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사는 삶 히브리서11:1-3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단의 일기라는 재미있는 글이 인터넷에 떠돌아 다녀서 읽어보았습니다.
“난 정말 그녀석이 싫다. 그런 녀석은 처음 본다. 아침에 일어나서 큐티를 열심히 하는 것은 인정한다. 거기까진 내가 봐준다. 하지만, 왜 기도를 1시간씩이나 하느냐 이 말이다. 도대체 기도를 하는 멍청한 녀석들은 이해를 못하겠다. 기도할 시간에 좀 더 전공 공부를 한다던지, 좀 더 좋은 일들을 하면 기도보다 더 눈에 보이는 결과를 경험할텐데 도대체 왜 멍청하게 무릎 아프게 한시간씩 기도하는지 모르겠다.
거기까진 내 인정한다. 그런데 왜 기도 내용이 그 모양 그 꼴이냔 말이다. 도대체 자기를 위한 기도가 별로 없다. 자기와 상관없는 다른 친구들을 위해 왜 기도하냔 말이다.
더 이해 못 할 일은 그 녀석 맨 날 괴롭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이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내가 맨 날 기도할 때 쓸대 없는 짓이라고 생각을 집어 넣어줘도 도대체, 무식한 건지, 단순한 건지 알아듣지를 못한다. 내 살아생전에 그렇게 무식하게 기도하는 놈 첨 본다. 정말 내 살이 빠진다. 그런데 거기까진 괜챦다 이거다.. 왜 말씀을 그렇게도 꼼꼼히 보냐 이거다.
대충대충 보고 대충대충 생각하면 될 걸 가지고, 왜. 말씀 하나가지고 그렇게 끄냔 말이다. 제대로 성경을 본다느니 하면서 성경을 볼 때마다 알게 해 달라고 기도는 그리하고 관주나, 관련 서적들은 또 왜 그렇게 보는지. 성경은 그냥 삼국지나, 도덕책같이 좋은 책들 중 하나로 여기면 될 것인데 왜 하나님 말씀으로 그렇게 깊게 생각하며 인식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더 환장 하겠는건.. 그걸 그대로 한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지. 그 친구가 성경을 보더니만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막 떠드는거야.. 그래서 내 부하 중 한명 보내서 좀 타일러줬지.. ''아직 아냐. 좀 더 시간을 봐가면서 하라구..'' 그랬더니 그 친구는 더 확신이 있는 듯. 멍청하게 막 복음을 전하는거야.. 물론, 내가 좀 힘을 불어 넣어줘서 그 친구를 바보 만들었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녀석이 거기서 실망하거나 슬퍼하거나 울지 않더라는 것이야. 처음에는 조금 쫄더군.. 그러더니 좀 지나니.. 그 자체를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야..
그 이유가 뭔지 알아? 글쎄, 자기가 그런 핍박과 고난을 주님께서 이겨 나갈 수 있도록 하심에 감사하는 거야.. 내가 제일 짜증나고 힘이 드는건.. 그 친구에게 실패를 줬을때야.
