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의 말씀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40:1-2

장경태 2011. 3. 19. 22:09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40:1-2 2011. 3. 20

이번 한주간은 완전히 일상을 잃어 버린것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종일 TV의 재해관련 특집방송이 끊이지 않고 방송되어지고 한국의 뉴스와 인터넷으로 보는 내용들은 우리들의 일상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주중에도 계속되어지는 여진으로 인하여 계속적으로 불안한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그전에는 이정도쯤이야 했던 정도의 지진도 이제는 감각적으로 민감해져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교회도 많은 성도들이 귀국한 상황에 놓여져 있지만 주변의 많은 교회의 성도들도 귀국을 했습니다. 각 나라에서는 자국민을 대피시키느라고 여러 가지 뉴스들이 나오고 있고, 조국에서도 특별기를 띄우기도 하면서 귀국을 돕고 있는 현실들입니다.

지진에서 쓰나미로 그리고 원전의 핵방사능의 피해에 이르기 까지 우리를 정신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몇일 전에는 센다이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이 성도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서 우리교회에서 하루밤을 자고 비행기 값이 너무 비싸서 후꾸오까까지 신간센으로 가서 배타고 부산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도와드렸습니다. 그분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우리가 TV에서 보았던 것 보다 훨씬 더했었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한국교단의 본부에서도 해피나우 라는 NGO단체에서 방문을 해서 교단적차원의 비상대책위원을 구성을 해서 동북지역의 교회와 지역민들을 돕기 위한 회의를 지난주간에 밤늦게까지 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번기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보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면서 희망을 잃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럴 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이런 일을 겪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부응하면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1. 이 백성을 위로하라.

1700년대에 뛰어난 음악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돈을 들여 음악회를 열었는데 계속 실패만 했습니다. 많은 빚을 지게 되었으며 실의와 좌절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두꺼운 책 한 권을 내밀며 격려하면서 “이 책을 읽고 다시 작곡해 보게, 이 말씀의 주인이 자네를 다시 일으켜 줄 것일세!” 음악가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에 깊이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말씀 속에서 놀라우신 분을 발견하고 그분을 주제로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24일간 침식을 잊은 채 작곡에 몰두함으로 탄생한 곡이 바로 헨델의“메시야”입니다. 메시야 곡의 첫 부분이“너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3)로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함으로 나라와 민족과 가정도 무너진 가운데 70년의 기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할 것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 때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이‘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위로자이십니다. 범죄하고 숨어있던 아담에게 찾아가시어 위로하시고 다시 은혜를 주셨으며(창3:8-9, 21). 하나뿐인 조카 롯의 가족이 떠남으로 힘들고 지쳐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소망을 주신 것처럼(창13:14-17). 죄악 중에 눌린 자, 환난과 근심으로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십니다.

