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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의 말씀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눅2:25-35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눅 2:25-35               09.12.6

유명한 데일 카아네기의 사무실에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커다란 거룻배의 그림 한 점이 걸려있었다고 합니다. 노는 모래 위에 놓여있고, 배는 무척이나 낡은 것 같은 그러한 배의 모습을 하고있습니다. 썰물에 모래 위 언덕에 이렇게 걸려있는 배를 그린 그런 그림입니다.
마치 모래언덕에 버려진 것 같은 그림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처량하게 아주 쓸모 없이 내버려진 것 같은 그림, 그 배 한 척이 그려있는 그림이지만은,  그 그림 밑에 한 줄의 글이 쓰여져 있는데, 그 글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씌여 있었답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지금은 썰물이 돼서 물이 다 빠져나가서 이 배가 이렇게 모래 언덕에 걸쳐있지만은 반드시 밀물 때가 와서 이 배를 물위에 띄워 놓을 것이다. 그리할 때에 이 낡은 배도 쓸모 있게 쓰여질 때가 올 것이다. 반드시 썰물이 있는가하면, 또 밀물 때가 있다. 그래서 밀물 때를 기다리는 이 낡은 배 한 척, 이 거룩의 모습을 그 사무실에 늘 걸어놓고 그는 그 그림을 보면서 무엇인가 깊은 생각을 하곤 했더랍니다.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소망이 됩니다. 무엇인가 기다릴 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고, 여전히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더 이상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말할 것도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절망입니다. 고통입니다. 그런데, 잠깐만 기다려봐!, 조금만 더 참아봐!, 조금만 더 있으면 되! 지금까지 참았는데, 그것도 못 참아! 조금만 더 기다려봐, 라고 누군가가 말해준다면,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다림이 있을 때 내 의지는 더 강해지고 내 삶은 더 기름지고 풍성해지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런 기다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기다림의 소망이 바로 지금 대강절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젠가는 메시야가 올 것이다. 그분이 오시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고통도 끝이 날것이다. 그분이 오시기만 하면, 더 이상 우리가 눈물 짖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내가 다시 오리라”하셨습니다.  다시 오시겠다는 그 약속이 초대교회들이 그 수많은 고난과 환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성장하고 복음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또다시 기다리고 있는 기다림의 소망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또 한사람이 이런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는가 하면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생각하면 답답하고, 아프고 힘이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백성들, 어디한곳에도 살아갈 소망을 찾지 못하고 살아가는 백성들을 처다 보면서 이 백성을 치료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의 위로만이 이 민족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되어서 그는 자기 자신만이라도 경건하게 살아가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민족을 위로하실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1. 누가 위로가 필요한가.
여러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아마도 상처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 괴로움이 있는 사람. 외로운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보낸 사람, 이런 사람들이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일 것입니다. 
우리가 몸에 상처를 입으면 약을 바르거나, 깊은 상처는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상처가 속히 아물고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육신이 상처가 생겼는데 그대로 방치해 두면 고름 집이 생기고, 썩어서 큰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마차가지로 우리 마음에도 어떤 충격에 의하여 상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슬픔, 이별, 고통, 실패, 분노, 한(恨) 등에 의하여 마음에 또는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이를 치유하지 않으면 그것이 정신적으로 큰 병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육신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으면 고름 집이 생기듯, 마음의 상처도 치유하지 않으면 마음에 큰 병으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큰 약이 있는데 그것이 위로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이 위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의 친구가 밤낮으로 술에 취해 다니니까 그 사람에게 "자네 그렇게 술독에 빠져서 취해 다니면 무슨 일을 하겠는가? 술을 끊게... " 그러니까 술에 중독이 된 친구가 말하기를 "요즘 같은 세상에 취하지 않고서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고 대꾸하더랍니다. 술이 아니고서는 지금 그가 당한 속상함과, 분통터지는 일, 억울한 것을 어디에다가 하소연할 때가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이 위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옛날엔 담배를 과부초, 심심초라고 했습니다. 부부가 같이 살다가 남편을 잃으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담배를 피우면 연기가 사라지듯 모든 잡념과 괴로움, 답답한 일들이 연기 같이 사라져 버리라고 담배를 피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외로움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밤이 되어도 어디에게 가서 잠잘 곳이 없는 사람, 하루종일 일을 하고 퇴근하고도 따뜻하게 맞아줄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 이런 사람들이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아니겠습니다.
