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원하는자 마가복음3:13-19 08.11.9
선데이 포스트지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목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목사 초빙위원회는 그 교회에 목사로 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검토하면서 고르고 있었습니다. 목사 초빙위원회는 서기가 지망하는 목사들의 지원서를 하나 하나 읽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지망하는 목사들은 한 사람만 빼놓고는 모두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신사들처럼 보였습니다. 이들은 아주 훌륭한 웅변가들이었고, 정력적인 목회자들이었고 그리고 회중들의 신앙을 부흥시킬 수 있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자기 소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대개 큰 도시들 안에 있는 많은 작은 교회에서 목회 했습니다. 그러나 한 교회에서 삼 년 이상 목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책을 저술한 저자로서 약간 성공했습니다. 내가 목회 하던 교회의 재직들과 나와의 관계는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교회의 재직들은 나를 협박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평화를 깨뜨렸다는 죄목으로 서너 차례 투옥된 적이 있습니다. 나이는 50세가 넘었습니다. 건강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닙니다. 기억력도 좋치 않습니다. 내가 세례 준 사람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 목사로 초빙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목사 초빙위원회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런 건강도 좋치 않고, 말썽꾸러기이고, 기억력도 좋치 않고, 감옥을 제집 안방 드나들 듯이 하는 사람을 목사로 초빙해야 하다니?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목사인가?" 서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울이라고 합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어떤 교회에 목사로 가기 위하여 그의 지원서를 썼다면 이와 같이 썼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하기에 적합한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그의 몸에 찌르는 가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몸에 있는 가시 때문에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 주님이 원하시는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특이한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데 13절에 보면 "자기의 원 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데 주님이 원하시는 자들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1. 예수님이 원하시던 자들
예수님이 원해서 불렀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한결같은 공통점은 모두들 세상에서 천한 대접을 받으면서 지냈던 인물들이라는 점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대부분의 제자들이 어부출신이었고, 마태는 사람들이 천하게 손가락질하던 세리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이들을 원했을까요!
좀 똑똑하고 돈도 있고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면 안되었습니까? 그러면 좀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제자들을 원했을까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이 아니 하도다" 그러면서 택하신 자들의 종류를 말씀하시는데,"미련한자, 세상에서 약한 자,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 하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세상에서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있고, 또 많은 경험이 있는 다양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찾으셨던 인물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인들을 찾았습니다. 누가복음 5장31-32"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또한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원했던 인물들은 이 땅의 죄인들과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로 가득 찬 영혼들을 주님은 원했던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는 고백이 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짐" 때문에 마음이 괴로워서 어찌할 바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까? 늘 아프고, 피곤함으로 지친 영혼이 있습니까? 늘 무엇엔 가 쫓기는 영혼의 상태에 있는 분이 있습니까? 세상을 바로 살고 싶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때문에 늘 어쩔 수 없이 무너지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마음의 평안을 잊어버리고 늘 불안과 눈물과 한숨 속에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분들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주님 앞에 무릎 꾾고 겸손하게 주를 바라보는 모든 이 들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따라 오너라 하면, 즉시 자기의 그물과 배를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세상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있는 영혼들을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처럼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나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 들여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모시고, 주님을 따라 나설 수 있는 영혼들을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불러 주신 것입니다.
2. 무엇을 위해서 부르셨습니까?
14,15절에 보면 "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쫒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함이러라"
주님이 이런 이들을 불러서 하시고 싶으셨던 일은
첫째로 자기와 함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애착을 가지고 바라본 한 가정이 있는데, 곧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이 형제들입니다. 한날은 예수님이 이 가정에 심방을 가셨는데,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 것 때문에 음식을 만드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딱 달라붙어서 예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때에 언니가 예수님께 부탁을 합니다. 마리아도 좀 보내주셔서 나와 함께 일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눅10:41,42 "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언제까지나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마28:20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시간이 쉬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시간이 위로 받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시간이 새 힘을 얻는 시간입니다.
어느 해 가을, 지방의 한 교도소에서 재소자 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다른 때와는 달리 20년 이상 복역한 수인들은 물론 모범수의 가족까지 초청된 특별행사였습니다. 운동회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운동장 가득 울려퍼졌습니다. '본인은 아무쪼록 오늘 이 행사가 탈 없이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오랫동안 가족과 격리됐던 재소자들에게도,
무덤보다 더 깊은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살아온 가족들에게도 그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미 지난 며칠간 예선을 치른 구기종목의 결승전을 시작으로 각 취업장 별 각축전과 열띤 응원전이 벌어졌습니다.
달리기를 할 때도 줄다리기를 할 때도 얼마나 열심인지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를 방불케 했습니다.