지금 일본에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자입니다. 누가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 고통을 경험해본 사람이 위로자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위로자가 되어주지를 못합니다.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위로는 오히려 상처가 되어 집니다. 참된 위로자는 그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겪어본 사람, 그리고 그 고통을 이겨낸 사람이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민족의 위로자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도 바로 그 고통을 맛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죄악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는 일을 감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 입니다. 전능자가 인계를 가진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예수로 오셔서 어떠셨습니까! 온간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능력으로 하면 모든 사람들을 한손에 쓸어 버릴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손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온갖 누명과 억울함을 뒤집어 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십자가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눈물과 한숨과, 외로움과 힘겨워하는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지금 일본이 당하고 있는 이 슬픔과 아픔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인터넷을 보다 보니까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지금 일본이 당한 재난의 현장을 위로해주는 한 장의 사진인데, 아프칸의 버미얀 에 사는 가난한 아이들이 현수막을 들고 찍어서 보낸 사진입니다. 그 현수막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어려움에 있는 일본사람들을 도울 만큼 부자입니다" 그들은 가난을 알고 배고픔을 아는 아이들입니다. 일본의 피난소에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그리고 언제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 가난한 아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그 문구가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위로자는 돈이 많은 사람도 아이요, 힘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조그마하고 힘이 없는 어린아이의 말한마디에도 위로가 되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힘없고, 가난하고, 조그마한 어린아이로도 위로가 되어진다면, 우리의 하나님은 얼마나 큰 위로자가 되어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슬픔을 당한 이민족위에 위로자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분은 설교의 제목을 길게 잡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어느주일 설교를 준비하는데, 시편23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잡으려고 하는데, 도무지 제목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고민 고민을 하다가 그냥 이번에는 “여호와는 나의목자시니” 라는 비교적 짧은 제목을 삼았습니다. 그리고는 주보를 인쇄하는 인쇄소에 원고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인쇄소의 사장이 전화가 왔습니다. 왜냐하면 제목이 평소와 다르게 너무 짧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뭔가 빠진것 같다 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한것입니다. “목사님 설교제목이 이거 맞습니까! 뭔가 빠진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인쇄소 사장이 전화를 끊고 다 주일 주보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주보를 보면서 목사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설교는 대단히 은혜로웠습니다. 그것은 주보에 인쇄된 설교의 제목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가 목자가 되어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위로자가 되어주시면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위로자가 되어주시는 것처럼, 오늘 고통을 당한 동북지역의 모든 재난당한 이들에게도 위로자가 되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2. 정다이 말하라.

2절에 보면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라고 합니다. 이말씀을 일본에 성경에서는 “エルサレムの心に語りかけ"라고 합니다. 무슨말입니까! 정말로 마음에 위로가 되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위로를 한다고 하는데, 엉뚱한 말을 한다면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언제 하느냐에 따라서 그말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상처가 되기도 하고, 그 상처는 오히려 분노가 되어서 돌아올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한마디라도 신중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지금 일본 사람들에 가장 민감한 말은 지진, 쓰나미, 라는 말입니다. 더욱이 지진과 쓰나미로 가족을 잃고 아픔을 당한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이말을 가지고 교회에서 영적인 지진과 축복의 쓰나미가 몰려오게 하자! 라고 한다면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그말이 축복으로 들리겠습니까! 그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조심해야 할것입니다. 지진과 쓰나미 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리고 온몸이 떨려오는 사람에게는 그런말을 써서는 안됩니다. 물론 이런 말들이 평상시에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입니다. 그런말을 우리도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일본이 당한 일들을 하나님의 재앙이다, 우상을 섬겨서 그렇다.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다! 지금 한국에서는 일본이 당한 이 재난을 두고 그런식으로 이야기하는 크리스찬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압니다. 그러나 지금 고난을 당해서 슬픔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면 그것은 상처요, 분노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에서도 비록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인하여 그런 결과를 얻었다 할지라도 지금 상처와 아픔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다이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고통은 끝이 났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처를 입고 고통하는 자식들을 감싸 안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울고 있는 자식을 때리는 부모는 잘못된 부모인 것입니다. 참된 부모는 울고 있는 자식,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식에게는 매가 아니라 감싸안으시고 품어주시는 사랑의 행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잘압니다. 어느집에 아들둘이 있었는데, 첫째아들은 성실하고 아버지의 말을 잘듣고 열심히 일을 하는 타입이었고, 둘째 아들은 놀기를 좋아하고 방탕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유산으로 받아가지고는 멀리 외국에 나가서 방탕하면서 다 써버렸습니다. 아들은 이제 먹을것도 없어서 돼지가 먹는 것을 먹으면서 후회를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아버지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아들로서가 아니라 아버지 집의 종으로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이미 스스로도 아들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아버지는 어떠했습니까! 아들이 나간 날부터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문을 열어놓고 아들나간쪽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있는 큰 아들은 마음에 안들었습니다. 뭐 잘한것이 있다고, 방탕한 그놈을 저렇게 기다리는가! 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집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부터 아들의 모습을 먼저 발견했습니다. 아들은 이미 집떠날때의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몇일을 못 씻었는지 머리는 흩어지고, 몸에서는 냄새가 나고,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분명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달려 나가서 끌어앉고 잘왔다, 돌아올줄 알았다, 하면서 목욕시켜주고, 새옷입혀주고, 새신발 신켜주고, 반지끼워주면서 잔치를 벌려주었습니다. 마침 밭에 일을 나갔던 큰아들이 집에서 음식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보고 사정을 알아보니 동생이 돌아온것입니다. 큰아들은 불평했습니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큰아들은 왜 그랬을까요! 그가 행동한 행동만 본것입니다. 그가 자신과 같은 핏줄 형제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요! 둘다 내 아들입니다. 둘다 사랑하는 자식인 것입니다. 부모마음에서는 오히려 집에서 잘있는 자식보다 속썩이는 자식이 더 마음이 아프고 끌리고 도우려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그들이 행한 행동만 보고 있으면 별의 별 말을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된 우리는 바로 일본의 영혼들이 우리와 같은 형제라는 사실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둔 사랑해야할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 눈으로 보면 진심어린 말로, "心に語りかけることば"로 위로해야 합니다.

