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선교에 있어서 일본인의 종교의식에 관한연구
장경태선교사
1. 서 론 일본은 실제 인구 보다 종교 인구가 150%나 더 많다고 한다. 사실 종교성이 많은 민족이기도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기독교인은 1%에 불과한 현실들 앞에서 선교사의 한사람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일본종교는 인간 중심이어서 인간은 피조물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신이 피조물이 되며 특히 사람은 죽으면 모두 신이 된다는 전통적인 신도사상이 젖어있어 현 세계에서 보기 드문 우상 천국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호렙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있게 말지니라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통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그것들을 세우지 말라"(신5:7-9f)고 엄치 명령하셨다. 경제나 문화면에서 선진을 달리는 그들이 아직도 자연 숭배나 정령 숭배의 토속적인 신앙에서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지극히 인본주의적 신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누군가가"일본은 신학이 없고 인간학이 있을 뿐이다"1)라고 혹평을 한 바 있다. 신은 인간의 요구를 들어 주시는 분으로만 존재하여야지 그 이상은 안되며 더우기 인간에게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다. 그러기에 그들은 신 앞에서 죄의식이나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이와같이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일본인의 종교관은 오늘날 일본기독교 선교 사역을강하게 자극하고 있다.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배척하는 그들의 범신 사상은 과연 어디에 근거하고 잇으며 그들이 주로 갖고 있는 종교들은 어떤 것 인가를 완전히 파악함으로써 일본선교의 전략을 세움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제는 한국 교회가 일본 교회와 손잡고 일본 복음화는 물론 아시아 및 세계 선교에동반자로서의 그 사명르 다 해야될 시대적 소명을 갖고 적극적으로 한.일 선교협력을 추진할때이다. 더우기 2002년에는 월드컵 세계축구를 공동개최하는 동반자적인 나라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검검하고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본다. 선교의 가장 적절한 시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글문을 엽니다.
Ⅱ. 日本人과 宗敎 1. 일본인의 의식구조와 종교관 1). 일본인의 의식구조. 단체나 집단속에서 개성을 누리는 일본인들의 사회구조는 개인적인 면 보다 집단이 우선되는구조이다. 그들은 자신이 타인과 다르기 보다는 동일하며 타인 보다 우월하거나 저조하여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수치로 알도록 유아시절부터 교육을 받고 자란다. 마쯔리 (祭り)라고 하는 마을단위의 축제를 할때면 모든 마을사람들이 다 참여하여 그들만의 공동체의식을 심고 있는 것들을볼수 있다. 이러한 집단의식이 선교를 어렵게 하는 큰 요인중에 하나이다. 자신이 속해잇는 가정, 학교,직장, 친목회들의 조직이나 집단속에서 벗어나면 늘 경계적인고 배타적이며 자폐적이다. 그러므로 타 문화, 타 민족, 타 국가에 대해서 극히 배타적이다. 일본에 우리 동포들이 70여만명이나 살고 있지만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대신에 귀화를 종요하고 있다. 이렇게그들은 혈연이나 사상 또는 생활방신기 국가적으로 혼합되는 것을 극히 배제한다. 일본인 학자會田雄次는 그의 저서 [일본인의 의식구조]에서 일본을 風土歷史社會라고 표현하면서 일본인의 ------------------------- 1) 택정언, [일본기독교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1979),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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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을 유럽의 꿀벌과 일본의 꿀벌을 예로들어 설명했다. 