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길 마태20:17-19 08,3,9
우리가 흔히 맡는 냄새를 보면 방귀와 장미는 서로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전혀 안그럴 것 같은데 방귀와 장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는 같은 성분이라고 합니다. 방귀와 장미의 냄새에는 인돌 이라는 화학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 인돌은 불쾌한 냄새가 나며 스카톨이라는 독한 냄새를 내는 성분으로 인해서 대변의 독한 냄새의 원인이 되는데, 그런데 이 화학성분이 순수한 상태나 미량인 경우는 꽃과 같은 향기로운 향기가 난다고 합니다. 참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똑같은 냄새인데, 그 농도에 따라서 맡기 싫은 독한 냄새가 되기도 하고 한번이라도 더 맡고 싶은 향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무엇이든지 적당하면 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도 해주지만 지나치면 사람의 코를 찡그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편안하고, 또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당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도가 지나치게 되면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어떤 때는 분을 내게 만들고, 그 분을 조절하지 못하면 엉뚱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무엇에든지 적당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금이 아무리 좋다할지라도 적당하게 쳐져 있어야 맛을 내지, 너무 많이 치면 먹을 수가 없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일들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이 사순절에 우리들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는 것을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해야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일을 해도 적당하게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6일을 일을 했으면 안식일은 쉴 수 있어야 합니다. 전에 어떤 보험회사 CM 멘트 중에 기억이 남는 것이 있는데, “頑張りすぎない勇気”라는 멘트가 있었습니다. 너무 지나치지 않게 하는 용기라는 말입니다. 적당하게 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욕심이 날 때,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야지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제자들이 보여준 반응의 내용입니다.
1. 오해의 길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이야기를 듣자 마자 제자들이 보여준 반응인데, 먼저는 세베대의 어머니즉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오늘 예수님 앞에 와서 절하며 하는 말입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0,21)
무슨 말입니까! 그동안 자기 자식들이 가족도 버리고 갑자기 나타난 예수라는 사람을 쫓아다니기 시작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늘 믿고 있었던 어머니이기에 저 아이들이 뭔가 생각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자식들이 하는 일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하시는 일들을 늘 지켜보면서 어머니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역시 우리 아이들의 선택이 옮았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가끔씩 집에 와서 하는 말이 이분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둥,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분이라는 둥, 아마도 이런 이야기들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예수님의 그동안 행하셧던 수많은 기적들과 그분이 말씀하시는 내용들을 생각해보면 아들들의 말이 맞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기회는 이때다 라고 생각하시고 예수님께 찾아와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여러분 어떻습니까! 오해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마저도 이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무조건 잘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렇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많은 사람들이 힘겹고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기도 중에 응답을 받아서 그동안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이 일나기도 합니다.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나눠드린 사순절 묵상집 27일째 묵상에 보면 1979년 9월 6일 미스 아메리카 선발 대회에서 1등으로 당선된 세릴 프레위트양의 간증이 나와 있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왼쪽다리를 다쳤고, 결국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상처는 아물었지만 발육이 정지되어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2인치나 짧아지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그녀의 뛰어난 용모를 아까워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974년 10월21일 그녀는 미시시피주의 잭슨시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하였고, 그 날 강사로부터 신유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300여명의 참석자가운데 썩여서 하나님께 자신의 다리를 낫게 해달라고 전심으로 기도를 했을 때, 갑자기 자신의 왼쪽 다리가 쭉쭉 늘어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일어나 걸어보니, 자신의 짧았던 다리가 늘어나서 오른쪽 다리와 똑같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52대 미스 아메리카로 당선되면서 그녀는 하나님이 자신을 고쳐주셨다고 간증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물론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고쳐주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하실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축복을 해주어서 하나님을 살아 계심을 알게 하시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망하게 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능력을 많이 행했던 바울에게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면서 치료를 거부 하실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 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일날 목사님께 와서 목사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이 기도해주어서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하는 말이 그런 말하지 마셔요, 내가 우리교회 대학입시를 두고 있는 모든 학생들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다른 누구는 떨어졌어요! 라고 대답했답니다. 똑같이 목사가 기도했는데, 어떤 아이는 대학에 붙고, 어떤 아이는 떨어졌습니다. 목사의 기도의 효염이 어떻습니까! 그러므로 목사님이 기도하면 다된다! 라는 오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기도하는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얼마나 그 기도에 맡게 성실하게 살았는가도 문제입니다. 기도만 열심히 하고 공부를 안 하는 학생의 기도는 응답을 해줄래도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어도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 믿어도 고통스러운 일이 더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 썩어질 것은 그렇게 없어질 수 있지만, 예수 믿는 우리에게 영혼이 구원되어지고,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겨워도 마음의 평강을 주셔서 그런 일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길 수 있고, 환난가운데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고, 무엇보다도 이 땅의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고, 욕심나지 않을수 있는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에 대한 편안함이 우리에게 주어지기에 예수님을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부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잘 살기 위함이고, 성공하기 위함이 아니라, 승리하기 위함이고, 소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눠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고 할때 제자들이 미쳐 마음속에 듣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2. 