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쓰시겠다하라. (종려주일)
마가복음11:1-10 09.4.5
오늘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 복음을 증거 하시다가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신,구약 성경 모두가 이 한 주간을 말해주고 있으며, 기독교의 능력이 이 한 주간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간은 예수님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월요일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들을 내쫓으시며 성전을 정화하셨고,
화요일에는 많은 유대 지도자들, 바리새인들과 함께 부활 문제, 천국 문제에 관한 논쟁을 벌이셨으며,
수요일에는 죄 많은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리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주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목요일에는 마지막 성만찬을 드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가룟유다의 배반으로 붙잡혀 밤새 심문과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시다가 오후 3시에 운명하셨으며, 그 후 무덤에 계셨다가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 왜 십자가를 지고 피흘려 돌아가셨는지 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죽으셔야 했는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인데도 죄인인 것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1:3에서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 내 백성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에 매여 죄의 종노릇하고 죄로 인해 죽은 것이 인간입니다. 시편 51:5에 보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고 그가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주간동안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내일부터 있을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하셔서 새벽에 잠시라도 주님과 만나시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인류구원의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이 좀 특이합니다.
다름이 아닌 나귀새끼를 타고 올라가셨습니다. 늠늠한 말을 타시고 제자들의 호위를 받으시면서의 입성이 아니라 조그마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더군다나 그 나귀새끼는 사람을 한번도 태워본 적이 없는 나귀였기에 아마도 비틀 비틀대면서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모습을 사람들은 좋다고 종려나무 가지를 꺽어서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외치면서 환영했던 모습이 바로 오늘입니다.
1.왜 나귀새끼인가? (2)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왜 하필이면 나귀새끼를 타셨을까요?
뉴욕 마라톤 대회에서 레이건 대통령의 격려 전화를 받은 린다 다운(Linda Down)이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이 여자 마라토너는 출생 때부터 두 발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자입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사람들도 힘들다는 마라톤 경기에 크러치(목발)로 양쪽 겨드랑이를 의지하고 42.195km을 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 격려를 하게 된 것입니다. 선천성 소아마비인 린다는 다른 1만 5천명의 선수들이 평균 4시간 걸려 달린 이 코스를 11시간 이상 걸려 온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크러치에 의지하고 끝까지 달려 완주하였습니다. 린다의 이런 용기의 행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제대로 행보 하기도 어려운 린다의 발걸음은 어두움과 절망에 처해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도전과 의지의 발걸음은 '할 수 있다'라는 복된 소식처럼 세계의 모든 장애인에게 도전 의식을 심어주게 되었습니다. 린다의 발걸음은 힘찬 개선 장군의 발걸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권력을 움직이는 독재자의 발걸음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손안에 넣은 재력가의 발걸음도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불완전한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희망의 태양을 다시 떠오르게 할 만큼 힘있는 발걸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입성은 마땅히 말을 타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당당하게 왕 중의 왕으로서의 입성이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그것은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 였습니다. 구약 스가랴9:9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공의와 구원과 겸손과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서 타신 것입니다. 당시 말을 타고 입성하는 것은 정복자의 권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정복자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완성을 겸손하게 이루시기 위해서 나귀새끼를 타신 줄로 믿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목발을 집고 마라톤대회에 참석한 린다의 그 출발점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웃음꺼리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날의 메인은 1등을 한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그날 대회에서의 모든 초점과 마라톤의 역사 속에서는 목발을 집고 꼴등을 했지만. 11시간이나 걸린 마라톤이었지만, 사람들과 모든 메스컴의 초점은 린다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입성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신 그 모습이기에 모든 역사의 초첨이 예수그리스도에게 맞추어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1류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모든 것에서 1등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게임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오히려 1류 보다도, 1등보다도, 승리보다도, 3류가, 꼴등이, 그리고 패배자가 더 빛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검소한 3류, 정직한 꼴등, 깨끗한 패배가 더욱 빛이 날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 지향적인 방식을 택하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결과보다도 과정을 더 소중히 여겨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신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왕은 왕인데, 지배자로서의 왕이 아니고 섬기는 자로서의 왕으로, 세상율법의 잣대를 가지고 오시는 공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공의로 우리를 심판하시려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시려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주님은 나귀를 타시는 겸손의 모습으로 오늘 입성하신 줄로 믿습니다.
