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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의 말씀

무관심의 시대 눅7:31-35

무관심의 시대             누가복음7:31-35                08.12.7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적당한 대답이 있다면 그것은 "무관심"일 것입니다.
무관심 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때 사람들은 고독하게 됩니다. 그 고독은 나중에 우울증이라는 병을 가져오게 되고, 결국 이것은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정신병원이라도 가서 치료를 받는다면 그나마도 나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고독을 혼자서 감당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끔찍한 자살사건들이 일어날 때 보면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서라도 "나"라는 자신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끔찍한 일을 벌리기도 합니다.
이 사회에 무관심하게 버려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풍요 속에 빈곤한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다른 사람은 한번 술값으로 날려버릴 돈이 어떤 이 들에게는 그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을 우리사회는 알아야 합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져줘도 소생할 영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우리의 관심은 너무 돈 있고, 폼나 보이는 사람에게만 몰려있는 것이 아닌지, 너무 자기 자신의 삶에만 몰두하고 있지 않는지 자기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장로님이 계시는데, 그분은 일본에서 큰 사업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닛꼬에 있는 옛날 관동기도원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엄청난 돈을 들여서 온천도 파고, 편안한 숙소도 마련을 했습니다. 그 장로님과 사적으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그분의 이야기는 그곳에다가 큰 리조트를 만들 계획입니다. 그래서 기도원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영적,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이제 인류에게 가장 큰 문제는 암이나 에이즈보다도 정신병, 우울증, 이런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지역에 기도원을 중심으로 대단위 리조트를 만들어서 그들을 치료할 계획을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무감각하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물론 당시의 세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시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이 세대를 비유할꼬?"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지역 어린이들에게는 특별한 놀이가 없었습니다. 부모를 따라 시장에 갑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사람도 만나고, 물건을 사는 동안에. 아이들끼리 모여 놀이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행해지는 일을 그대로 모방해 놀이로 만들었습니다. 결혼식을 할 때 행렬을 이뤄 즐거워하는 것과 장례식 때에 슬퍼하고 애곡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느낀 대로 놀이에 적용한 것입니다. 아이들 중 일부가 피리를 부는 척하면 다른 아이들은 결혼식에서 봤던 것처럼 함께 춤을 추었고, 그들 중 일부가 슬퍼하면서 애곡하면 다른 아이들은 장례식에서 봤던 것처럼 가슴을 치면서 울고 하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사이에 고집이 아주 세고 마음이 비뚤어진 아이는 정해진 규칙에 따르지 않고 놀이에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다른 아이들이 슬퍼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그 놀이가 전래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놀이는 옛날 우리 어린시절에 솝곳놀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오늘 이이야기에서 주님이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1. 무관심의 시대
시대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운데 현대를 가리켜 3무시대(3無時代)라고 합니다.
1)무관심: 중국의 어느 시골마을 버스 안에서의 일입니다. 예쁘게 생긴 여자를 험악하게 생긴 두 건달이 희롱합니다. 버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모른체 합니다. 급기야 두 건달은 운전사에게 정지할 것을 명하고 말을 듣지않자 운전사를 테러합니다. 그리고 두 건달은 버스에서 여자를 강제로 끌어내려 버스 옆 풀밭으로 데려가 돌아가며 성폭행을 합니다. 버스안에는 건장한 남자도 수십명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도 정의롭게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냥 차창너머로 슬금슬금 눈치보며 그 광경을 구경만 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일에 참견했다가 칼이라도 맞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때, 보다 못한 한 청년이 나서서 건달과 싸웁니다. 건달들은 청년을 칼로 몇 차례를 찌르고 달아납니다. 여자가 울면서 옷을 차려입습니다. 여자가 버스에 오르자 아무도 말이 없습니다. 창피한건 아는지 여자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모두가 무관심한 척 창밖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운전사는 테러 당해서 운전할 수 없고 여자가 헝클어진 상태로 운전석에 앉습니다. 그때, 피를 흘리며 청년이 차에 타려하자 여자가 소리칩니다. “왜 남의 일에 참견하시는 겁니까?” 라며 그 여자는 청년에게 화를 내고 버스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리고 여자가 운전하는 버스는 출발합니다. 청년은 고통스런 아픈 몸을 이끌고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다 자동차 사고현장을 목격합니다. 교통경찰관이 말하길 버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승객이 모두 사망한 사고라고 합니다. 