유럽의 꿀벌을 일본꿀벌 집에 넣으면어려움 없이 적응해서 살지만 일본 꿀벌을 유럽 꿀법 집에 넣으면 그 집을 부숴버리고 자기에게맞는 벌집을 만든다는 것이다.2) 그래서 우리의 역사를 왜고하는 일도 그들에겐 별로 큰 일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박물관이나 자료관에 가보면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것이 많이 있지만 그들은 그덧이 자기들의 역사 자료인 것처럼 소개 하고 있다. 그들의 식생활이나 생활 환경이 서양화된 것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적절히변경하며 자신의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 일본에서는 많은 외국어들이 들어오고 사용되지만 그 외국어들 조차 자기네들 마음대로 다시 제조립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인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만들어준 요인 중의 하나가 [和意識] 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대립이나, 시비, 다툼을 싫어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말로서 부드럽고 온화하며 조용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런 화의식속에서도 필요시엔 이중성격을 가질 수 있어 임진왜란과 한일합방, 세계대전을 일으키기도 했다. 베네딕트(Benedict)는 이러한 일본인의 성격을 [국화와 칼]이라는 책에서잘 묘사해 주고 있다. 국화는 온순, 심미, 예의, 순종, 겁장이, 진취성의 상징이며, 칼은 호전, 군국주의, 오만, 완고, 용감, 보수적 임을 성격상 완전 대립하고 있으마 이 두가지 성격이 모순 없이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다.3)
2). 일본인의 종교관 일본인들이 받드는 종교는 필요적 종교일 뿐 신앙적 종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일본에는 절대신이 없고 인간의 입맛과 형편에 따라 신을 만들고 종교를 변화시킨다. 일본인들은 인본주의적 종교 사상을 갖고 있기에 신 보다는 인간이 그들의 중심사상이며 신은 인간의 피조물로 등장한다. 우리나라나 서구 기독교 국가에서 믿고 있는 일일신관은 일본인의 사상속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기독교가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은 점차 신으로서의 실체를 잃고 일본식 하나님인 "가미사마(神樣)" 로 변화되어 그 거룩성과 절대성을 상실하고 말게 된다. 모든 신이 일본에서는 똑같은 "가미사마"이다. 우리말로 "하나님"과 같이 확실히 구분되는 말이없이 山神이나 太陽神과 같은 신과도 구분할 말이 없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신이 될수 있다고 믿고 사물도 신으로 섬길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범신사상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의 신관은 인간을 미화하고 확장한 것이다. 일본의 신은 인간사이의 주종관계에서 비롯된 上司 즉, 자기 보다 위엣사람 정도로 해석되고 있어 제사하고 기뻐하는 일은 있어도 신의명령을 듣고 복종한다는 요소는 전혀 없다.4) 일본인들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종교를 싫어한다. 인간 축에서 일방적으로 신에게요구하느 것으로 만족한다. 그래서 일본교회에 가보면 마치 기념식 행사에 참여하는 기분이다. 예배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종할 뿐 그 이상은 없는 것이다. 루드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일본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비교해서 [수치의 문화와 죄의 문화]라고 했다. 5) 즉 일본의 문화는 수치 즉 인간들 사이의 수치를 중시할 뿐이다. 일본인에게서는 신 앞에 죄로인해 고민하는 고상한 인간상르 찾아 볼 수 없다. 신보다는 사람과의 현상유지에 더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개인적으로 상대하면 인정이 많고 친절한 데, 단체나 국가적으로는 냉정한 이면성을 갖고 있다. 크리스챤이 생겨난다 해도 국가적인 어떤 이해 관계나 조직, 단체의 영향이 있을때 쉽게 배교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상황에 따라 전향 내지는 배교자가 많은 ------------------------ 2) 會田雄次. [일본인의 의식구조], 최명순 역(서울:자유문화사,1978), pp.36-37. 3) Ruth Benedict,[菊と力(日本文化型)], 長谷松治 역, (現代敎養文庫,1975), pp. 6-7. 4) [현대종교], 1983. 7, p.170, 1983 9, p.180. 5) [현대종교],1983. 9, p. 182.
