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소통하라 요6:5-7
하나님과 소통 하라 요한6:5-7 11.1.9
금년도 목회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계속해서 제 마음속에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통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금년한해의 목회적 컨셉을 소통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계속해서 이 소통을 위해서 고민하고 또 그 소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기도 할 것입니다.
저는 3가지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먼저는 오늘은 하나님과의 소통이고, 그다음은 사람과의 소통이고 또 하나는 세상과의 소통입니다.
그래서 동경제일교회는 소통하는 교회라는 목회적 비젼을 가지고 여러분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장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가기를 소원합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소통의 부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소통이 막히고 소통이 부제하게 되면 아무리 우리가 선한 생각, 선한말, 그리고 좋은 의견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전달되지 않은 생각은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소통의 부제가 낳은 결과가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인간과 소통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등장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소통을 막아 버렸습니다. 즉 죄가 하나님과의 소통을 막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후 인간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들을 하셨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시기도 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셔서 인간들이 다시 하나님과 소통하기를 간절히 바라셧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계속해서 죄악에서 돌아서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의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라고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는 마지막 방법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 독생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까지 하면서 우리와 소통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와의 소통을 위해서 그렇게 까지 하셨는데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의 대화의 내용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면서도 예수님과 소통하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진단해보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을까를 전하려고 합니다.
1. 소통하지 못하는 자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가 그만 때를 놓쳐서 배고픔에 지켜있는 영혼들을 먹이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양식만을 체워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육적인 양식까지도 체워 주시고 싶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적 나약한 부분을 아십니다. 무엇이 약하고, 무엇이 아프고, 무엇이 상처가 되는지,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도 아십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당신의 말씀을 듣다가 배고픔에 지쳐있는 영혼들을 보시고 그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의 해결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이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생활하시면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읽게 하시고, 예수님의 눈만 보면 예수님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 지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역의 살림을 맞았던 빌립에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가롯유다가 회계라면 빌립은 총무과 같은 역할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진행하게 하는 그런 역할을 제자들에게 각자에게 맡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백성들을 먹이는 사역을 위해서 빌립에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5) 예수님의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떡을 어디서 살까! 였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어느 떡집을 가야지 이 사람들을 다 먹일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각 사람에게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 하리이다”(7) 무슨 말입니까!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어느 떡집이냐! 빌립의 대답은 떡집이 문제가 아니라 돈이 없습니다.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빌립의 대답이 맞지를 않습니다. 결국 빌립은 예수님의 마음을 읽지를 못하고 예수님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한 이 질문이 의도적 질문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제자들이 예수님과 소통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관심과 제자들의 관심이 달랐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같은 자리에 있어도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따로 있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적소통이 끊어졌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반대로만 하는 청개구리와 같은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때는 정말로 몰라서 못하는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알겠는데, 못하겠는 것이 있는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불행해 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은 처음에는 하나님과 소통했던 사람이었는데, 중간에 권력에 대한 집착력이 죄악이 되어서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으로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행한 사람이었고, 불행한 결말을 맞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인생 속에 자꾸만 꼬이고, 힘들어지고, 뭘 해도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분들은 혹시 하나님과의 소통의 관계를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는가! 아니면 막혀있는가! 마치 제자들처럼 다른 이야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그 나라에서 예수님의 좌편에, 우편에서, 좌의정, 우이정의 권력을 얻을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로마병정들에게 붙잡힐 때, 그들은 다 도망했던 것을 봅니다.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지면, 마치 나무가 뿌리로부터 수분을 공급받지 못하는 것과 같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마릅니다. 내 생이 마르기 시작하면 초라해지기 시작합니다. 시편1편에서는 복이 있는 사람은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고 했는데, 복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마르기 시작하면 세상에서 혹 무엇이 잘된다 할지라도 기쁨이 없고 평화가 없고, 모든 것이 다 있는 것 같은데, 뭔가 모를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2. 소통을 시작하라.
