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일의 말씀

억지로 진 십자가 막15:21-23

억지로 진 십자가             마가복음 15:21-23             종려주일   10.3.28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환영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옷을 벗어서 길에 깔아놓으면서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이 지나는 것입니다. 그 한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그 고난주간의 극치를 이루는 것은 역시 목요일저녁부터 금요일 정오까지 이어지는 속전속결로 재판과 사형집행까지의 초스피드로 진행된 사형집행과정입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급하게 일을 진행했을까요! 인간들의 죄악의 극명함을 보여주는 한 면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단번에 이루시는 뜻 또한 내포되어 있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안치를 합니다. 그리고 삼일 후 주일새벽에 예수님은 “내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시던 그 말씀대로 부활하시는 영광스러운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주간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나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시간들을 묵상하면서 다른 때와는 다른 삶을 살아보시길 바랍니다. 내일부터 이어지는 특별새벽기도회에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집이 먼 분들은  집 근처에 있는 교회라도 찾으셔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보와 함께 나눠준 고난주간 묵상자료집을 보시면서 말씀을 묵상하는 한 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이주간에는 그동안 자신이 좋아했던 것들을 한가지라도 절재해 보시길 바랍니다. 커피를 너무 좋아하시던 분은 한 주간 안마시든지, 젊은 사람들은 게임을 좋아하면 한 주간 금해 보시던지, 혹시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음주, 흡연의 문제를 안고 계시는 분은 이번에 도전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성경을 잘 읽지 못했던 분들은 성경을 한번 시간을 정해놓고 읽어보시고, 기도가 부족했던 분은 새벽도 좋고 저녁에 퇴근하고 교회에서 가까운 분들은 교회에 들려서 기도도 해보시길 바랍니다. 좀더 깊은 영적 생활을 해보시고 싶은 분은 하루에 한끼라도 금식을 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비록 자그마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런 일들을 통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많은 유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맞이하는 부활주일은 여러분에게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갖게 하는 복된 주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 가다보면 어떤 일을 할 때에는 좋아서 하는 일도 있고, 싫어도 하는 일이 있고, 억지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런 일들을 다해놓고 나면 나중에 결국에는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것은 너무 심한 채칙에 모든 체력이 고갈이 난 예수님이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마침 시골에서 올라온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을 로마군병이 강제로 불러내서 대신 십자가를 지우는 장면입니다. 
오늘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고난주간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 스스로 진 십자가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처형은 그 당시 로마뿐만 아니라 고대 아프리카, 애굽, 바사, 헬라 등에서 유행했던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하게 치욕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로마 시민들에게는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예나 반란자들, 극악한 강도들에게 이런 십자가형이 주어졌습니다. 보통 십자가에 달리면 약 3일 정도의 고통을 겪게 되는데, 탈진과 아픔 때문에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고 난 후에 사흘째에는 절명하게 됩니다.
고통과 탈진이 너무나 심할 경우에는 자비를 베풀어주는 방법으로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창으로 찔러서 죽음을 재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형수의 시체는 연고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들에게 주어서 무덤에 장사하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나 아주 극악한 사형수의 경우에는 십자가 틀에 내버려두어 독수리의 밥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3일을 계신 것이 아니라 오전 9시에 처형을 당하셔서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겪으신 십자가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한마디로 표현한 그 말 앞뒤에는 우리가 감히 추측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난과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들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은 고민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이 십자가를 피해갈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헤롯왕 앞에 끌려갔을 때, 그가 원했던 기적하나라도 보여주었으면 풀려날 수도 있었습니다. 말 한마디만 하셨어도 십자가형은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순간마다 침묵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유는 그길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오늘 여기에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그 길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길을 그 고통의 길을 알면서도 스스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선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구원입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엘 같이 가보자고 했습니다.  가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 막 병아리들이 삐약 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탉은 죽어 있었습니다.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그 몸에서 피를 다 빨아먹었는데도 그 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 그때 목사님은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멸망 받기 때문입니다. " 그 농부는 그 뜻을 깨닫고 즉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느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짊어지신 것입니다.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면서도,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선택으로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게 된게 된다는 것은 자신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고,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처절한 부르짖음에도 듣지 않으시고 죽음으로 내모는 잔악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구원은 죽음을 통해서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대신 저주를 받아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저주라는 것이 죄가 있는 자가 짊어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형은 예수님만 당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똑같은 형을 그날 두명의 강도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양옆에 함께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가치를 마치 양옆에 달린 강도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리려고 의도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양옆의 강도들이 받은 십자가형은 자기 죄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자기 죄로 죽는 것은 어느 누구의 죄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는 사람만이 대신 죄를 짊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심지어 빌라도 마져도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군중에 눌려서 그는 스스로  죄를 찾아도 찾아도 발견하지 못했던 그분을 십자가형으로 내어놓은 빌라도는 지금까지도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고백하면서 빌라도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예수님만의 십자가였습니다.