멀리 낭떠러지를 바라보니 방금 자신이 타고 왔던 바로 그 버스였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죄를 짓지 않았지만 어찌 보면 모두 죽어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오직 살만한 가치가 있던 그 청년을 버스에 타지 못하게 하고 그 여자는 승객들을 모두 지옥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무관심의 결과는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이런 무관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체우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욕망을 체우려는 사람들의 폭력과 무서움에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억지로 무관심하면서 살아갑니다.  디모데후서3:1-5 에서는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무관심을 가지면 모든 것이 편안할 것 같지만 만약에 우리가 무관심을 가졌던 그 일이 주님의 일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곳에서 주님이 고통받는 장면이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곳 나에게 한  것이고, 작은 소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사람을 좋은 이웃으로 소개한 이유는 그 사람은 정말로 무관심하게 지나 처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누가 뭐라 그럴 수도 없을 것 같은 환경이었지만 그는 관심을 가져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무감각: 무관심은 무감각으로 발전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 함께 사는 사회에서의 윤리, 뭐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일로 가슴아파하거나 관심 갖지 않습니다. 단지 그 일이 자기에게만 일어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만 안전하면 되고, 자기 가족만 건강하면 괜찮습니다. 어느 공익 광고를 보니까 “내 차가 더러워 질까봐 우리나라에 버렸습니다. 내 집에 냄새가 날까봐 우리나라에 버렸습니다.  내 배낭이 무거워질까봐 우리나라에 버렸습니다. 내 돈 드는게 아까워 우리나라에 버렸습니다.“ 나만 깨끗하면 된다는 생각이 무관심입니다.
3)무기력: 사람들이 다들 무관심하면 안된다. 무감각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렇게 되는 것은 “나 혼자 열내서 무슨 소용있나?” 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혼자서 아무리 잘해도 남들이 같이 하지 않으면 나만 바보가 된다는 생각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두 눈 가진 토끼가 한 눈 가진 토끼 마을에 가서 병신 소리를 듣게 되니 한 쪽 눈을 빼 버렸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무기력해졌습니다.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고 포기 해 버립니다.
나 혼자 아무리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 잘못 된 것인줄 알면서도 내버려둡니다. 특히 중고생들이 어른들 눈앞에서 잘못을 저지르는데도 타이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못 건드리면 요즘 아이들이 하도 무서워서 나만 다친다는 생각이 이 세상을 더욱 병들어 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3무의 시대에 현대인들이 가진 질병은 암이나 백혈병 보다 더 무서운 병을 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2. 자기 중심의 시대
이 놀이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 세례 요한 모두를 싫어했습니다. 한마디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싫었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어했습니다.
오늘 본문 33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행하는 모든 것이 다 보기에 싫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그 약대털옷도, 보기 싫고, 그 메뚜기와 석청 만을 먹는 금욕주의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외치는 소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소리는 더더욱 싫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화가 나있었습니다. 여러분 “회개하라!” 고 외치는 세례요한에게 화가 나있을 사람들은 주로 어떤 사람일까요? 부정 부패를 일삼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도적질을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죄를 밥먹듯 짖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례요한은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는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나의 비위를 거스릴 때 싫어합니다. 내 잘못을 지적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일이라도 나에게 좋은 말을 하고, 듣지 좋은 말을 하면 그 사람이 싫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바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34절에 보면 그것과 똑같은 이유로 예수님을 또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세례요한과 전혀 반대의 이유를 들어서 싫어합니다. 34절"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라고 비판을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보통 사람처럼 지내시기도 하고, 세리와 창기들과도 어울려 지내셨습니다. 사람들은 또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먹기를 탐한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먹지 않으니까 귀신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은 잡수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렇게 살면 이렇게 산다고 비난하고 저렇게 살면 저렇게 산다고 비난하는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하고 주님께서 비유하셨습니다.  메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비친 목사의 모습은 목사가
젊으면 - 경험이 부족하여 불안하다고 하고, 늙으면 - 시대에 맞지 않고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잘 생기면 - 제비 같아 위험하다 하고, 못 생기면 - 품위가 없어 틀렸다고 합니다.
자식을 많이 낳으면 - 무절제 한 사람이라고 하고, 자식이 없으면 - 혹시 무슨 저주나 받은 줄 압니다.
