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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소통하라 눅19:1-10

사람과 소통하라.

누가19:1-10 11.1.16

지난주에 이어서 소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지난주는 하나님과 소통하라는 제목이었고 오늘은 사람과 소통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한국교회사에 보면 여성들의 인권을 가장 중요하게 다룬 곳이 바로 교회라고 합니다. 한국 초대교회 때 미국의 선교사들은 한국여성들에 대해서 대단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여성들을 위한 교육기관들을 만들기도 하면서 여성들이 깨어나는 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중에서 관심을 갖은 부분이 여성들의 이름을 교회에서 불어주었답니다. 당시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불려지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댁의 이름으로, 누구의 엄마의 이름으로 살아갔습니다.

그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갖게 되면 이름이 없어집니다. 평생을 누구엄마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에 갔더니 그 여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서는 누구의 엄마로 불려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아담을 통해서 모든 만물들에게 이름을 짖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이름 없는 것은 없답니다. 들판에 있는 수많은 들풀들도 다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 이름을 모를 뿐이지 이름 없는 꽃은 없다고 합니다.

이름이 불려지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누구였지! 라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불려졌던 그 이름을 통해서 존재의식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삭개오”라는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도 이름을 불러주어야 합니다. 누구의 엄마로서가 아니라 누구의 아빠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날 때 지어주셨던 이름을 우리는 불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소통의 시작입니다.

1. 소통하지 못했던 사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라는 인물은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했던 인물입니다.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의 직업 중에서 가장 못된 일중에 하나였습니다. 당시에는 이 세리를 허가받은 도둑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는데, 로마에서는 이스라엘을 감성적으로 직접에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꿋은 일은 현지인들을 고용해서 하곤 했습니다. 그 대신에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눈감아주었던 것입니다.

그 일이 바로 세금을 거두어드리는 일인데, 세리들은 대부분이 로마에 보낼 돈의 몇 배가 되는 돈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로마에 내고 나머지는 자신이 착복을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일을 하려면 사람들하고 연을 다 끊어놓을 작정을 해야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삭개오의 인생철학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에게는 신체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자랐습니다. 선천적인 난장이였을 것 이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시선 자체가 늘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소극적인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세리의 일을 선택했고 그 일에 충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에 충실하면 할수록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욱 힘이 들어지고, 결국 모든 대인관계가 무너졌고, 겨우 그와 통할 수 있는 것은 몇몇 같은 세리 중에서도 자신의 세무서에서 일을 하는 사람 몇이 다 일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름대로 성공을해서 세리장에 오르기 까지 했지만 그는 외롭기 그지없었습니다.

정말로 그는 내세울만한 것이 부자인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불쌍하고 초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났더니 외로움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달려올 때는 몰랐는데, 사람들의 피눈물을 보면서도,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수근대는 소리에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던 그였는데,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그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모든 소통이 끊어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그는 집단 이지매를 당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 이지매에서 벗어나려고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더욱 외로움에 빠졌던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에 대한 소문들을 듣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분이시고, 그분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사람도 따뜻하게 만나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심지어 그분의 제자중에는 자신과 같은 세리출신인 마태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정도의 사람이라면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분이 자신을 만나줄지! 꿈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님이 오늘 자신의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로 달려 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삭개오를 위해서 자리를 내어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오늘 반드시 예수님을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눈앞에 있는 뽕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만큼 외로웠던 사람이었습니다.

2. 소통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오늘 소통하지 못하고 살았던 삭개오와 소통을 시작합니다.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었습니다. 언제 누가 삭개오의 제대로된 이름을 불러주었겠습니까! 어릴적 부모가 불러주었던 이름, 그리고 사무적으로 불리는 이름 말고는 거의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았었습니다. 반역자, 못된놈, 나쁜놈, 주로 이런 수식어로만 불려졌던 삭개오의 이름을 오늘 예수님은 불러주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얼마 만에 들어보는 자신의 이름입니까! 더군다나 지금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다 받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이 관심거리인데, 그분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 졌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그는 그동안 쌓여있던 모든 아픔과 슬픔과 그리고 분노와 외로움이 다 달아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삭개오와 소통하셨습니다. 그에게 말을 걸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 삭개오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경사가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삭개오의 집에 방문하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혀 없었겠습니까! 있다고 한다면 뭔가의 청탁을 위한 사람들이야 있었겠지요. 그 외의 목적으로는 어느 사람도 그의 집에 가려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는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집은 얼마나 멋있게 꾸며놓고, 화려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쓸쓸한 집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정신없이 내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과 함께 집에 가자 마자 난리가 납니다. 잔치를 벌리고 야단법석을 떱니다. 얼떨결에 평생 죄인의 집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던 제자들까지도 그의 집에 들어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났다고 몰려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장면을 잘 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장면이 어떻게 해서 연출되었습니까! 그것은 삭개오의 용기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그분의 인자하심과,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죄인들을 가까이하시는 그 모습, 삭개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대해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으십니까!

성경은 예수님께 대해서 이렇게 설명해주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4:18)라고 합니다. 즉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포로된자에게 자유를 눈먼자를 보게 하고 눌린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의 사역이 여러분의 삶과 관계가 없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얼마나 눌리고 찌들리고 힘들어합니까! 그런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면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삭개오는 바로 그런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회를 잡았습니다. 여러분 기회는 자주오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자신의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삭개오는 두번 다시 올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보라 지금이 은혜의 때와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합니다. 기회는 내일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옵니다. 지금 하나님앞에 예배하는 이시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기회일수 있습니다.