- 2 - 것은 신 개념의 불명확 또는 죄의식의 결여 그리고 무책임 체제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파생하는일본인의 특성으로 일본 선교의 커다란 문제점 중의 하나이다. 6) 신을 창조하는 일본인, 인본주의적 신관을 가진 일본인, 누군가가 말했듯이 일본은 우상의 백화점이요 한국은 기독교의 백화점이라는 말에 실감이 난다고 할수 있겠다. 2. 日本의 宗敎 1) 일본의 제신(諸神) 일본에는 가지가지 신들이 너무 많이 있다고들 한다. 집안에 설치 되었는 가미다나(神棚)를 보면 천조황대신(天照皇太神)의 위패만이 아닌 출운대사(出雲大社), 고봉신사(古峯神社), 추엽신사(秋葉神社)가 있다. 하나하나 헤아리려면 한이 없다. 시골 농가의 문 위쪽에보면 부적 같은 것이덕지덕지 붙어 있다. 이 위폐와 부적의 의미는 [보호하고 지켜 주신다]는 것으로 그 종류가 많으면 많을수록 가지가지의 신들이 그 집에 충만해 있어 그 집을 보호하고 지켜주신다는 것이다.일본 민속학이 지금까지 지적해 온 신들의 이름을 들어보면 산에는 산신, 밭아는 밭신(田神), 불이 있는 곳에는 화신(일명 荒神) 연못이나 우물에는 수신, 주택에는 집신(지방에 따라 地神,地主神), 도로경계에는 도조신(道祖神)이나 석신(石神)등이 있다. 마을과 동네마다 있는 신사(神社)나 절들이 있는데, 신사에는 씨신(氏神), 산토신(産土神), 또는 여러가지 영험(靈驗)으로 알려진 유행신(流行神)이 제사되어 지고 있다. 절에도 경내에 신이 있어 특불(特佛)인 지장(地藏), 관음(觀音)등과 같은 사람들의 수호신으로 제사되고 불공드리는 날은 신사의 제사날과 같이 떠들썩하다. 이러한 잡다한 신(神佛)의 현상을 표면적으로 관찰한 것 만으로도 일본인에게 있어서 신의 존재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일본인의 신에 대한 개념 규정이 매우 애매하 것으 많은 식자(識者)가 지적해 온 바와 같다. 기독교의 신관에 따라 신은 전지 전능의 지상자(至上者)라고 하면일본의 신들중에 여기에 부합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일본의 신은 "God"이 아니고"Deity" 혹은 "Spirit" 에 가까운 존재로 인식되어 지고 있다. 바로 정령숭배 자연숭배에 기초를둔 것이다.7) 일본의 민간 신앙에서 널리 보여지고 있는 또 하나의 현상은 생전에 원한을 품고죽은 인간이 사후(死後) 섬김을 받아 이 한(恨)을 진정시키기 위해 신으로 제사하는 것이다. 사람을 신으로 제사하는 습성은 일본의 신도에서도 극히 중시되는 문제이다.
2) 현대 일본의 종교 문제 오늘의 일본 사회에 잇어 종교가 주고 있는 사회적 역활은 현 상태로 확대 일로를 걷고 있다.태평양 전쟁의 패전까지 70연년에 걸쳐 국민을 지배해 온 국가신도체제(國家神道體制)는 국가의제사가 되어진 신사(神社) 신도(神道)의 바탕에서 이에 종속하는 교파신도(敎派神道), 불교, 기독교의 각 공인 종교를 엄격히 통제하고 천황제적 종교 질서에서 벗어난 신 종교를 감시하고 압박하였다. 이 체제의 바탕에서 각 종교는 자주적인 전개를 저지 당했고, 자본주의 사회의 성숙에대응하는 사회적기능을 극히 부분적으로 충족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근대화된 사회에서는 종교가 정치로 부터 분리되어 개인적인 일로서 여겨지며 각 종교는 서로 부분적 진리를나눠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서 타 종교의 존재를 용인하여 종교의 상호 이해와 협력을 추진해 나가고 있는 것이 대세이다. 1946년에 개정 공포된 일본국 헌법은 제 20조와 89조에서 엄격한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국가 공권력이 종교에 관여하지 못하고 공금(公金)을 종교에 지출하는 것이나 공교육에종교를 삽입시키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일본의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국가신도체제 하의 일본에서는 아라히도 가미(現人神)인 천황이 군림해서 국민에게 강제로 숭배케하고 국가 권력이 증오를 품고 중세적인 종교 탄압을 반복했다. 세계 제2차 대전에서 일본 군국주의를 물리친 연합군은 ------------------------- 6) 최길성, [일본학 입문](서울: 계명대학교 출판부,1980), pp.9-12. 