고난의 길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18,19上) 주님은 제자들에게 고난받을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귀담아 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들 자리싸움이나 하는 엉뚱한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제자들로부터의 배신과 배반을 받아야 하고, 대제사장, 서기관들의 손의 의해서 세상법정으로 넘겨지게 되고, 그리고 능욕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미리 예견하시고 말씀을 하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고통을 감당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물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마7:13-14)에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좁은 길, 좁은 문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도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다 이런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은 바로 이런 길을 걸어야 합니다. 소유하는 것 보다 나눠주는 것은 힘들 일입니다. 버는 것 보다 쓰는 일은 힘이 드는 일입니다. 섬김을 받은 것 보다 섬기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남을 용서해주는 것, 용납해주는 것, 이해해 주는 것, 오해를 받고도 참고 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정말로 결단 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누명을 쓰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러면서도 한마디 변명도 안 하시고, 그 길을 다 걸어가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53장에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다음을 입었도다”(사53:5) 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생각하기를 “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나 때문인데, 우리는 말하기를 그가 무슨 죄를 지었은가! 하면서 상대방의 죄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어머니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식들이 잘못되고, 못된 일을 했을 때, 그래서 그 사실 때문에 경찰에 잡혔을 때, 경찰관을 붙잡고 제발 놓아달라고 합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합니다. 내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부모가 아이들만 집에 놔두고 일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아이들이 가스를 잘못 건드려서 그 집이 다 불타버리고 또 아이들까지도 화염에 휩싸여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는 그 어머니가 달려와서 울면서 통곡하면서 내가 잘못했다, 내가 너를 죽였다! 라고 통곡을 합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있던 경찰이 그 부모를 체포했습니다. 내가 너를 죽였다고 한 그 말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때 당황한 부모는 아무리 그 말이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때에 한국변호사가 한국인의 정서에 대해서 변호를 하여서 그 어머니가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는 모든 문제를 자기 탓이라고 합니다. 내가 잘못 가르켜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입니다.
여러분 잘못은 내가 했는데, 죄는 주님이 대신 받았습니다. 채칙을 대신 받았습니다.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미를 잘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고난의 길을 걷는 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안 믿었으면 내 마음대로 했을 것을 지금은 예수 믿기 때문에 참고, 견디고, 용서해주고, 이해해주고, 용납해주고, 속아주는 것입니다. 모르고 당하는 것 아니라 알고도 당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가 알고도 당해주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겸손하게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승리하는 삶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알지 못했던 예루살렘의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3. 영광의 길
그런데 제자들이 또 하나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삼일에 살아나리라.”(19下)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죽음이 죽음에서 끝나지 않고 그 다음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다 도망을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제자들은 믿지를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수 있는가! 하면서 의심을 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제자들이 의식하지 못한 사실 은 예루살렘의 길은 바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다는 그 영광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고난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고난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끝이 난다면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만 언제나 이야기하고 그런 것을 우리는 참아야 한다고만 이야기한다면 어느 누구도 예수 믿고 싶은 생각이 안들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이야기 하지만 우리의 십자가에는 주님이 여전히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내려오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십자가는 부활을 이야기 해주는 영광스러운 심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국에 가서 어느 교회에서 선교보고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 목사님이 일본선교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야기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일본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강단에 엎드려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사역하면서 어려웠던 일들을 한가지씩 정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속에 들리는 한소리가 있었습니다. “야! 장 목사야 너 정말 그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내!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목소리가 슬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들리는 소리가 그럼! 내가 그동안 너에게 준 은혜는 무엇이냐! 하면서 외 은혜는 이야기 안하고 힘들고 어려웠던 것만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단에 올라가서 그동안 하나님이 은혜 주셨던 것들을 아주 신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날 참석했던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고난보다도 더큰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보다도 우리가 힘들어한 고난보다 더큰 은혜로 우리를 감싸시고 우리에게 힘주시고, 능력 주셔서 그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고, 뛰어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말해야 합니다. 이것을 간증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어도 우리는 그모든 것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그 부활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 그래서 능히 감당했던 일들, 기뻐했던 일들, 행복했던 일들, 평안을 얻었던 일들, 승리했던 일들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광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시려고 하는 예루살렘의 길은 바로 그 영광의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을 오해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는 우리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는 사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고난에서 죽음에서 머물지 않고 부활의 영광의 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은 과정이 겁나지 않습니다. 승리를 아는 사람은 지금 지고 있다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역전된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사람은 두렵거나 겁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예루살렘의 길을 주님과 함께 담대하게 한 걸음씩 들어갈 수 있게 되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이 한 주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주님과 걸어가는 예루살렘의 길이 견고한 발걸음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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