이런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줄 위로가 없다면 그들의 인생은 조금씩, 조금씩 망가져 가고, 상해져 갑니다. 그러다가 병들고, 지치고 상한 영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상태가 바로 이런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수많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수많은 공격을 받으면서 늘 착취를 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바벨론에 포로를 끌려가서 나라 잃은 서러움에 살아야 했던 고통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이제는 살만한가 해보지만 또다시 로마에 의해서 점령을 당해서 식민지민으로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 늘 로마군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폭군들에게 이리 빼앗기고, 저리 빼앗기고, 제사장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제사보다 제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백성들은 은혜를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위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사업을 벌려놓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음 조리는 모습들, 그리고 그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는 가족들의 시선들, 직장에서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장래 일에 대한 불안함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직장인들, 불안한 장래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 그리고 그런 학생을 두고 있는 부모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내가 의미 없이 했던 한마디 말이 오해가 되어서 어제의 친한 친구가  상처를 받고 오늘은 적이 되어버린 당황스러운 상황들, 이런 일들이 여러분에게는 없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역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2. 누가 위로가 될까!
그렇다면 여러분 누가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상처받은 사람을 위로해줄 사람은 누구일까요, 힘들고, 지쳐있는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고, 모든 일에 잘 나가는 사람, 늘 공부도 일등하고, 대인관계도 늘 좋은 사람, 거기다가 돈도 많은 사람, 아는 것도 많아서 박식한 사람,  거기다가 얼굴도 예쁜 사람, 이런 사람이 와서 여러분을 위로한다면 그것이 위로가 될까요! 그것은 더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위로가 되는 사람은 나와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입니다. 나와 같은 아픔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와 같은 입장에 놓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용기가 되고, 저런 사람도 해냈는데, 나라고 왜 못해! 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속담에 “남의 상처는 나의 기쁨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받은 상처를 보면 그것이 기쁨일수 있는 것은 아마도 “어! 저 사람도 나하고 같네,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상처가 있네, 나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 라는 안도감이 기쁨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같아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슬픔과 아픔을 함께 겪을수 있는 사람, 그리고 함께 겪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시므온이 기다렸던 하나님의 위로는 누구였습니까!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서 그가 한 찬송이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29,30)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태어나실 때부터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마굿간 말구유에서 태어나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고, 더욱이 자기의 첫아이를 이런 곳에서 출산하고 싶은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은 그를 죽이려는 헤롯의 칼의 위협 속에서 피난을 떠났던 분이셨습니다. 어린 시절은 아버지를 도와서 목수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가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한때는 사람들이 몰리는가 싶었지만,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올라가기도 했었지만 반면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함께 생기고, 말로 상처 주고, 시험하고, 공격하고, 기회만 있으면 그를 죽이려고 하는 무리들이 생겼고, 12명의 제자를 삼았지만,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제자들 하나 변변하게 없었습니다. 젯밥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제자 가륫유다에게 결국은 팔려버리고 말았고, 사랑했던 제자 베드로에게 배반당하고, 예수님의 기적으로 빵을 먹고, 병이 낳았던 수많은 사람들, 한때는 예수님의 말씀한마디에 열광했던 사람들이 돌변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아무런 죄가 없으셨던 그분이 이땅의 어떤 흉악범보다도 더 흉악한 죄를 뒤집어쓰시고 최악의 사람에게 내리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침벧음을 당하고, 조롱을 받으시고, 채칙에 맞으시고, 못 박힘을 받으시고 결국은 십자가에게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땅에 예수님만큼 고난을 받아본 사람이 있습니까! 이 땅에 예수님만큼 배반을 당해본 사람이 있습니까! 이 땅에 예수님만큼 서러움을 받아본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위로가 되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이 그 모든 것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을 이시고, 무덤을 여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위로자 이십니다. 이 땅에 어떤 고통 속에 잇는 분들도 이분 예수님을 만나면 다 위로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복음성가 중에 “ 내 삶의 위로자 예수” 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가사의 내용이 좋아서 소개를 합니다.