7) 宮田登, [生き神信仰;人を神に祈る習俗] (日本:槁書房1981).pp.4-5. - 3 - 일본에 있어서 종교의 자유의 확립을 요구했다. 포츠담선언은 제 10항에서 종교의 자유를 내걸고있다. 이것을 수락하여 항복한 일본에 있어서 국가신도의 금지, 천황의 신격부정의 실현은 민주주의의 승리이며 당연한 처사였다. 일본 사회는 구미의 기독교 사화나 중동, 아시아의 이슬람 사회와 달라 역사적으로 단일종교가 지배적으로 점한 적은 없다, 민족과 언어가 거의 단일한데 반해종교가 다원적으로 발달해서 병존하고 있는 것으 일본 종교의 현저한 특징이다. 명치유신에 의해 국교의 자리에 올랐던 신사신도(神社神道)는 종교 기능의 부족으로 70여년의역사로 종교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한결같이, 불교라고 해도 강호시대의 국교제도에 의해 종파적개성이 대폭 상실되었고 균등화 되었지만 본래 법화계, 진언밀교계, 정토계, 선계의 각 종파는 가지가지 독립의 종교에 가깝다. 명치시대의 교파신도에 편성된 천리교(天理敎)나 금광교(金光敎)는 신사 신도와는 이질적인 종교였다. 新 종교에는 혼합주의를 본질로 하는 종교나 독자적인 신화를 갖고있는 종교도 적지 않다. 또신,구기독교는 일본의 전통적인 종교 생활과 단절된 체질을 갖고 있는 채 100만인을 넘는 신자를가지고 있다. 신교(信敎)의 자유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 선정한 종교를신앙하고 그 종교를 확장하는 권리와 특정의 종교 없이 어떠한 종교도 신앙하지 않으면서 종교와는 무관계한 생활을 국가로 부터 보장받는 권리이다. 신사본청이 민족종교의 전통에 입각 국민중의 성인 인구를 모두 신사의 씨자숭경자(氏子崇敬者)로 헤아린다거나 일연계(日蓮系)의 종교가[세상의 모든 사람이 묘법(妙法)으로 돌아 온다]는 등식의 것들은 종교적 신념일 뿐 사회적정치적 주장의 근거로는 될 수 없다. 근년에는 군국주의 부활, 대국주의 고양이라는 정치의 반동화(反動化)의 일환으로 정부와 자민당에 지원을 받은 국가신도 부활 운동이 격화되어 왔다. 육,해군의 종교 시설인 야수꾸니 신사의국가의 관리가 일정에 올라 신사신도의 본종 이세신궁(伊勢神宮)의 국영화도 주장되고 있다. 여기에 기독교를 비롯 불교,신 종교의 각 교단 연합체에 의한광범위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8) Ⅲ. 日本에서의 基督敎(改新敎)宣敎 1.開國과 基督敎 도꾸가와 정권이 250여년간 쇄국정책을 폈지만 19세기에들어와서 국내외 정세는 개국의 방향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1854년 미국동인도 함대 사령관이었던 페리(Perry)제독은 군함10척, 대포250문 승무원 1천8백여명을 이끌고 와서 조약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1854년 3월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였고 바야흐로 1858년에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9) 일본의 개항은 일본의내적 발전에 의한 즉, 봉건적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되어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자발적인개항이 아니라, 선진 국가인 미국의 외압에 굴복한 후진 국가의 타의적 개항이었다. 미국은 1859년 자국인의 신앙 생활을 돕기 위해 자신의 교회를 거류지 내에 건립함이 가하다는조약을 제결하였다. 이에 일본 개항지에 교회가 건립되고 선교사들이 상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개항시(開港市)에 머물면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영어를 가르치며, 의료 봉사를 하고 성서 번역에 착수하는 등 선교를 위해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메이지 유신의 정권 투쟁에 패한 무사족들이 입신을 위하여 새로운 지식을 구하러 올때, 지리, 역사, 과학을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신약성서와 기독교를 소개하였다.10) 일본의 개국 사실을 알게 된 구미 여러교회, 교파들은 선교사를 일본에 파송하고 외국인 거류지에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기독교선교가 금지되엇었기때문에 그들의 선교는 주고 개 ------------------------------ 8) 村上 重良, [現代宗敎と政治](東京:東京大學出版部, 1978), pp, 172-176. 