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케 하시는 하나님 고후8:9-15
평균케 하시는 하나님 고후8:9-15 10.10.24
오늘 이야기는 가난하고 어려웠던 한교회가 모 교회를 돕는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보통은 모교회가 지 교회들을 돌보아주어야 하는데, 모교회가 어렵고 힘이 들다 보니까, 지교회가 도움의 손길을 편 것입니다.
초대교회당시의 예루살렘교회는 모 교회였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외쳤던 복음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여 하루아침에 삼천명이 회개하는 역사를 통해서 창립되었던 교회였습니다. 출발자체가 삼천명으로 시작되었던 예루살렘교회는 계속적인 성장을 가져오다가 박해를 받기 시작합니다. 계속적으로 박해를 받으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들이 소아시아지역을 비롯해서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됩니다. 박해를 통해서 오히려 복음이 전세계로 확산이 되는 그런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성장을 거듭하던 예루살렘교회는 그때부터 주춤되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성도숫자도 감소를 하고, 그리고 글라우디오황제의 통치시대에 발생했던 심한 기근으로 교회전체가 경제적으로 대단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예루살렘교회의 소식을 들은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마게도냐교회의 교인들의 상황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을 도와줄만한 여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정복자들에게 많은 천연자원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심한 학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들도 박해와 가난 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보다 예루살렘교회가 더 어렵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그 예루살렘교회가 있었기에 오늘날 자신들도 복음을 들을 수 있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서 그들이 정말로 정성을 다해서 헌금을 해서 보내주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도바울이 칭찬을 해주면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시작이 됩니다.
1. 가난한 자를 부요케.
사도바울은 먼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합니다. 본문9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고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부요하신분이시다 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는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모자란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을 만큼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가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의 가난하게 됨은 인간됨을 말합니다. 늘 부족하고, 모자라고, 끝이 없는 불만족과 주어도, 주어도 더 달라고 외치는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땅에 오심을 말합니다. 가난과 부를 결정하는 것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만족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가난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유한 것이 많지 않다 할지라도 만족하면 부한 것입니다. 만족한 사람에게서 여유가 나오고, 배려가 나오고, 이웃을 생각하는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콩 한쪽이라도 있으면 나누어 먹으려고 하는 나눔이 나오지만, 남들이 하나 둘도 소유하지 못할 때, 아홉 개나 소유한 사람이 나머지 한 개를 더 소유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열을 체우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비를 기대할수 없습니다. 나눔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나 먹을 것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나도 가난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너희를 부요케 하려고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부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부자입니까! 무엇에 대해서 부요케 함입니까! 만족함입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만족함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입니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더 이상 움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소유하려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보다 더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보다 더 어렵게 살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소유했던 것들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눔이 시작되어지고, 베풀기 시작합니다. 무엇인가 댓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을 더 즐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한 사람, 한사람 더 많아지는 것을 통해서 세상은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바로 그런 인물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소유만을 알았던 욕심쟁이 부자가 예수님을 만나고는 나눔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댓가 없이 베풀어주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바꾸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더니 그의 생각과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불안한 삶을 살지도 않았고, 더 이상 불행한 삶을 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 와서 영생에 대해서 고민하며 질문을 했던 부자청년은 너의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10:21)는 말씀에 고민을 하면서 돌아간 모습을 우리는 압니다.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눔을 몰랐습니다. 베품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민을 하면서 돌아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부하게 하시려고 했습니다. 부자청년에게 말씀 하실 때에도 이땅의 것을 나누고 베푸는 것을 통해서 하늘의 보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보화로 부하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부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에서 만의 부가 아니라 하늘에서의 부도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내용을 잘못 이해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는 가난하게 살고 하늘에서만 부하게 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도 부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서 가난하게 된 사람보다는 부하게 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이 땅에서 가난하고 힘없이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요한자리에 앉게 하시려는 것이 주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라고 설명하십니다. 부요한 자리, 나눔이 있고, 베품이 있는 행복한 자리로 이끌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가난이 물러가고 부하게 되는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이 들어간 나라들 마다 가난이 물러가고 풍부함이 임했습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나라를 들라고 한다면 한국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가난의 자리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간증들을 우리는 들어봅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가난이 퇴치되어지는 장면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셔서 가난을 물리치고 부요를 주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부요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산시켜 나가시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서 이 땅을 당신의 은총으로 평균케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부족한 것을 보충함으로 평균케.
본문13,14절에 보면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고합니다.
