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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의 말씀

사랑하게 하기 위하여 요15:12-17

사랑하게 하기 위하여!                요한15:12-17                      09.9.7

20대 초반때 시골의 한 교회에서 봉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충청북도에 있는 숭선 이라는 아주 조그마한 마을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로 인해서 문이 닫힌 교회였는데, 함께 기도하던 친구들과 교회문을 열고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시골아이들이 얼마나 험하던지, 교회창문이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창문을 행해서 돌을 집어던지고서는 서울서 온 선생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재미 삼아서 교회에 관심을 보였던 아이들입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이들이 관심을 끌기 위해서 그러는구나! 하고 생각하고는 그 아이들을 끌어안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후에는 아이들이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성경학교를 할 때는 연극도 하고, 하면서 재미있게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누구에서도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어서 자기들의 방법대로 선생님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경험을 했는가에 따라서 반응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랑을 많이 받아본 아이들은 그 받아본 사랑을 기억해서 후에 자신도 그렇게 남들을 사랑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나중에 자신의 아이에게도 어떻게 사랑을 전해 주어야 하는지 몰라서 당황해하는 것을 봅니다. 사랑은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이문제로 많이 고민합니다.
부부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하는데, 본 것이 없어서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엉뚱한 오해를 사고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들을 많이 사랑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그것을 본받아서 나중에 자신도 그렇게 사랑을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본문 9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랑을 많이 받아보신 기억이 있으십니까! 사랑을 많이 받아본 사람은 성격이 좋습니다. 늘 웃음이 있고, 얼굴에 그늘이 없습니다. 늘 밝고 명랑합니다. 모든 생각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는 사람은 늘 어둡습니다. 얼굴에 근심이 있고, 웃어도 그늘이 있는 웃음을 웃습니다. 늘 남들을 부러워하고 자기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비록 우리들의 환경이 어린 시절을 그런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만을 처다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날마다 받으면서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인도의 선교사가 열심히 전도를 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땅에 앉더니 마른 나뭇잎을 모아 동그라미를 만들어 놓고 그 가운데 벌레를 한 마리 놓은 다음 나뭇잎에 불을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불은 삽시간에 빙 돌아 붙었습니다. 그러자 벌레는 겁에 질려 밖으로 기어 나오려고 꿈틀거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힘에 부쳤는지 꼼짝도 못하고 자신을 구해 내려는 노력은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인도 사람은 손을 내밀어 그 불쌍한 처지에 있는 벌레를 죽음에서 건져내었습니다. 그리고 땅에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바로 이렇게 하셨소”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이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을 확증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목숨을 주는 사랑을 받아보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여기모인 우리는 바로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럼, 주님이 왜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1. 친구처럼 되고 싶어서.
먼저 주님이 나를 사랑해 주신 이유는 친구처럼 되고 싶어서 그러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14절에서는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친구가 되고 싶어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친구란 어떤 존재입니까!  보통 친구에는 4가지 분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꽃과 같은 친구로, 꽃이 피어서 예쁠 때는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꽃이 지고 나면 돌아보는 이 하나 없듯 자기 좋을 때만 찾아오는 친구는 바로 꽃과 같은 친구입니다.
둘째 저울과 같은 친구로, 저울은 무게에 따라 이쪽으로 또는 저쪽으로 기웁니다. 그와 같이 나에게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 이익이 큰 쪽으로만 움직이는 친구가 바로 저울과 같은 친구입니다.
셋째 산과 같은 친구로, 산이란 온갖 새와 짐승의 안식처이며 멀리 보거나 가까이 가거나 늘 그 자리에서 반겨줍니다. 그처럼 생각만 해도 편안하고 마음 든든한 친구가 바로 산과 같은 친구입니다.
넷째 땅과 같은 친구입니다. 땅은 뭇 생명의 싹을 틔워주고 곡식을 길러내며 누구에게도 조건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친구가 바로 땅과 같은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때로는 산과 같이, 때로는 땅과 같은 친구가 되어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한없이 옆에 있으면 좋고,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끝이 없는 친구처럼 우리와 이야기하고 싶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친구로 우리와 동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사랑하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자식은 자기에게 친구가 많은 것을 아버지에게 말하며, 자기 친구들은 모두가 다 목숨을 걸고 서로를 위하는 관계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말이 믿어지지를 않아 실제로 그들의 우정을 한번 시험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어느 날 밤 큰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깨끗이 다듬어 사람의 시체처럼 가마니로 돌돌 말아 가지고는 아들의 친구 하나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문을 두드리며 친구를 불렀습니다. 아닌 밤중에 쫓기는 듯이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서 자다가 눈을 비비고 나오는 친구에게, "여보게! 내가 오늘 어떤 사람과 언쟁 끝에 그만 사람을 죽였는데, 우선 이 시체를 숨길 데가 없으니 자네 집에 좀 숨겨줄 수 없겠나?"하고 애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친구는 아무 말도 없이 문을 닫고는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밤이 새도록 죽은 돼지를 등에 지고 친구 집을 다 다녀 보았지만 누구 하나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구해주겠다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뒤에 숨어서 자식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계시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가와 이번에는 나를 따라와 보라고 하시고는 아버지의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새벽녘에 기진맥진한 듯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아버지의 친구는 사정이 급하게 되었음을 알아 차렸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들어오라고 하더니 시체를 광에 넣게 하고는 두 부자를 맞아 주었습니다. 이때에 아버지는 웃으면서 친구에게 본래의 목적을 말하고는 잡아온 돼지로 즐거운 잔치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우리를 일단 맞아주시고, 그리고 품어주시고,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면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친구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그 친구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정말로 우리에게 친구로 가까이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는다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주셔서 모든 것을 다 말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다 가르쳐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비밀스러운 것이 없이 다 나누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도 친구로 계시는 예수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친구 되신 예수님께 이제는 우리도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외롭지도 않습니다. 