9) 김수진, [일본개신교회사](서울:홍성사, 1993), p. 91. 10)도히아키오, [일본교회사]김수진역(서울:기독교문사.1991) 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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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이나 사실학원들을 통하여 영어과 과학을 가르치는 일과 의료 선교사들의 진료사업이 주된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들과 접축된 일본인들이 세례를 받는 사람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1868년에 이루어 지면서 새정부는 왕정복구를 부르짖으며 천왕을 정점으로 하여 통국강병,신산흥업(殖産興業)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구미열강의 압박으로부터 독립된 국가 건설을 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 일을 위해서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개화정책을 취하였다. 1870년대부터 80년대에는 이러한 기운과 그 반대 기운이 교차하는 격동의 시기라고말할 수 있다.11) 메이지 정부는 막부의 기독교 금지정책을 그대로 지속시켰다. 1868년 3월 태정관 포고로"기리스탄 종문의 의는 절대적으로 금지됨..."이라는 포고문을 전국에 게시하였다. 여기에 반발한 외국공사들의 항의는 매우거셌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설상가상으로 나가사키(長崎)의 카톨릭 성도3천여명을 체포(1868.6월)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그로부터 2년뒤 외국 공사들의 항의로 겨우 풀려나긴 했으나 이를 겪은 쌍반간의 긴장을 전쟁을 방불케 했다.12) 그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기독교가 일본신을 모독하고 풍속을 문란시켜 부모형제간의 불화를야기시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천황 중심으로 한 통치기구를 확립하기 위해 황실신도을 중심으로 신도국교화 정책을추진하고 있었고 기독교는 여기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러하 상황에도 기독교 신자는 차츰 수가 눈에 뛰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시의 서구 문명에 대한 적극적 풍조에 기인한다. 거기에는 고상한 인격과 높은수준의 지식을 소유한 선교사들 자신의 영향이 작용했다고 본다. 그들은 자신들의 학교를 설립하기 전까지는 주로공,관립학교에 초청되어 가르쳤고 사설학원을 설립하면서 부터는 많은 학생들이 영어와 서양학문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후 서구 기독교 국가로 부터 빗발치는 항의로 1873년 금제의 령을 해제했다. 그러나 젝구 헌법이 일본의 패전에 따라 무효가 될때 까지는 일본 국가주의 의 근간은 천황제에 있었으므로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항상 수동적인 자기 표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후 1872년 1월 발라흐 선교사에게 영어 공부를 하던 학생 중 결신자30여 명을 중심으로 교회를창설함으로써 일본에서는 최초의 프레데스탄트 교회가 요꼬하마에 세워졌다.1873년 법률개정으로선교 할동이 자유로와지자 선교의 열이 고조되면서 1877년 부터는 일본인 교역자의 선교활동이시작되었다.