지금은 사랑을 이야기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이야기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마음을 그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전달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라기는 우리교회도 물론 그들을 돕기 위한 구제헌금을 시작하겠지만 상황을 만들어서라도 동북지역의 복구를 돕기 위해서 직접 찾아가서 도울 수 있는 그런 시간들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럴 때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국의 한류스타라고 하는 많은 이들이 엄청난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 기부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감동을 얻는다고 합니다. 한류스타들은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마땅히 기부를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럴 때 보여주는 그들의 진심이 그들을 좋아했던 그 마음을 배반하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3. 위로의 말.

오늘 성경은 정다이 무엇을 말하라고 합니까! “그 복역의 때가 끝나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무슨말입니까! 이제 다 끝이 났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끝이 났다는 것입니까! 고난이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이 결국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은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끝이 나고 회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이라는 것입니다. 즉 회복과 희망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끝이 없어 보이는 고통과 고난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이제는 이 고생도 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위로가 되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지진으로 시작된 재난이 쓰나미로 이어지고 후에는 원전의 방사능으로 이어지고, 수많은 사체들로 인하여 전염병으로 이어지는 작금의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치료하시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민족을 회복 시켜주실 일이 남아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 후쿠시마의 원자력발전소의 전원복구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 복구작업의 여부가 이후의 사태가 안정되느냐 그렇게 않고 폭발을 하느냐의 갈림길에 있는에 이 중요한 프로젝트의 리더를 담당하고 있는 분이 “사또우 나오요시” 라는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후쿠시마 제일성서침례교회의 성도라고 하는데 이분을 위해서 기도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 중요한 일의 러더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통해서 하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땅을 복음으로 치료하시길 원하십니다. 수많은 국제 구호단체에서 활동이 시작되는데, 상당히 많은 NGO단체들이 기독교계통의 단체들입니다. 그들이 말없이 몸으로 보여주는 전도활동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할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소속되어 있는 한국교단에서도 지난 주간에 해피나우 라는 NGO단체가 와서 앞으로 구호활동을 활발하게 펼칠것인데, 저도 어느정도의 역할을 해야 할것 같습니다. 동참하실 성도님들은 필요할 때 힘을 합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재난의 때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고통을 끝내시고 회복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통해서 이민족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위로자이십니다. 슬픔을 당하고 고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들고 괴로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위로자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어루만지시면 우리는 위로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속에, 사업속에, 힘드신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임하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 아직도 여진으로 두려움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원전의 파괴로 인하여 발생되는 방사능의 피해에 대한 두려움속에 있는 이땅의 모든 사람들, 무엇보다도 지금 동북지역에서 가족을 잃고 친지를 잃고 모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춥고 배고픔속에서 대피소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땅의 수많은 영혼들, 피난길을 찾아서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그저 발걸음을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정처없는 영혼들위에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임하시길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지금도 원전의 전력을 연결하는 중요한 일을 감당하고 있는 목숨걸고 이나라를 건지겠다는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 함께 이땅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우리 다함께 주여!를 세 번 외치고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