없고, 소화도 안되고, 잠도 안 오게 됩니다. 얼굴에도 수심이 베어 나오고, 몸도 축 늘어지면서 무겁게 됩니다. 화를 내면 혈압이 오르고 독소가 온 몸에 퍼지면서 몸이 아파옵니다. 반대로 기분이 좋거나 기쁜 일이 있으면 아픈 곳도 없고 밥맛도 좋고 소화도 잘되고 몸도 날아갈 듯이 가볍게 됩니다. 이렇든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서 내 몸의 세포 하나 하나는 즉각적인 반응을 합니다. 다시말하면 어떤 감정에 많이 노출되었느냐에 따라서 암의 발생 부위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다혈질인 사람은 간에 이상이 오고, 슬픈 감정에 많이 힘이 들었던 사람은 폐에 이상이 오고, 크게 놀라거나 공포심을 겪은 사람은 신장에 이상이 오고, 위가 나쁜 사람은 생각이 많고 복잡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결론을 내기를 성경 말씀에 근심 걱정은 뼈를 녹인다는 말씀처럼, 아무리 명약인 산삼이나 웅담을 먹더라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약효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평화로우면 피가 맑게 되어 몸이 정화되기 시작하고, 피가 맑으면 나쁜 병도 사라지게 됩니다. 작은 일에게 감사하며, 세상을 바로 보고 긍적적인 생각을 하며 살 것을 제안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의 해결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안에 떨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시고 처음 나타나셔서 하셨던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셨습니다. 주님은 평강을 주십니다. 그 평강이 우리의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하게 만들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3. 삶의 문제로 부터의 자유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여러 가지 삶의 문제로부터 자유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삶의 문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 살까! 무엇을 탈까!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삶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삶의 질의 문제로 고민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결국 인생의 일어나는 문제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에 얽매이게 되어 있고, 그 문제 때문에 구속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인생사의 문제 때문에 죄를 짖기도 하고, 또 웃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염려를 가져다 주고, 근심과 걱정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합니다. 솔로몬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가졌어도 들의 백합화 하나보다도 못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혀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은 너희에게 필요한줄 다 아신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괴로운 인생을 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한 일에 집착하게 되어지면 자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든것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집착에서 떠나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삶속에 무엇이 필요한지, 여러분의 가정속에 무엇이 필요하신지, 여러분의 사업장에 무엇이 필요하신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무엇이 필요한지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싦의 문제로 인하여 힘겨워 하지 마시고, 모든 것을 주시되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우리의 삶에 자유를 하락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진리를 알면 우리가 죄로부터, 질병으로부터, 삶의 문제로부터 자유하게 되어 집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31절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라고 합니다. 진리를 아는 것은 말씀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됨으로 얻어지는 자유인 것입니다. 제자가 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구속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 제자가 되는 것이야 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마치 물고기에게 있어서의 자유로운 장소는 물속이듯이,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있어서는 하늘이 자유로운 공간이듯이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 하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예수그리스의 말씀 속에서 살아가는 제자됨의 모습이 우리를 가장 자유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