힘겹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먼길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힘든 길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걸으면 그것이 멀게도, 힘들게도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2. 다 주고 싶어서.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친구라고 말씀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에게 다 주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본문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다 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읽을수 있겠습니까! 과실도 많이 주고 싶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다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옛날 그리스에 절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중 한 친구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잡혀가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형수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전해졌습니다. 곧 사형을 당하게 된 청년은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죽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형수의 친구가 나서더니 자기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 있을 터이니 친구를 집으로 갔다 오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왕은 사형수의 친구에게 "만약 네 친구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기꺼이 자기가 대신 죽겠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왕은 그 친구를 대신 감옥에 가두고 사형수에게 나흘간의 말미를 주고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사흘이면 갔다 올 수 있는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나흘째 되는 날이 저물어 가도 그 사형수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감옥에 갇힌 친구는 자기의 친구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사형 집행시간이 되자 왕은 "자 보아라, 네 친구는 너를 배신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너는 네 친구를 믿고 있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는 아직도 내 친구를 굳게 믿고 있으며, 그는 아마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못오게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드디어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교수대에 그를 매달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사형수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어오면서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내 친구를 풀어주십시오"하고 외치면서 쓰러졌습니다. 왕이 늦은 이유를 물으니 돌아올 때 큰비로 강물이 불어나서 도저히 강을 건널 수 없어 늦었다고 그 까닭을 설명하였습니다. 얘기를 듣고 있던 왕은 두 사람의 참된 우정의 모습에 감탄하여 두 사람 모두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친구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아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8) 고 말씀하셨고,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5,16) 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읽을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30:18절에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고 하셨습니다.
자기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까워서 우리에게 감추시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 주고 싶고, 다 들어주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내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16하)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우리에게 친구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과분하고 또 행복한 일들입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친구로 오시고, 또 모든 것을 다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 좁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유 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참 어렵게 살던 사람은  베푸는 것에 인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만 알게 됩니다. 자기 배만 생각합니다.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잘먹는 세월이 지날때에야 그제서야 남들을 생각할 수 있고, 사람들을 배려할 줄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없던 사람이 남에게 베풀 정도까지 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껏 주어서 먹게 하시고, 가지게 하시고,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십니다. 옛말에 “광에서 인심난다!” 고 했습니다. 광에 살림살이가 많고 쌀독에 쌀이 많아야 다른 사람에게 인심을 쓰게 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래서 무엇이든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과실도 많게 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3. 모두가 사랑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서로서로 영적으로 심적으로 여유를 찾게 될 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원하셨던 것은 결국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12절에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니라” 고 합니다.
결국은 우리가 서로 서로 사랑하면 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구로 닿아오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육간에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셔서 자신만을 쳐다보는 생활에서 이웃을 보게 만들고, 또 여유를 가지고 서로 도우며,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이웃을 돌아보고, 서로, 서로 사랑하십시다. 우리가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면 원수를 향해서도 용서할 수 있게 되어지고, 그를 이해할 수도 있게 되어집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도, 그 입장이 되면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상처가 치유되어지고, 내가 마음의 여유를 갖기 시작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주겠다. 모든 것을 다 주겠다! 뭐든지 기도만 해라 그러면 다 들어주겠다! 하시면서 이야기하신 것은 하나님이 보고 싶으신 것, 예수님이 보고싶으셨던 것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살았습니다. 서로 이해지 못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저이는 왜 그럴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무관심하고, 때로는 비판적이고, 때로는 적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같은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같은 식구로 살아가면서도, 같은 교회 안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세상에 마음 아픈 것이 부모입장에서 자녀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볼 때입니다. 반대로 가장 보기 좋은 것이 서로 우애있게 사는 모습이 보모가 보기에는 제일 보기 좋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무엇을 원하셨습니까!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싶으셨습니다. 서로 아끼며, 서로 도와주면서 사는 것이 보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가를 살펴보시고는 그 중심에 여유 없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웅크리는 모습, 그것이 죄의 문제였기에 용서해주셔서 심령의 자유로움을 허락하시고,  건강의 문제였기에 치료 해셨고, 경제적인 문제였기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육간의 여유로움을 찾아서 이제는 형제를 돌아보게 하시고, 이웃을 돌아보게 하시고, 이 땅에 구원받아야 할 민족들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서 기도하게 하시고, 긍휼을 베풀게 하시고, 사랑의 손길을 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품에 안고 기도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을 세어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받은 복을 세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감사와 기쁨이 생기고, 삶에 생동감이 생기게 될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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