이 기회를 삭개오는 잡았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앞으로 나가지 못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나무위에 라도 올라갔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기회를 잡아야합니다. 소통하고 싶은 마음은 늘 있지만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하면 영영 소통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소통의 기회는 오늘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오늘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됩니다. 기회를 놓치면 참 괴롭습니다. 지난주 아내와 사사로운 일로 감정대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서는 화해를 하고 싶은데, 그놈의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습니다. 결국 소통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하루가 얼마나 괴롭던지요, 그런데 다시 기회를 잡았습니다. 마침 목회자들 기도회가 있어서 기도회를 참석하고 한참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다시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좋던지요.

여러분 무엇이 소통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자존심입니다. 만약에 각개오가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웠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명색이 세무서장입니다. 나름대로 무게를 잡을 수 있는 위치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 하는 것도 알기에 일부러 싫어하는 자리에 가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오늘은 그것을 다 잊어버립니다.

그리고는 나무위로 올라가는 용기를 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용기 있는 모습을 예수님은 멀리서부터 다 보고 계셨습니다.

삭개오의 몸부림은 사람들 뒤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람들 뒤에서 일어나는 그 일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먼저 보시고 나무 밑에 일부러 스셔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내면의 용기를 보십니다.

소통을 위해서 내가 먼저 움직이려고 하는 그 움직임을 먼저 보십니다.

아무리 삭개오가 상처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했어도 그가 집에 있었다면 예수님이 그의 집을 찾아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받고, 외로운 사람도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소통을 위한 움직임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도 그런 우리의 몸부림을 보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3. 소통하게 된 사람.

오늘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셔드렸던 사람 삭개오, 사람들과 소통이 단절되었던 삭개오, 늘 이지매와 따돌림 속에서 외로워했던 삭개오, 그가 예수님과 소통을 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람들과 소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재산의 반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억지로 빼앗은 것은 4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로보고 있었던 사람 중에 가장 기뻐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주 아주 기뻐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다 이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란 사람은 누구일까요! 함께 구경하던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평생 돈밖에 몰랐던 사람이 그것을 내어놓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삭개오를 그렇게 인간취급안하고 미워했던 것은 돈밖에 모르는 그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피눈물을 짜내는 그런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변한 모습에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엇이 회복되었습니까!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복이 소유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 삭개오의 복은 나눔에서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것이 소비되어지고, 없어지는 것을 통해서 그는 소통의 복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 복입니까! 이제부터 그는 사람들과 인사하기 시작했고, 사람들도 그를 인정해주고 이웃으로 받아주게 되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저는 삭개오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라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막혀졌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그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바로 이 사람들과의 소통이 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교회의 모습을 보면 바로 이 사람과의 소통의 부분이 약한 것을 보게 됩니다. 얼굴을 알지만 이름을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엄마로 불려 집니다. 누구의 아빠로 불려지고 어디 사는 분으로 불려지게 됩니다. 이제는 성도가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족사진을 붙였으면 합니다. 각자 집에서 가족사진을 가져오시길 바랍니다. 없으면 교회에서 찍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그 옆에 가족들의 이름을 다 적어놓겠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소통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의 이름을 불러줍시다.

소통은 관심에서 생깁니다. 서로 상대방이 어디에 사는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요즘 무슨 고민이 있는지, 말을 안하니 알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물어보기도 어색합니다. 그러므로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신앙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모이시길 바랍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도록 애를 쓰겠습니다. 여러분은 모이시길 바랍니다. 구역으로도 모이고, 기도회로 모이고, 성경공부로 모이고, 취미로도 모이고, 모여서 함께 대화를 하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상대방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하실 것입니다.

지금 내가 힘들어하는 일은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힘들어하는 일이고, 모두가 고민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것 입니다. 그러면 힘이 덜 듭니다. 서로 위로할 수 있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모임을 위해서 소그룹을 만들겠습니다. 모임에는 여러 가지 성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고 싶은 데가 있고 가고 싶지 않은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모임의 성격을 말하지 않고 성도들은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꾸 모이다 보면 서로 어색했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아주 친한 사이가 될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임을 위해서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보다 세상이 재미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교회가 제일 재미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재미를 세상에 빼앗겼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모임의 재미를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오늘 삭개오의 집은 잔치였습니다. 얼마나 흥분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모임만 가지만 누구 욕을 하고, 누구 말을 하고, 비난과 비판을 하기 시작한다면 그곳에는 재미가 없어집니다. 처음에는 누구를 욕하는 것이 재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그것 때문에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혹시 내가 그 자리에 없으면 그 사람들이 나를 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임을 가질 때는 기쁘고 좋은 이야기들만 해야 합니다. 함께 웃을수 있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모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모임을 마칠 때는 기도로 마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이룬 사람은 반드시 사람들과의 소통이 함께 따라와야 합니다. 하나님과 소통 다음이 사람들과의 소통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과의 소통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과 소통을 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신앙의 정도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느냐의 이야기 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라기는 올해는 사람들과 소통합시다.

집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소통하시길 바랍니다. 자녀들과 함께 소통 하시실 바랍니다. 자녀들은 부모와 소통을 하시길 바랍니다. 형제가 서로 소통을 하시길 바랍니다.

교회에서는 목사와 성도가 소통하고 성도와 성도가 서로 소통하십시다. 그룹으로 소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직장에서는 동료들과 소통하시길 바랍니다.

요즘은 소통을 위한 커뮤니티 프로그램이 굉장히 많은 시대입니다.

서로의 관심을 위해서 문자를 주고 받는 작은 일 하나에도 충분히 감동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휴대폰의 발달로 전철을 타고 가면서도, 잠시의 휴식시간에도 함께 기도하고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문자를 통해서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문자한통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올해는 저도 바로 이 소통을 위해서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모임에 저를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믿음의 소통의 통해서 동경제일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