여기 저기서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잘한다. 내 아들… 이겨라! 이겨라!' '여보, 힘내요… 힘내!'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부모님을 등에 업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 효도관광 달리기 대회였습니다. 그런데 참가자들이 하나 둘 출발선상에 모이면서 한껏 고조됐던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푸른 수의를 입은 선수들이 그 쓸쓸한 등을 부모님 앞에 내밀었고 마침내 출발신호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달리는 주자를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들의 눈물을 훔쳐 주느라 당신 눈가의 눈물을 닦지 못하는 어머니… 아들의 축 처진 등이 안쓰러워 차마 업히지 못하는 아버지……. 교도소 운동장은 이내 울음바다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니, 서로가 골인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듯한 이상한 경주였습니다. 그것은 결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의 레이스였습니다. 그들은 원한 건 1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함께 있는 시간을 단 1초라도 연장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죄수들은 부모님을 엎고 있는 그 시간이 감옥에서 몇 년을 있으면서 교화된 것보다도 더 깊은 교화의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그리 바쁘십니까? 주님 떠나서 바쁜 것은 우리의 영혼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주님과 일분이라도 더 오래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이어야 합니다. 주님과 오래 있으면 있는 만큼 우리의 영은 풍부해집니다.
두 번째로 부르신 이유는 복음의 전도를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을 선교사로 부르십니다. 이 땅에 내가 예수님의 만나기 전에 고통스러워했던, 그 고통을, 그 눈물을, 그 한숨을, 그 아픔을 가진 영혼들, 갈 길을 알지 못해서 좌, 우로 헤메이는 많은 이들에게 참된 진리를 찾아서 헤메이는 많은 이들에게 내가 만난 예수를, 내가 받은 그 구원을 전해주기 위한 전도자로 부르십니다. 그 전도자로서의 출발을 우리의 연약함에 두지 않으시고, 귀신을 쫒아 내고, 병을 낮게 하는 하늘의 능력을 주어서 담대하고, 강하고, 능력 있게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강하게 전파할 일꾼으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인물들로 주님은 열 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여러분을 또한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들은 이미 이런 사명을 짊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에 상관없이, 우리의 없음에 상관없이, 우리의 부족함에 상관없이, 주님은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이 일본에 있는 모든 영혼을 구원할 복음의 전도자로, 이 땅의 많은 한인들을 구원한 전도자로 주님은 동경제일교회를 베이스로 해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먼저는 주님과 함께 있기를 즐겨하면서, 또한 일터에서는 복음의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3. 부르신 제자들의 이름
16절에서 19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제자들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별명들이 주어졌습니다. 16절에 보면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시고, 17절에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들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시고,
그들에게 별명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어진 별명을 보면 베드로란 이름은 시몬의 신앙고백 즉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신앙고백 후에 예수님이 지어주신 별명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 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뜻의 그들의 성격을 보고 지어준 별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보아너게"라는 이름은 얼마나 불려집니까? 거의 불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란 이름은 얼마나 많이 불려집니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영예로운 별명이 붙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신앙을 빛낼 좋은 별명들이 붙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었듯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듯이 그리고 사울이 "바울"로 바뀌었듯이 여러분에게도 신앙의 좋은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불려져서는 안될 이름이 있는데, 19절에"또 가롯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자러라" 가룻유다의 이름입니다. 예수를 판자의 이름, 배신자의 이름, 영원히 저주받을 그 이름으로는 절대로 남겨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주님께 부름을 받은 성도들인데, 우리의 이름들이 이름다운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어져야 합니다.
일본의 여류작가 ‘미우라 아야꼬’라는 분은 남편과 참 뜻이 잘 맞는 부부였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의 벌이가 적어서 가게를 차렸는데 이 가게가 너무나 잘됩니다. 그러니까 주변에 있는 가게들이 모두 죽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우리 집 가게 잘되는 것 좋은데 이웃집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으니 걱정이구려” 그 말을 듣자 그 아내는 다음날부터 물건을 줄이고, 없는 물건은 이웃 가게로 손님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의 여유가 생기게 되자 그때부터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해서 탄생된 책이‘빙점’입니다. '미우라 야야코' 라는 이름은 괜히 유명해진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아주 이상적인 부부를 말할 때 부르스길라와 아굴라를 말합니다. 아주 뜻이 잘 맞는 신앙의 부부였습니다. 그 부부는 언제나 함께 다니며 전도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제일가는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신앙이 훌륭한 어느 한쪽의 이름만이 나오는 것이 많은데, 그런데 이 부부는 언제나 이름이 나올 때는 언제나 부부의 이름이 같이 불려지는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같이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전도하고, 교회에 봉사하며 주의 종을 섬겼습니다.
우리교회는 부부들이 많은데, 바로 이런 부부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시기를 바랍니다.
동경제일교회 어느 집사님 한면" 아! 그 천사 집사님" "아! 그 부르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집사님부부" 사람들에게 이런 이름으로 기억되어야하고 또 불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여러분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많이 가져서도 아닙니다. 많이 배워서도 아닙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힘들고, 지치고,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긍휼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긍휼을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안될 사람들이기에 주님이 여러분을 원하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너무 사랑하시기에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 안에서 안식하시길 바랍니다. 혼자서 뭔가 해보려고 애쓰지 말고, 혼자서 몸부림치지 말고, 혼자서 괴로워하지 말고, 혼자서 울지 말고, 주님 앞에 오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새롭게 힘을 얻어서 이 땅에 우리같이 지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울고 있는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가십시다. 그들을 일으켜 세울 능력으로 나아가십시다. 주님께서 더해주시는 좋은 이름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우리 나아가십시다. 놀라운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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