그러므로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졌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는 다시 소통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소통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하나님도 아무것도 안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소통을 시도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하시고, 우리의 삶을 만지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지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손길을, 하나님의 터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해야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의 회개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아까 서두에게도 말했지만,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지게 된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죄였습니다. 하나님과 가로막혀 있는 죄의 문제가 소통을 막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에덴에서 출발한 소통의 단절은 “동산의 모든 실과를 다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어긴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어긴 삶의 모습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왜 말씀을 어기게 되었습니까! 마귀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같아질 줄 알고 어긴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교만입니다. 바벨탑이 또한 인간의 교만이었습니다. 감히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과 같아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계속해서 이런 노력을 합니다. 과학의 발달로 인간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피조물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싫어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교만을 회개하고 겸손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회개해야 할 것은 말씀 앞에 게으른 것도 회개해야합니다. 이사야59장7절부터 보면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라고 합니다. 죄를 짖는 데는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 하는 데는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하고 더디고, 결국은 포기해버리는 영적 게으름을 회개해야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고, 말씀을 듣고 순종 하는 일에는 빠르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해야 할 일에는 늦고 더디고, 그리고 피하고, 안해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상숭배의 모습을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이 우상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돈이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으면 돈이 우상이고, 명예가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으면 그것이 우상이고 자식이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으면 자식도 우상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하나님과의 소통을 막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바로 그것을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회개했으면 이제 우리는 새로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중심의 신앙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과 인간의 끊어진 다리를 이어주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짊어지신 고난의 흔적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늘 마음속에 담고 있을 때, 하나님과 영적 소통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하나님과 소통을 위해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통하는 영적 통로입니다. 이 통로가 막히면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른 사람이 됩니다. 올 한해는 기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내시길 바랍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어느 곳에 있든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의 통로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기도한 하나님과 통하는 통로라면 그 통로가 넓으면 넓을수록 좋겠지요. 작년 칠레에 지하 탄광에 메몰 되었던 사람들이 69일 만에 구출되었는데, 그들이 그 지하700m 아래에서 69일씩이나 견딜수 있었던 것은 지상으로 통하는 파이프 통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통로를 통해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했고, 심심하거나 무료하지 않도록 심지어 게임기까지도 공급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통로는 우리를 살리는 소통의 길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많이 읽으시길 바랍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를 알지 못하면 소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이 생각과 계획이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소통을 위해서 성경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가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어집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는다 할지라도 예배를 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소통을 위해서 반드시 예배를 최우선으로 두시길 바랍니다. 예배를 드리되 어떻게 드려야 하겠습니까! 지난주 말씀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신령과 진정이 됩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가짐 입니다. 예배시간10전에는 도착하려는 마음가짐, 예배드리러 올 때는 단정한 몸가짐,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을 정성스럽게 미리 준비하는 마음가짐, 찬양을 부를 때는 마음 중심에서 부르려는 마음가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저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며 아멘으로 받으려는 믿음의 가짐, 그리고 예배자의 마음으로 한 주간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예배자로서의 삶의 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이 되어 집니다.
3. 소통하는 자의 복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에게는 복이 임합니다. 어떤 복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 누군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좋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려주시기도 했고 아브라함의 소원을 들어서 응답하시기도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키실 계획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먼저 그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라고 하셨고 아브라함의 의인50에서부터 시작하여서 의인10명까지의 모든 중보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5: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의 결과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결과입니다. 친구가 된다는것은 서로 소통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광야40년을 모세와 동행하셨던 하나님이 마지막 가나안을 문턱에 두고도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품으로 갈수 있었던 것은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는지를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그 자리에서 하나님 뜻보다는 자신의 꿈과 욕망을 이루려고 했다면 몸부림치고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뜻을 잘 알기에 모세는 조용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소통은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이 어느 곳에 가든지 그 하는 일이 형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는 일인지를 알기 때문에 일의 선택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의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합니다. 어느 상황이 되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신앙의 고백은 어린 다윗에게도 임해서 골리앗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거나 겁내지 않고, “너는 칼과 창으로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로 나아간다”라고 외칠 수 있었고 승리했습니다. 가나안땅을 정탐한 12정탐군들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나머지 10사람의 정탐군이 보고 온 것을 똑같이 보았지만,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스스로보기에도 메뚜기같은 모습을 보았지만,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라고 외칠 만큼 담대함을 가졌던 것을 봅니다. 이런 강하고 담대한 모습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이 갖게 되는 담대함이고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과 소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일을 하십시오. 가정에서의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든.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든, 사업을 하는 일이든, 직장에서의 일이든 하나님과 먼저 소통하시고 그 일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들이 여러분에게 생길 것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변화가 여러분에게 생길 것입니다.
세상일에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고, 세상일에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일에 원망불평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과 소통을 시작하십시오. 회개를 통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기도와 말씀,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을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준비해놓으신 수많은 선물들을 그냥 받게 되어 질 것입니다.
올 한해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신앙적인 소통을 이루셔서 주님의 기쁨의 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