2. 자기 십자가
그리고 또 하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짊어지고 있는 자기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져야하는 자기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제자들이 지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도 자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만이 질 수 있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것 역시 누가 대신 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지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한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을 늘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번은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서 멀리 있는 곳으로 짐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남자도 다른 사람들처럼 짐을 짊어지고 나섰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그 남자는 다른 이들보다 자신의 짐이 더 무겁고 커 보여 몹시 기분이 나빴습니다. "난 역시 재수가 없어!" 그는 갑자기 힘이 빠져 가장 뒤쳐져 걸었습니다. 길이 너무 멀어 마을 사람들은 중간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되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그 남자는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몰래 일어나 짐을 쌓아둔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갔습니다.
그 남자는 어둠 속에서 짐을 하나하나 들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중 가장 작고 가벼운 짐에다 자기만 아는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날이 밝자 그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어젯밤에 몰래 표시해 둔 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짐은 바로 어제 온종일 자신이 불평하고 지고 온 그 짐이었습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로마 사람들이 주문하는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에 아버지 요셉을 도와 열심히 목수의 일을 하셨으므로 예수님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전문가이셔서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한 십자가를 친히 만들어주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만일 어떤 주인에게 두 마리의 소가 있는데 한 마리는 약하고 힘이 없고 또 한 마리는 강하고 힘이 세다면 어느 소에 무거운 짐을 지울까” 물론 강하고 힘이 센 소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나의 십자가가 유난히 무겁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질 만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짊어지라고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는 결코 우리가지지 못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 됨의 표는 우리의 어깨에 놓여져 있는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이지만 우리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는 구경꾼입니다. 결코 제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제자입니까! 아니면 구경꾼입니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십자가인 것입니다.

3. 억지로 진 십자가
그리고 또 한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억지로 진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 이 억지로 십자가를 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시골에서 올라왔습니다. 도시를 여기 저기 두리번 거리다가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하면서 고개를 빼고 구경을 했던 구경꾼의 한사람이었습니다. 왠 청년이 무슨 흉악한 죄를 졌는지 십자가를 지고 로마병정들의 채찍을 맞아가면서 욕을 먹어가면서 힘겨운 발걸음을 떼고 있는 사람을 본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고 정말로 구경 삼아서 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때 로마병정들이 예수가 더 이상 지켜서 정말로 자신들이 보기에도 한 걸음도 더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 고개를 빼고 구경을 하고 있던 시골에서 올라온 덩치가 좋아 보이는 구레네 시몬을 보고서는 “너 이리와! ”하면서 강제로 불러내서는 강제로 예수님이 지었던 십자가를 그의 어깨에 짊어지웠습니다. 그리고 대신 걸어가라고 합니다. 그는 얼떨결에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로마병정들에 의해서 강제로 십자가를 짊어졌던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을 하다가 보면 나는 싫은데, 억지로 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정말로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분위기 때문에, 직분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짊어지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얼마나 하기 싫습니까! 이런 일은 전혀 능력이 오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더 힘이 들게 마련입니다.  오늘 구레네사람 시몬이 짊어진 십자가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아무도 짊어지지 않는 십자가를 억지로 지었던 그는 온 인류를 구원하는 엄청난 구속사역 속에 놀라운 부분을 감당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예수님이 짊어지셨던 십자가를 비록 짧은 구간이지만 함께 지는 놀라운 은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몬은 나무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셨습니다. 시몬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다 오른 후에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지는 십자가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의 어깨에서 떨어져 나간 그 십자가에 주님이 못 박히셨습니다. 시몬은 우뚝 세워진 십자가 밑에서 무엇을 생각하였을까요? 
"저 십자가에 달린 것이 나였다면?" 아마도 그는 몸서리치며, 죽어 가는 예수를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그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 루포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다가 로마서 16장13절에 다시 등장을 합니다.
“주안에서 택함을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그런 말이 로마서에 사도바울의 이야기로 등장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루포의 어머니는 누구일까요? 그때 예수님을 대신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구레네 시몬의 아내입니다. 바울 시대에 시몬의 가정은 로마에 살고 있었고 주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라 하였으니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이 확실합니다. 더구나 대 바울 사도가 이 구레네 시몬의 부인을 내 어머니라고 부른 뜻이 무엇일까요? 구레네 시몬의 부인은 바울 사도의 선교 사역을 위해서 어머니 같은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억지로 지은 십자가도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되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혹 억지로 지게 되는 십자가가 있다 할지라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분위기 때문에 억지로 지게 되는 십자가라 할지라도, 짊어지게 되면 그것은 우리에게 은총으로 되 갚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십자가를 세워 놓고 보면 더하기표가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등에 지면 곱하기표로 변합니다. 기독교는 더하기의 종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하는 곱하기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를 등에 진다는 것은 결코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더욱 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해 타산적인 사람은 희생의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곱하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는 십자가입니다.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남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과 수치 받음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제자가 지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스스로 지는 십자가이든, 자기십자가이든, 억지로 진 십자가이든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의 생을 변화시켜주는 엄청난 것이 됩니다.
바라기는 이 고난의 주간에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땅히 져야 할 것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