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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의 말씀

기대감 사40:9-11

기대감               
이사야40:9-11                    08.12.14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을 흔히 “카피라이터” 라고 합니다. 이들은 광고의 문구를 만드는 사람들인데, 흔히 광고를 “30초의 예술”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단 몇초안에 그 상품의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에는 카피라이터 라는 직업에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갖는데 유능한 카피라이터기 되기 위해서는 
첫째, 카피라이터는 소비자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이나 시대의 흐름에 정통해야 한다고 합니다. 카피라이터는 그 시대의 타깃그룹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관과 윤리관의 파악은 물론 라이프스타일 변화에도 촉각을 세우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둘째, 카피라이터는 심리학적 기질의 소유자다. 소비자의 심리상태나 본능을 모르고서는 카피라이터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갈대처럼 본능에 흔들리는 인간내면의 세계를 모르고서는 설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카피라이터는 잡학박사여야 합니다. 카피라이터는 어떤 제품을 맡더라도 충분한 지식과 이해로 분석할 줄 알아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많이 수집하고, 많이 뛰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뛰어난 전략적 사고와 전문가를 능가하는 아트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광고이론에 중무장되어 있어 기획서를 작성할 줄 알아야 하고. 또한 캠페인 테마 및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전략가로서 플래너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다섯째 카피라이터는 소비자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카피라이터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예쁜문장, 문학적 표현보다는 소비자의 눈을 번쩍 뜨게 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카피를 써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소비자들이 공감하고 주목하고 관심을 표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한편의 잘된 광고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회사의 앞날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또한 영화에서 예고편 또한 아주 중요합니다.  그 예고편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서 본영화가 성공하느냐! 실패 하느냐! 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음 본 영화에서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내용만을 편집해서 관객들에게 미리 보여줍니다.  다음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불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작업이 대단히 중요하듯이 성경의 하이라이트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예고편들이 구약성경에는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결국 구약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주 성탄절을 앞두고 이런 구약성경의 예고편중에 한 부분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이사야 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는 선지자의 이름으로는 아주 적당한 이름이라 생각이 되어집니다.
특별히 이사야53장은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아주 리얼하게 예고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그럼 오늘 이사야 가 예고해준 메시야에 대한 예고편 중에 오늘본문 이사야40장에 기록된 내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이란 말은 원어 성경에 보면 "바싸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소식을 전하다, 기쁜 소식을 전하다. 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소식은 기쁜 소식이란 말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기쁜 소식을 듣기가 힘이 듭니다. 어디를 보아도 답답하고, 캄캄하고, 경제위기라고 하는 우울한 소식들밖에 안 들리는 이 세상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또 오늘들은 기쁜 소식을 또한 많은 이들에게 들려주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9)
본문9절 후반에 보면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라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만나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봐요. 하나님을 보려면 죽어야지 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라고 되물어 보시는 분도 아마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14장에 보면 빌립이 예수님께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라고 물어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는가 하면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9-11) 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게 해주신 줄로 믿습니다. 
빌립보서2장에서는 그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대감은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연조가 깊어 가면 갈수록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어집니다.  나무를 보아도 하나님이 보이고, 풀을 보아도 하나님이 보이고, 이 땅에 어떤 것을 보아도 하나님이 보이는 분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복된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이제 우리가 전해주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라는 기대감.(10)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내용 속에서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갈 것을 예언합니다.
포로 되어 끌려가는 신세는 처량하고, 또 한없이 연약한 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도 로마의 식민지로서 압제받는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한없이 연약했습니다. 이런 연약한 때에 그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강한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사울왕의 시대에 골리앗을 앞세운 불레셋앞에 이스라엘은 꿈쩍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이 온갖 말로 이스라엘을 모욕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앞에 이스라엘은 골리앗을 대항해서 나갈 장수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때처럼 이스라엘이 강한자를 기다린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나타난 사람이 있으니 그는 " 다윗"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골리앗 앞에 감히 나가려고 하는 자가 없는 그때에 다윗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울이 그를 내보내면서도 다윗이 이기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당시의 다윗은 장수의 다윗이 아니라 소년 다윗이었습니다.
아마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윗을 내보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떠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대도 하지 않았던 다윗에게서 엄청난 승리를 얻었습니다. 다윗이 날려버린 물멧돌 한 개가 그의 이마로 곧바로 날아가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전세는 갑자기 역전했습니다. 
오늘 10절에는 무엇이라 합니까?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라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진정한 강한 자로 오십니다. 그러나 정말로 강하신자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예수가 기적을 일으키고 성전에서 혁명을 일으키실 때, 사람들은 흥분을 했지만 후에 힘없이 붙잡히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야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진정으로 강하신 분이십니다.
일본의 기독교 작가인 엔또 슈샤꾸의 작품에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들어오던 때의 이야기를 엮은 소설입니다.
말못할 박해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서 순교해 가는 사람들, 약해서 굴복하고 배교 하는 사람들, 이들을 지켜보는 신부의 고뇌와 회의 --- 이런 것을 밀도 있게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기조차 끔찍스러운 온갖 박해와 고문을 다 당하면서 예수를 부인하라는 협박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썰물 때에 바닷가에 십자가를 죽 세워 놓고 거기에 사람을 비틀어 매어 둡니다. 밀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면 잠겨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 수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순교해 갑니다. 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었던 포르투갈 신부는 너무도 답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능력을 나타내 주옵소서, 저들을 구원해 주옵소서"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신부는 피땀을 흘리며 더욱 안타깝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 그러자 그의 귀에 들려오는 뚜렷한 음성이 있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강함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으시면서 우리를 고난 속에서 강하게 만들어주시고 계십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성도를 더욱 강하게 만드시는 고난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참으로 강한 나라입니다. 그 조그마한 나라가 세계경제를 움직입니다. 유대인들이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세계경제가 달라집니다. 미국이 엄청나다 해도 그 미국을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고난입니다.
이스라엘은 고난의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 할 수 있었던 것은 고난 때문이 아니고 고난을 이겨내는 방법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망할 수도 있고 흥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고난 속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우리를 당신의 그 강하신 두 팔로 꼭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 그분은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 강하심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하심으로 오늘 나를 구원하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3. 목자같이 임하실 것이라는 기대감(11)
11절에 보면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 하시리로다"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분은 목자같이 오십니다.
양을 먹이시고 품에 안으시고 온순히 인도하시는 참된 목자같이 오십니다.
피곤하고 지친 영혼들에게 주님은 선한 목자로 오십니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우리를 언제나 안위해 주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시고,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는 목자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 목자 되신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 되어 주셔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즉 나를 지켜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려주시는 분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나를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나를 당신의 품에 품어주시기 위해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기 위해서, 나를 악한 사탄마귀로부터 지켜주시기 위해서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배고프지 않도록, 힘들지 않도록, 아프지 않도록, 외롭지 않도록,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곁에 서서, 우리를 당신의 그 크고 따뜻한 손으로 품에 품어주시고, 사랑해주십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고 산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기다리고 기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가가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고편으로 보여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우리를 강한 손으로 붙들어주시고, 그런가 하면 선한 목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품에 안아주시는 그 주님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기쁜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걸음 되어서 이 성탄의 계절에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왜 오셔야 했는가를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희망을 잃고 캄캄한 암흙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저 어둠 속의 영혼들에게 희망의 소식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계절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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