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히브리서11:5-6 08.4. 13
세상 사람의 모습을 “층층만층 구만층이다.” 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오르고 또 올라도 이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보더라도 기분 상태에 따라 다르고,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고, 시간마다 다릅니다. 금방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지식수준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만나온 사람들이 다릅니다. 이와 같이 공동체 속에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떤 때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이 복잡한 관계만큼이나 오해를 하거나 섭섭해 하거나, 심지어 미워하는 인간관계를 만들게 됩니다. 교회라고 덜할 것 같은데, 별로 세상과 다르지 않는 것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아니 그 느낌이 어떤 때는 더 할수 도 있습니다. 왜냐 하면 여기는 다르겠지! 라는 기대감이 세상보다 더 많기 때문에 그 기대감의 실망이 가져다 주는 아픔은 더 클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괴로워하게 되고, 아파하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서 혼자서 힘들어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잘 할 라고 했는데! 라는 것이 모든 이들의 자기 항변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그것은 단 하나,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해는 모든 어그러진 것을 바르게 합니다. 인생의 묘약이고 처방전입니다. 아무리 큰 문제도 이해라는 과정을 한번 거치면 다 해결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를 좀더 쉽게 해결할수 있습니다. 이해는 수용이고 이해는 긍정입니다. 때문에 이해는 세상의 모든 부정을 뒤집고 정상을 회복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일단은 그럴수도 있지뭐! 하면서 이해하는 쪽으로 먼저 생각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훨씬더 부드러워질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사람과의 관계를 오랬 동안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에녹이라는 사람입니다.
창세기5장에 보면 당시의 살아가던 사람들이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어마어마하게 오래 살았습니다. 기본이 9백년이었습니다. 아담은 930년을 살았고, 셋은 912년을 살았고, 에노스는 905년을 살았고, 게난은 910년을 살았고, 마할랄렐은 895년을 살았고, 야렛은 962년을 살았습니다. 므드셀라가 제일 오래 살았는데 969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녹은 므드셀라의 아버지인데, 그는 자신들의 선조들의 3분의1정도 밖에 이땅에서 살지를 못했습니다. 창세기5장22절에서는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 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합니다. 하나님이 에녹이 너무 좋아서 그냥 거기서 살지 말고 여기 와서 나하고 함께 살자 하면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신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오래 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결과의 중요성보다도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은 에녹의 삶의 과정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합니다.
1. 하나님과 동행한사람
오늘 에녹을 대표해주는 말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5장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니”라고 에녹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함께 동행한다는 말은 함께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동반자를 구합니다. 라는 말은 구혼광고에 많이 나오는 말입니다. 인생을 함께 걸어갈 삶의 동반자를 구한다는 것은 보통이 일이 아닙니다. 영국 속담에서는 “옷을 고를 때는 한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는 3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반자를 선택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이라는 것은 평생을 갖이 할수 있는 동반자를 잘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승용차를 굴리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산다해도 부부간에 서로 마음이 안 맞고 성격이 안 맞고 남편이 이쪽으로 가자하며 부인은 저쪽으로 가자한다면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언21장9절 에서는 "다투는 여인과 큰집에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고 말씀 하셨고 , 또 잠언17장1절 에서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和睦(화목)하는 것이 肉鮮(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 하셨습니다. 함께 한마음을 이루지 못하면 차라리 혼자 있는 것이 더 낳다고 이야기 할 만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어렵니다. 유학생들이 처음에는 형편을 모르니까 서로 모르는 룸메이트하고 함께 살 것 같지만, 같이 한 달만 살아보면 따로 집을 얻어서 나오는 것을 많이 봅니다. 동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어놓으시고 혼자 독처 하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으셔서 그를 위한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혼자 있으면 세상에 편할 것 같지만 그것도 잠시 잠간입니다. 늘 잔소리하는 부인이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잠시 가면 일본에 남아있는 남편은 해방된 것 같지만, 그 해방감은 잠시 잠간입니다. 혼자서는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고, 귀찬으니까 매일 라면만 끓어먹고, 집에 들어와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한국에 전화해서 언제 들어 오냐고 재촉하는 것이 남자들입니다.
우리는 동행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동행은 귀찬고 힘든 동행자도 있어서 늘 기도의 제목이 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야 할 것은 에녹과 동행하신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에녹이 완벽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얼마나 훌륭한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동행하시겠다고 했을까요! 옛날 초등학교다닐 때 선생님에 대한 환상들이 있었습니다. 예쁜 선생님은 화장실에도 안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 예쁜 선생님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밥도 안 먹고 이슬 먹고 살아가는 것 같은 신비한 환상 속에 있었던 시절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에녹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우리는 감히 근처도 가지 못할 것 같았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온갖 능력들을 행했던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았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온갖 신앙이 특출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엄청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잃다 보면 가끔을 실망스러운 일들이 그들에게서도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자기의 부인은 이복동생이라고 속이는 아브라함의 모습, 축복을 받기 위해서 자기 형을 속이고 장자의 권을 빼앗는 야곱의 모습, 하나님이 나한테 특별한 꿈을 꾸었다고 자라하는 요셉의 모습,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의 모습들, 그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의 삶의 모습이 우리와 별 다르지 않습니다.