실패를 주면 그 녀석은 더 잘 일어나는 거야. 꼭 오뚜기 같이 말야.. 내 비록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만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지만, 그때까지 만이라도 이 녀석 엄청 괴롭히려고 맘 먹었거든.. 그런데 그럴수록 이 녀석은 더 내 왕국에 큰 치명을 주니 다시 한번 고려해 봐야겠더라구.. 그래서 그 친구에게 성공을 좀 줬더니. 그건 좀 먹혀들어 가는 것 같았는데.. 그것도 좀 지나니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거야..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 그래서 내가 그녀석 이 세상에서 보내 버릴려고 많은 노력을 해봐도. 하나님이 그 녀석과 함께 해서.. 내 한계를 많이 느껴. 내 고민은 그거야. 난 사실 고민을 안 하거든. 다들 내 말을 잘 듣더라구. 내가 가진 것들을 좋아하고 즐기는데. 그 녀석은 글쎄.. 내 말을 안 듣는거야. 그래서 그 녀석 얼굴만 봐도 이젠 짜증이 나. 그리고 솔직히 말해. 쪼금 무서워.. 뭐라고? 내 힘으로 그 녀석 하나도 못 이기냐구? 물론, 한 주먹거리도 안되지. 그런데 그녀석이 쪼금 똑똑한 거 같아. 글쎄.. 그 녀석 절대 자기 힘으로 나와 싸우지 않더라. 항상 도망치지..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 뒤로 숨어서 싸우는거! 야.. 그러니 내가 어떻게 하냐구.. 나도 답답해 죽겠어. 예수 그리스도만 아니면 단숨에 끝나는 녀석인데. 글쎄. 도무지.. 얼굴을 드러내질 않는거야. 정정당당히 겨뤄 보자구 해도.. 도대체가 말을 안들어. 이제 알겠지? 내 고민이 얼마나 큰질.. 그런데 요즘 그런 녀석이 좀 더 늘어나는 것 같아서. 내 졸개들에게 비상 대책 위원회를 만들어 지금 막~.. 회의하고 있어.. 우씨.. “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참 재미가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단이 이럴게 괴로워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사단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하는 글입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우리 교회안에 사단이 이럴게 짜증을 내고, 속을 끌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늘어가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히브리서 중에서 특별히 믿음장이라고 하는 부분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바라는 것의 실상.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 앞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합니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정의라기 보다는 믿음의 성격이 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는 믿음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믿음이란 어떤 것이냐 라는 좀더 실질적인 대답인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실상이라는 것은 헬라어 원어의 뜻은 “아래로부터 받쳐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집을 짓는데 기초가 필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큰집, 높은 집일수록 힘있게 그 집을 받쳐줄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기초가 약하면 아무리 큰집을 지어도, 아무리 높은 빌딩을 지어도, 아니, 크면 클수록, 높으면 높을수록 더 위험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집 아이를 피아노학원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일본학원에 성격이 안 맞아서 못 보낼 것 같습니다. 유치원시절에 보냈는데, 일주일에 한번, 그것도 30분 이상을 안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한 달을 “도”만치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사람성격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빨리, 빨리 만을 해야하는 성격에 안 맞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무조건 “도”만 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에 관한 음색, 느낌, 그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귀중한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일본의 교육은 기초를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한국보다 일본에서 훨씬더 많은 인재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진전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늘 제자리걸음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돈이 들어도, 기초를 쌓는데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당장에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을 너무 빨리 이루려고 하는 습관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기초를 다질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기초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믿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그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희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큰 꿈과 비젼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사업을 하는 사람이 큰 비젼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을 뒤받침해 줄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라는 것들을 위해서 기초를 다지는 희생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알지 못하는 땅, 가 본 경험이 없는 땅, 안내자도 없는 땅, 지시한 땅이 아니라 지시할 땅으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합니다. 이처럼 무모하리만큼 담대한 행동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의 기초가 튼튼한 아브라함은 인류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 놀라운 일들을 하였습니다.
믿음은 아는 것 하고는 다릅니다. 믿음은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아프간에 선교를 하러 간 이들은 믿음으로 떠났습니다. 위험한 줄도 알았습니다. 탈레반이 있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 지역에서 납치사고가 일어나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했던 것이 그 땅을 사랑하는 마음이었고, 그 땅에 사는 가난한 백성들의 상한 마음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감싸주겠다고 하는 마음이 더 컷기에, 그들은 아프간선교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 떠난 것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선교의 기초를 다지는데, 순교의 피가 필요했기에, 2명의 피흘림을 허락했는지 모릅니다.
2.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또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여기서 “증거”라는 말은 “확신”이라는 말입니다. 즉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내적인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홍수심판이 내려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셨을 때, 노아는 아무런 징조도 볼 수 없었습니다. 노아의 눈에 비가 올 아무런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방주를 짖기 시작했습니다. 노아의 눈에 엄청난 비가 오는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을 때에 갈멜산에 올라가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그가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서는 큰비를 보고서 아합왕에게 빨리 피하라고 했던 것을 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업에 성공하는 사람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신하고, 결단을 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여러분 영의 눈이 열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있어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사물을 보던지, 그것을 고치고, 다시 만들어 놓았을 때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일에 투자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보지 못합니다. 다 만들어 놓아야지 만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의 사람은 적은 투자로도 성공할 수 있지만 후자의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만일 노아가 사람들이 눈으로 보는 것만 보았다면 그가 방주를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야만 보았다면 가나안에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견고한 여리고 성곽만 보았다면 어떻게 그 성을 도는 믿음의 행진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본다면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들만 본다면 그것이 우리를 실망시킬 것입니다. 우리를 좌절시킬 것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모세가 보낸 열두명의 정탐꾼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열명은 그냥 육신에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를 했습니다. “아낙 자손은 거인이요 우리는 메뚜기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보고를 했습니다. “저들을 지키던 신은 떠났고 저희는 우리의 밥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두 사람만이 자신들이 본 곳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환경과 조건의 차이가 아니라 믿음 없는 눈과 믿음 있는 눈의 차이입니다.