2.日本基督敎 宣敎의 課題 국가로 부터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어 기독교 활동이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를 중심하여전후부터 급속도로 경제 성장을 이룩한 일본은 세계 강국의 대열에 끼게 되어 일본인들 마음 속에 "세계 위의 일본"이라는 의식이 심어져 종교로 부터의 위안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되었다. 더우기 무교회주의가 일어나 기독론을 신약성서에 두고 성경연구에 중점을 두며, 교회 건립과 성찬 예식을 반대하여 교회 활동에 적지 않은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교회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 중에 동기가 강하지 못한 사람은 쉽게 타락하게 된다. 그 대부분의 이유는 그들의 가정식구가 전통적인 사상이나 문화적이 가치관에 의하여 기독교 신앙 생활을 제지시키며, 또 일본의의식 구조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인식과 사회에 깊이 스며드는 악의 그림자 때문이다. 신도와 불교의 영향이 아직도 일본인들의 의식속에 뿌리깊게 박혀있고 강력한 국가주의의 교육에 의해 반 기독교 사상이 아직도 농후하여 기독교 금제의 영향이 잔존해 있으며 기독교 사상과서양 사상에 대한 국민의 혼동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활발한 발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 11) Ibid.,p.38. 12) Ibid. - 5 -
또한 일본신자들은 전도에 있어서 적극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타인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것이 예의로 되어 있어서 전도하는 것이 지칫하면 사생활 간섭내지는 종교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어지기 때문이다. 일본의 기독교 정세를 보면 그 역사에 비해 양적 성장은 대단히 저조하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들의 질적 수준은 상당한 위치에 도달해 있다. 그래서 일본은 신학은 있으나 신앙은 없다고 하는 이도 있다.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차원 높은 종교라고 인식되어 있어 지식층의 사람들이 믿는 종교라고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젊은이들 특히 결혼을 앞둔이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대단히 매력있는장소로 바뀌고 있다. 그들은 서양식 결혼식을 동경하고 있는데 특히 교회에서의 결혼식을 선호하고 있다. 이때문에 결혼식전용 선교단이 생겨났고 이선교단에는 많은 목사들이 결혼식주례로 토요일과 주일을 보내고 있으며. 주일저녁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기도 한다. 그러한 결과일까! 아무런 종교를 갖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만약하나의 종교를 택한다면 어느 종교를 택하겠느냐는 앙케이트에 상당한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택했다는것은 일본선교의 문제가 어둠지만은 않다는것을 보여주는 희망적인 사실이라 할수 있겠다.
Ⅳ. 結 論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인으 사상을 종교적 입장에서 볼때 한사람이 일본인이 불교,신도,기독교를 동시에 다 믿을수 있는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다는것을 볼 수 있다. 태어나서는 신사에서 결혼식은 교회에서 장례식은 절에서 거행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의식구조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일본인의 종교는 필요에 의한 종교이지 신앙에 의한 종교는 아닌것이다. 인본주의와 편의주의에 기초한 종교관과 자연숭배와 정령숭배에서 발전된 토속신앙이 오랫동안 일반인들의 정신 생활을 지배해 왓다. 그러나 이제는 고도의 경제 발전과 선진 문화, 사회 속에서 정신적 불안과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 의식은 대개 지식층에서 빨리 나타나고 있고, 이들 중에 많은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어서 일본 사회에서는 기독교가 고차원의 종교로 일반에게 인식되어있다. 따라서 지식층이 아니면 그 높은 진리를 깨닫기 힘들어 교회를 어려워하는 경향을 전혀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일본 선교사는 그들의 의식구조를 잘알고, 그들이 섬기는 종교도 잘 파악하여 그 의식속에서의 헛점을 파고 복음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게 된다. 또한 일본에 토착화된 민간종교와 외래종교가 모두 애니미즘적 세계관인 조상숭배의 원리를 이용하여 토착화에 성공한 것처럼, 일본의 정신적 풍토에 토착된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본인들이 그들의 삶의 자리로 부터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일본을 연구할수록 선교사의 한사람으로 늘 답답한 마음이 생기지만 그러나 그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면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변화될것 같지 않는 일본이지만본인이 일본에 처음에 들어온 10수년전과 지금은 많은 영적부흥이 일어나고 있는것을 바라보게 될때결국 선교의 모든것은 하나님이 이끌어가고 있는것이구나! 라는사실을 다시 한번깨닭게 된다. 깊은 연구는 못되었지만 본 연구를 통하여 일본을좀더 공부할 수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글문을 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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