에녹도 역시 인간의 몸을 입고 있었기에, 엄청나게 다르다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에녹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을 하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보호본능입니다. 여자들이 가끔 연하의 남자들과 사귀고 결혼을 하는 경우를 보는데, 그 경우의 대부분은 보호본능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저 남자를 지켜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에 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저 여자를 지켜주지 않으면 도저히 불안해서 살수 없을 것 같아서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의외로 많이 듣습니다. 보호본능, 너무, 너무 약해서 내가 지켜주지 않으면 도저히 안될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혼자 놔둬도 잘할 것 같은 사람에게는 오지 않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조금은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사는 것도 괜찬은 것입니다. 자기 부인에게 절대로 운전을 안 가르쳐 주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부인이 운전을 하면 꼭 사고를 낼 것 같으니까! 말만해! 내가 어디든지 데려다 줄게! 하면서 남편을 자기의 전속 운전수로 자연스럽게 고용하는 지혜로운 부인들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기쁨입니다. 너무 너무 좋아서 하는 결혼입니다. 둘이서 떨어지면 살수가 없을 만큼 좋아서 어쩔줄 모를 때, 하루종일 같이 있다가도 집앞까지 데려다 주고 헤어지는 것이 너무 힘이 들 때, 그리고 집에 가서도 잠들때까지 핸드폰으로 소곤거리는 사랑을 할때 하는 결혼입니다. 오늘 본문에 에녹은 물론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서 함께하는 경우에 속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그런 것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평생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 존재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주님이 우리와 세상 끝날 까지 동행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에녹이 누렸던 그 하나님과 동행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의 기쁨이 된 사람.
오늘 성경에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줍니다.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5) 합니다. 에녹은 역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생각하면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너무 좋아서 하나님이 어쩔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은 어떻게 했길래 하나님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을까!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면 여러분 얼마나 많은 신앙생활에 부담을 느끼겠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살수 있습니까! 하나님 속을 한번도 안 썩여드리고, 하나님 마음을 한번도 안 아프게 하면서 신앙 생활 할 자신이 있습니까! 솔직히 이야기하면 저도 잘 못하겠습니다. 이미 저도 지나온 신앙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얼마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 신앙 한 적도 있고, 불평하고 불만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나는 이미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있습니까!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이쁠 때는 얼마나 이쁜지 모릅니다. 그런데, 속상할 때는 너무 속상합니다.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지 맘대로 한다고 땡깡을 놓을 때 보면 환장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 이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는 물고, 뽀뽀를 하고, 안고 난리가 납니다. 세상에서 우리새끼가 제일 잘난 것 같이 보입니다. 아무리 아이들이 많아도 자기자녀는 한눈에 알아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제일 잘 생긴 놈을 찾으면 그게 바로 자기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또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이쁜 것을 어떻게 시집 보내냐! 그냥 엄마하고 같이 살자!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실수도 없고,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예의바르게, 누구에게도 칭찬을 받는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자녀 됨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집니다. 여러분 우리교회의 표어를 무엇으로 정했습니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입니다. 스바냐3장17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 당신의 백성이 되었기에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 삼기 위함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 기쁨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말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이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사도들을 보내시고, 그리고 믿은 사람들을 보내셔서, 예수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고 믿을 수 있도록 하셨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거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직도 이 일본 땅에는 99%의 사람들이 그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습니다. 일본사람들은 해외여행을 좋아하니까 서양에 여행을 가면 대부분이 기독교문화권이기에 가서 보고 압니다. 일본에서도 미션스쿨들이 많아서 미션스쿨을 나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서 교회를 알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지극히 적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는 엄청난 기쁨이 됩니다. 죄인하나가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천국에서 잔치를 벌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녀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로서 자라지 않으면 근심이요, 걱정거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자라나야 합니다. 성장을 해야 합니다. 매일 기어다닐 수 만은 없습니다. 언제나 우유만 먹을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고, 일어나 걸어야 하고, 학교 갈 때되면 학교를 가야 합니다. 스스로 자립할 때가 되면 자립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일을 하고, 또 동생들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연륜에 맞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근심거리가 됩니다. 집사가 되어서도 새신자처럼 해주기를 바란다면 근심거리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연륜이 길면 길수록 연륜에 맞게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의 기쁨이 됩니다. 에녹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쁨이 되어서 데려가신 것입니다.
3. 하나님께 간 사람.
에녹은 하나님께 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성경은 말합니까!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고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은 상주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들을 不信者라는 표현을 쓰는데, 정확하게 하면 未信者라고 해야 합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미신자는 아직 신자가 아닌 사람입니다. 일본에서는 불신자라는 단어보다 미신자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이 더 바르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직 안믿음 사람은 믿을 가능성을 놓고 있지만 불신자는 믿을 가능성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이미 믿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에녹을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데려가셨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데려가시는 분이신줄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 품안에서 이 땅에서 수고한 모든 것의 상을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에녹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을 해보았습니까! 지금도 옆에 계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하고 나직하게 불러도 하나님이 “왜 그러냐! ”하면서 나직하게 대답하시는 그 음성을 느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리 불러도 하나님이 대답을 안 하시고,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질 때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하겠다고 우리와 동행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는데, 우리의 죄악된 속성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저 먼 발치에서만 바라보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마음들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당당하게 누리면서 주님과 당당하게 동행할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장하지 않는 자녀는 근심이 되듯이 우리의 믿음이 오래는 되었는데, 성장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주님의 근심꺼리가 되는 줄알고 이제는 믿음의 성장도 가져오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고, 기도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지 않으면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성장해서 다른 많은 연약한 사람들을 이끌어줄 수 있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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