힘들어 혼자 울고 있을 때  누구를 생각하나요 / 낙심해 혼자 울고 있을 때  누구를 의지하나요 /
슬픔이 가슴으로 흐를 때  누구를 찾으시나요 / 아픔이 파도처럼 밀릴 때  누구를 의지하나요 /
세상에 어렵고 괴로운 일 많은데 누가 나의 위로될까 / 내게로 오라 내 품으로 오라  내게로 와서 쉼을 얻으라 / 내 안에 계시며 / 내 뒤에 계시며 /  내 곁에 언제나 계시는  내 삶의 위로자 예수/
슬픔이 가슴으로 흐를 때  누구를 찾으시나요 / 아픔이 파도처럼 밀릴 때  누구를 의지하나요 /  세상에 어렵고 괴로운 일 많은데 누가 나의 위로될까 /  내게로 오라 내 품으로 오라  내게로 와서 쉼을 얻으라 / 내 안에 계시면 내 뒤에 계시며 / 내 곁에 언제나 계시는 내 삶의 위로자 예수 /
세상에 어렵고 괴로운 일 많은데 누가 나의 위로될까/  내게로 오라 내 품으로 오라 / 내게로 와서 쉼을 얻으라 /  내안에 계시면 내 뒤에 계시며 내 곁에 언제나 계시는 내 삶의 위로자 예수, 예수 그리스도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 주실 수 있습니다.

3. 어떻게 위로를 할까!
오늘 본문에서 시므온은 하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안고는 그의 찬송의 내용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라”(29-32)
그는 놀라운 감동 속에서 아기를 만났습니다. 시므온은 그들에게로부터 아이를 안고 하나님을 높이 찬송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난지 7일밖에 되지 않아서 눈도 잘 뜨지 못하는 이 작은 2~3㎏되는 어린아이를 안고 가슴에서 복 받쳐 오르는 터져 나오는 찬양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아이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향한 궁극적인 해결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찬송 가운데 이 시므온의 찬송은 저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의 생애는 이 한 순간을 위해 달려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참된 위로를 기다리며,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의 영이 함께 하시며 살 때에 내가 이스라엘의 위로가 되는 참된 구원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할 그 때 그 이후로부터 시므온의 인생은 오로지 그리스도께 매이는 생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 오랜 세월 기다리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메시야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예수가 이스라엘의 위로가 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우리의 고민은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하나! 이런 것 때문에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상을 당한 사람을 만나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가 몰라서 고민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말로 위로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정한 위로는 많은 말이 아닙니다. 그냥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냥 함께 울어주고,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냥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도 있습니다. 오늘 시므온은 하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시므온에게 뭐라고 말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아기가 울고 있었는지, 웃고 있었는지, 자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그 사실 하나가 무한한 위로였습니다.
물론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수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말씀한마디, 한마디가 다 위로의 말씀입니다.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 것들이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을 응답해주십니다. 병을 고쳐주시기도 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하시고, 가난을 부유함을 바꾸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이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돈만이 위로가 된다면 부자들 중에서는 불행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건강만이 위로라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이 힘들고 괴로울 때, 술 담배만이 위로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없다가도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은 우리를 더욱 상하게 하는 것 일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우리의 영원한 위로자로서 하신 말씀이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의 가정 속에, 여러분의 사업장 속에, 여러분의 생업 속에 함께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위로자이십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은 떠나지 않으시고 여러분을 혼자 놔두지 않으시고,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여러분의 위로자로 하나님은 보내주셨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 주님과 동행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주변에는 아직도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줄 사람이 없는가! 하면서 위로자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여러분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위로자로 가시길 바랍니다. 그들과 함께 있어주시길 바랍니다.  안아주고, 품어주고, 울어주고, 웃어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은 세상의 위로자로 다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의 마음속에도 예수님이 그의 일생의 위로자가 되도록 예수님을 전해주시는 이 대강절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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