아들만 낳으면 - 욕심이 많다 하고, 딸만 낳으면 - 기도해서 그 정도도 해결 못 받았냐고 합니다.
가난한 집을 심방하면 - 인기운동을 한다 하고, 부잣집을 심방하면 - 잘난 놈들과만 어울린다고 합니다.
좋은 집에서 잘 살면 - 사치한다고 하고, 못 살면 - 축복도 받지 못한 목사라고 천시합니다.
좋은 차를 타면 - 어려운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과소비 한다하고, 
나쁜 차를 타면 - 장로님들과 교인들에게 사랑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면 - 돈만 안다고 하고, 안 하면 - 가르치지 않는 무책임한 목사라고 합니다.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면 - 너무 냉정하다고 하고, 잘못을 지적치 않으면 - 정의감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과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만사가 다 부정적입니다. 만사를 미워하는 눈으로 보면 다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기시작하면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좋은 것 들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마음으로 보면 곰보도 이뻐보이고, 결점도 장점같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하는 일들이 죄짖는 일들 밖에는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미움의 눈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부정적인 눈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예수님만 가면 저들도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죄만 짖던 사람도, 지옥으로만 가던 발걸음도 다시 돌아설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될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3.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5절에 보면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옮다함을 얻느니라"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이겠습니까?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오늘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첫째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어머니가 쓴 글인데, 참 감동적으로 잃은 적이 있습니다.
둘째마저 딸을 낳자 시댁과의 갈등은 더 깊어만 갔다. 나 역시 실망이 커서인지 둘째딸아이가 얼마나 밉고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둘째는 점점 말수가 줄더니 혼자 있길 좋아했다.
다른 두 형제에게도 질투를 많이 느끼는 듯했는데 초등학생 시절엔 남동생과 싸우다 집에 불을 지른 일도 있었다. 호되게 야단치면 맘속으로 '넌 어릴 때부터 날 고생시키더니 갈수록 더하는구나' 하며 속상해 했다.
이런 성격은 고등학교때 까지 이어졌는데, 어느날 학교문제로 언성을 높여 말다툼을 하던 중 아이가 갑자기 쓰러졌다.
그 아이는 애정결핍에서 오는 자폐와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는 아이한테 어떻게 했을 때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하나하나 예를 들어 설명해 주었고 그예는 그대로 내 이야기였다.
아들이 아니라서 원망스런 눈초리로 바라본 일, 조금만 잘못해도 크게 야단치고 혼자 있는걸 좋아한다고만 생각해 놀아주지 않았던 일....딸이라는 이유로 엄마에게조차 사랑 받지 못한다는 걸 느꼈을 때 아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그 뒤 아이와 늘 함께 하려고 애썼다. 함께 시장도 가고 영화도 보았으며 일요일엔 둘이서 등산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서 스티커 사진을 찍자고 했다. 작은 화면에 얼굴을 맞추기 위해 내가 둘째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자,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놀라서 왜 그러냐고 묻자 아이는 나를 와락 껴안으며 울 먹었다.."나...엄마 정말 사랑한단 말야!" 아이는 엄마와의 작은 스킨쉽 하나로도 마음이 풀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난 20여년 가까운 세월동안 그렇게 무심했단 말인가..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여러분 우리의 작은 관심과 사랑이 무관심으로 소외되어 살아가는 영혼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몸부림치는 영혼에게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자기의 작은 키 때문에 사라들 뒤에서 예수님을 볼 려고 몸부림치다가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에게 관심을 가져주셨고, 아무도 말도 걸어주지 않는 많은 소외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시고, 대화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듯 있는 성도들에게 관심을 가집시다. 말을 걸어주고, 아무 일 없어도 안부 인사라도 하십시다. 손잡아 주고, 악수 해주는 것이 관심입니다. 웃어주는 것이 관심입니다. 배려해주고, 이해해주는 것이 관심입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서 사람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영적 시각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보는 훈련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결정도 존중해 줄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 따끔한 말을 하는 사람들 오히려 깊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인격이 넓어지고,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은 역시 세상은 살아갈 만하다. 아직 세상에는 소망이 있다, 고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안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오늘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이세상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다가 여러분을 바라보시고는 기뻐하실 수 있고, 즐거워하실 수 있고, 안심하실 수 있고, 믿어주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빛의 자녀들이요, 세상에서 소금이요, 빛이요, 세상의 소망이요, 향기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고 즐거워하실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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