2. 어떻게 준비된 나귀 새끼인가? (6)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이 타신 이 나귀는 어떤 나귀였습니까?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 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2,3)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누군가가 이일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그것이 무슨 싸인 같은 말이 되어서 즉시 내어준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학자들은 말하기를 당시에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특별히 스가랴서9:9절의 말씀을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 메시야가 어린 나귀새끼를 타신다는 예언의 말씀을 위해서 오랫동안 나귀새끼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가 자라면 다시 새끼나귀로 바꾸고 하면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무리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건너편 마을 사람들이 바로 그런 주님의 날을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외에도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던 시므온이라는 사람도 역시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2:25-27에 보면 "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 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예언의 말씀대로 주님을 메시야를 보았고 만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서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던 아름다운 여인도 있습니다. 그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마태복음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엇을 생각하고 자신의 향유를 아낌없이 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그의 행위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행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일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일을 위해서 반대의 것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롯유다는 은30에 예수님을 팔아버릴 것을 준비하고 있었고, 로마 병정들은 채칙으로, 빌라도는 사형판결로 주님의 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는 많은 사람들이 악역으로 주님의 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시기하고 죽이려는 일들로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년전에 TV에서 방영이 되었는데, "다빈치코드"라는 "댄 브라운"이라는 사람이 쓴 허구의 소설이 영화화되어서 방영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상영하려다가 한국교회의 반대로 결국은 상영이 못되었다고 들었는데, 이곳 일본에서는 그만 방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인간적이 면을 들어낸 것으로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고 아이들 낳고 살았다는 기가 막힌 내용입니다. 이 반 기독교적인 내용의 소설이 지금 1,000만부가 팔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 또 그런 영화를 못 다면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까? 이것은 예수의 죽음도 부활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기독교의 중요한 부분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사탄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파급되고 있다는 사실이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를 죽이려는, 일들로 종말을 준비하는 무리들이 지금 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주님을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겠습니까? 늘 주님께서 쓰실 수 있는 부분을 우리가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 건축을 하기 위해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방문해서 헌금을 작정하는데 좀 여유 있는 성도 댁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 성도는 늘 돈 자랑을 하는 성도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님, 부자시죠. 건축헌금 좀 하시죠? ,뭐가 있어야지요. 일산에 빌딩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아들 것인데요. 분당에도 빌라가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작은 아들 거에요. 파주에 산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손자 거에요. 강남에 집이 있다면서요. 그것은 우리 아내 거에요. 그때 목사님이 나오면서 혼잣말로 "다 있는데 하나님 몫만 없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남들에게 자랑 할 때는 굉장한 부자같이 말하는데, 정작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라고 할 때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이 되고 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고난의 주간을 보내면서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실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 예수님 생각 내 생각.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가지를 꺽어 들고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양탄자를 대신해서 길에 깔고 소리를 지르면서 찬송했습니다."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하면서 외쳤습니다. 구원을 성취하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그 외침 속에는 이제는 예수님께서 진짜로 놀라운 일을 일으키려는가 보다, 드디어 메시야로서 왕으로 등극하시겠구나, 하는 자신들의 기대감에 그들은 외쳤을 것입니다. 그 외침이 불과 몇 일이 안되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변할지도 모르는체, 그들은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이었고, 죽음을 향한 발걸음이었고, 그리고 진정한 구원의 성취를 위한 발걸음이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의 사역을 결정짓는 발걸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서로 다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의 건강과 복만을 위해서 예수를 믿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부르시기 위해서 구원하셨지만, 우리는 예수 믿어서 출세하려는 생각으로 주님을 믿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고3때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집안에서는 저 혼자서 만이 예수를 믿고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을 해도 고3때의 신앙이 참으로 좋았었습니다. 기도도 많이 했고,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가 간암이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일밖에 없었기 때문에 저는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저는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학교가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에 학교의 기도실에 기도제목을 붙여놓고 중보 기도도 부탁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느냐!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뭐라니요, 우리아버지가 간암입니다. 이제 곧 죽는 답니다. 고쳐주십시오. 그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영혼을 보았느냐! 는 음성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고쳐지면 다시 썩을 생명의 연장만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영원히 죽어 가는 그 영혼을 보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기도의 제목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만약 구원해주시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평생을 살겠습니다. " 그리고 난 다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병원전도단 들이 따라붙기 시작했고, 많은 목사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결국은 돌아가시지 직전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여기에 이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무엇을 위해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매년 이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주님이 왜 나귀를 타시고 들어가셨는지, 그 깊은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다른 어느 때 보다도 예수님을 더욱 깊이 묵상하실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주님이 왜 그 고난을 받으셨는지, 깊이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특별새벽기도회에 나오시길 바랍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깊이를 다시 한번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가를!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우리 이 한 주간에 깊이 묵상하여서, 이번 부활주일에는 여러분의 신앙이 놀랍게 성장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주님께 한발자국 더 나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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