한 포로 수용소에서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벽에는 어떤 수감자가 새긴 글이 있었습니다. "햇살이 비치지 않더라도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보이지 않더라도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침묵하시더라도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는다." 여러분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있음을 믿는 확신, 지금은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나에게 보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선진들의 증거.
2절 말씀에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고 합니다. 여기서 “증거”라는 말은 “법적인 증거”를 뜻합니다. 즉 틀림없이 확실한 것을 말합니다. 심증이 아닌 물증입니다. 히브리서11장에서는 “증거” 라는 말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4절에서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낳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나니.” 그러면서 계속해서 절이 끝날 때마다 “증거”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분명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11장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받은 증거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믿음과 신념은 다른 것입니다. 신념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고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이나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서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노니” 라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에 기초한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처다 보면 이 땅에 불가능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히브리서11장에서 등장하고 있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믿음으로 이루어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33절부터 읽어보면 “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11:33-37)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한 믿음 안에서 일어났던 것을 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라고 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교회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후 32년경인 네로 황제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네로 황제는 기독교를 아주 심하게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비밀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네로는 믿는 사람들을 장작불에 태워 죽이거나 굶주린 사자를 풀어 사자 밥이 되게 했습니다. 당시에 네로는 레슬링 선수들을 40명을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누군가가 네로 황제에게 레슬링 선수들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있다는 정보를 주었습니다. 네로는 레슬링 선수들을 훈련하고 있는 책임자를 불러 레슬링 선수들 중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찾아내어 당장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감독은 그가 훈련시키고 정이든 사랑하는 선수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지만 왕의 명령이라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그 때가 마침 추운 겨울이었기 때문에 감독은 바닷가로 40명의 레슬링 선수들을 모아놓았습니다. 그리고, "너희들 중에 기독교인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40명의 레슬링 선수들 모두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는 한 두 명도 아니고 그가 가르친 선수 모두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랫동? ?함께 땀 흘리며 훈련하고 조련해서 만들어낸 그 정든 선수 모두를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강가에 따뜻한 장작불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기독교를 버리고 돌아오는 자는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는 자는 저 추운 겨울 바다에 들어가게 해서 얼어죽게 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40명 모두는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감독은 선수들에게 옷을 벗고 바다로 들어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버리고 돌아오는 자에게는 따뜻한 불이 있고 또 장래에 성공을 보장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40명의 레슬링 선수들은 하나같이 옷을 벗고 추운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바다 속에서 "위대한 주님의 레슬링 선수들이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싸우라"고 힘을 다해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늘 "위대한 로마의 레슬링 선수들이여 위대한 황제와 그의 나라를 위해 싸우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감독은 따뜻한 모닷불 옆에 앉아 바닷가에 들어간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도록 추운 바다 ? ×諍??"위대한 주님의 레슬링 선수들이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싸 우라"고 외치고 있었고, 드디어 그 외침 속에서 한사람 한 사람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이 가까워졌습니다. 견디다 못한 한사람이 따뜻한 장작불을 향하여 나오며 자신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감독은 자기의 옷을 그에게 벗어주며, "그래 너는 이 옷을 입고 장작불에 몸을 녹이고 출세해라. 나는 저 사람들과 함께 주님을 믿고 하늘나라에 가겠다"라고 말한 후 발가벗은 몸으로 바다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다를 향해 나가며 "위대한 주님의 레슬링 선수들이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싸우라"고 외쳤습니다. 그 날밤 그들 모두는 그 추운 바다 속에서 하늘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싸우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몸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를 위해서 기초를 다지고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 위에서 아멘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런 믿음의 역사들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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