하나님은 평균케 하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다 잘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고자 하십니다. 평균에는 두 가지 것이 있습니다. 하향평균이 있고, 상향평균이 있습니다. 하향평균은 무엇입니까! 있는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서 모두가 가난하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향평균은 무엇입니까! 없는 사람에게 더 주어서 모두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나라는 어떤 나라겠습니까! 중산층이 무너진 나라입니다. 중산층이 평균치입니다. 그런데 그 중산층에 대한 기준이 나라들 마다 다릅니다. 일본에서의 중산층에 대한 기준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서의 중산충에 대한 정의는 한 일간지에서 이렇게 내렸다고 합니다. “4년제 대학을 나오고, 10년 이상 한 직장에 다니고 월소득은 400만원 이상되고 30평 아상되는 아파트에 살며, 2000 cc 이상된 중형차를 타야한다” 라고 했답니다. 즉 중산층의 조건이 집, 차, 학벌, 소득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프랑스 전 대통령이었던 ‘퐁피두’ 는 중산층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중산층은 외국어 하나쯤 자유롭게 구사하여 폭넓은 세계 경험을 갖추고 스포츠를 즐기거나 악기 하나쯤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별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 손님접대를 할 줄 알며, 사회 정의가 흔들릴 때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나설 줄 알아야 한다.”
퐁피두 전 프랑스대통령이 이야기한 중산층의 이야기가 멋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바로 이런 풍부함과 여유로움, 그리고 나눔과 베품, 뿐만 아니라 정의로움을 갖춘 사람들이 많다면 얼마나 그 나라가 건강할까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믿은 사람들이 이런 건강한 영적 중산층의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12제자가 될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12제자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장 핵심들은 두세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늘 가까이 하셨던 것을 복음서를 읽어보면 알수있습니다. 그리고 12제자들, 이들은 예수님과 24시간을 동행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라 성경에는 또 다른 제자군인 70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따로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둘씩 짝지어서 전도훈련을 보내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1장에서의 120문도역시 또 다른 제자군입니다. 그런가 하면 숨은 제자군들도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드러내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여성 제자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하면 예수님과 3년간을 같이 지냈던 12제자들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생활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도 역시 그런 제자 됨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건강한 영적 중산층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을 위해서 헌신할 줄 알고,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내어 놓을 수 있고, 자신의 시간의 제일순위를 하나님을 위해서 드릴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은 이런 건강한 영적 중산층이 많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모든 가난하고 힘이 없고, 약한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어서 상향평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이 아니하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1:16-28) 고 합니다.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고, 문벌도 좋지 않는 사람들, 미련하고, 약한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로,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다고, 가졌다고, 폼잡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주시는 아무도 자신의 소유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사람이 없는 건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자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3. 많이 거둔자도 남지 않게 적은자도 모자라지 않게.
그래서 본문 15절 처럼 하나님께서 많이 거둔자도 남지 않고 적은자도 모자라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만족함을 누릴수 있도록 은혜로 체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때에 하루의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를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셨습니다. 하루를 배부르게 먹을수 있는 양을 주셨습니다. 안식일전날에만 이틀치를 주셔서 보관하게 하셨고, 나머지는 유효기간이 하루였습니다. 하루가 지나도록 남겨 놓은 것은 다 벌레가 먹어서 버리도록 훈련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용한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도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배불이 먹도록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버리지 않고 다시 거두게 하셨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자라게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낭비도 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제원리입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체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 있으면 편안한 것입니다. 없다고 자격지심을 갖지 않으십니다. 또 있다고 교만하게도 하지 않으십니다. 있는 사람의 것은 나누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 건강한 사회, 건강한 나라를 이루어 가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생활원리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2장44절부터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라고 합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물론 많이 거두고 적게 거두는 것의 차이를 개인의 차로 둘 수도 있습니다. 많이 거둔 사람들은 그만큼 더 열심히 일을 하고 그만큼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또 적게 거둔 사람은 그만큼 열심히 하지 않고, 또 능력이 그만큼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적게 거둔 사람이 적게 먹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수 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개인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조금만 노력해도 금방 모든 것을 깨달아 알수있는 지혜도 있고 건강이 있는 사람, 그리고 환경이 된 사람들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그것밖에 안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환경이 안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차별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환경, 그리고 달란트, 능력을 그 사람에게 더 주었다고 한다면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우리의 환경을, 상황을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가 나 혼자 독식하라고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눔입니다. 베풀라고 주신 것입니다. 나눌수있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적게 소유한 사람들도 오히려 많인 가진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눌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 이해하고, 사랑으로 품어주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정해주는 마음, 이런 것들도 나눌 수 있는 최고의 것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을 평균케 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누구를 통해서 평균케 하실까요. 바로 여러분들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이 소유를 주시고, 하나님이 여유를 주시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사랑을 주신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 땅에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상향 평균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 부요하신 그분이 우리가 있는 그 가난의 자리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믿음의 손으로 붙잡으시고 하나님의 부요함속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체우시면서, 우리의 약함을 강하게 하시면서, 우리의 우둔함을 지혜로 체우시면서, 우리를 당신의 부요의 자리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부요의 자리에서 우리를 또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주셔서 어렵고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에게 우리의 부요함을 나누게 하십니다. 그 부요함은 물질적 부요함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 부요함, 영적 풍부함, 기쁨, 만족, 행복, 은혜, 사랑, 이런 것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되어 건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 우리는 그 꿈을 꾸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을 반드시 부요함으로 이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 부요함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평균의 가치도 높아질 것입니다. 많이 나누면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도 그만큼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평균치를 높여나가는데,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