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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의 말씀

빌립의 신앙 요1:43-51

빌립의 신앙            요한복음1:43-51               08.7.20    

나치 독일에서 히틀러에 반대하며 정치 투쟁을 벌이다가 8년간이나 옥고를 치른 목사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그분은 독일 고백교회의 지도자 마틴 니뮐러 목사였습니다.
이 분이 전쟁이 끝난 후 책을 한 권 썼는데 전쟁을 고발하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에 대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책이어서 독일 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분이 이런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실 그 책을 처음 쓸 때의 목적은 모든 전쟁의 책임이 히틀러에게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시작했었는데, 어느날 꾼 꿈 때문에 그의 책 내용은 바꿨다고 합니다.  그 꿈은 모든 사람들이 죽어서 심판을 받는 꿈이었습니다. 모두가 심판을 받기 위해 한 줄로 죽 늘어서 있었고, 니뮐러 목사 자신도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니뮐러 목사가 그렇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자기 등 뒤에서 나지막히 탄식하며 울부짓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했습니다." 니뮐러 목사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그 소리를 지른 자는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목사님은 아찔했습니다. 그를 미워하여 그의 통치에 반대하여 투쟁은 했지만, 그를 위해서 기도하며 사랑하고 전도했던 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니뮐러 목사는 불현듯,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만의 책임이 아니라, 목사이면서도 그를 전도하지 못한 바로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뮐러 목사는 이 꿈을 한 번만 꾼 것이 아니라 매일 밤에 걸쳐 무려 일곱 번씩이나 동일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날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니뮐러야, 네가 8년 동안 히틀러를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비판하며 저항만 했지, 그 동안 한 번이라도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느냐?
그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너와 한 형제임을 알지 못했느냐? 어찌하여 복음으로 사랑하지 못했느냐?" 니뮐러 목사가 이 음성을 듣고 히틀러가 저질렀던 전쟁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며 통곡으로 쓴 책이 바로 “전쟁 책임 고백서” 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누구든지 전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빌립이 예수를 만나고 난 다음에 그분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나다나엘에게 찾아가서 그를 다시 전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나다나엘이 전도를 받고 예수 앞에 나오게 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 사실을 조금도 쉬지 않고 전도자가 되어 친구 나다나엘에게 복음을 전했던 빌립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는가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통찰력이 있는 사람
오늘 본문에서는 빌립이 예수의 부름을 받고 예수를 만나자 마자 예수가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그 메시야라는 사실을 금방 알았습니다. 
빌립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한마디로 영적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눈에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던 사람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다음의 그의 가슴은 벅차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알라스카는 미국 본토의 1/5에 해당하는  큰 땅덩어리입니다. 그런데 본래의 알라스카는 구소련땅 이었습니다.
1867년 죤슨의 대통령으로 재임당시 720만불을 주고 그 땅을  사들였습니다. 그 당시 얼음으로 되 있는 빙하의 땅으로만 알려졌던 문제의 땅 알라스카를 사들이자, 미국 국회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소환하여 질책을 가했습니다. 국회동의도 없이 쓸모 없는 땅을 사들였다고 온갖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중 한 의원은 "얼음이 필요하다면 미시시피강을  얼음으로  이용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아이스박스에 불과한 알라스카를 샀는가?"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후 정부와 의회의 공동 조사단에 의하여 알라스카를 탐사해 보았더니 그 땅에는 상상외로 순금, 백금, 석유 풍부한  어장이 무진장으로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러자 당시 언론들은 미국은 얼음 땅을 사들인 것이 아니라, 황금의 땅을  거져 줏었다고 대서특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하 양원  국회의원들이 백악관을 찾아가 정중히 사과를 했습니다.
한사람의 통찰력으로 미국은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통찰력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이런 통찰력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통찰력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어떤분 이라는 것을 발견했으면 그 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천국비유에 보면 어떤 농사꾼이 남의 집 밭에서 농사를 짓다가 그 돌짝 밭에서 보화를 발견하고는 가만히 묻어두고 자기의 전 재산을 투자해서 그 밭을 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곳에서 엄청난 보화를 발견 했을 때의 흥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땅을 샀습니다. 사람들은 미친 짖이라고 합니다. 왜 쓸모 없는 돌밭을 사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 소리들이 귀에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이는 예수를 믿고는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해서 투자하고 자기의 전생을 그분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분 예수를 만나고도 아무런 감각 없이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큰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미국에 백화점왕으로 불리는 존 워너메이커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이 크게 성공하고 난 다음에 어느 기자가 와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회장님 지금까지 수많은 투자를 하면서 성공하셨는데, 그 중에서 가장 훌륭한 투자는 무엇이었습니까! ” 그때에 그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대답했습니다. “ 내가 10살 때 최고의 투자를 했지요! 그때에 나는 2달러75센트를 주고 예쁜 가죽 성경 한 권을 샀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투자였습니다. 왜냐 하면 그 성경이 오늘을 나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디에다가 최고의 투자를 했습니까! 최고의 투자는 가치를 알았을 때 할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빌립은 자신의 삶의 최고의 투자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통찰력 있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께 여러분의 최고의 것을 투자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에게 최고의 것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런 시각이 있는 사람이 이 땅에서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이런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남들이 안 하는 것을 신경도 안 쓰는 곳에서 사업의 아이디어를 얻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공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통찰력이 없는 사람은 사업에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늘 남이 해 놓은 것만을 따라서 뒷북만 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 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선입견을 가진 사람
빌립은 그 좋은 것을 혼자서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가 만난 예수님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곧바로 이어 자기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찾아가서 자신감을 가지고 전도했습니다. 45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고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출신지에 대해서 들은 나다나엘은 선입견을 갖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의 출신지에 대한 선입견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UCLA라고 하는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가 이제 머지않아 의학 공부를 마치고 바로 현지 병원에 나가서 환자들을 진찰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들을 놓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중에 한 사례를 들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아이는 역시 이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아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 그러자 교수는 점잖게,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우리가 아는 악성 베토벤은 바로 그런 환경 가운데서 1770년에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요,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요, 형제들도 다 병들어 그 모양이지마는 그 가운데서 태어나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물론 그도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마는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무릇 우리 인간이 판단과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되기 쉬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교수는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에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의학적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겸손하게 신중하게 할 것이다."
오늘 나다나엘에게 있어서는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그런 위대한 인물이 어떻게 저 형편없는 시골마을 나사렛에서 날수 있겠느냐는 편견이었습니다.
나사렛은 예수께서 출생 후 잠시 애굽으로 피난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태아에서부터 유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기까지 일생을 보낸 고향이었습니다. 베들레헴 말구유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헤롯의 박해를 피하여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주의 사자가 이르는 대로 이스라엘 땅에 되돌아와서 정착한 곳이 그 부모의 고향이기도 한 나사렛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실 때는 나사렛을 떠나지만 예수님의 이름 앞에는 항상 나사렛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습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우리의 편견 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인도의 영원한 지도자 간디(1869-1948)가 젊었을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온갖 차별과 편견과 냉대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성경책을 발견하고 이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간디는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말씀은 그에게 큰 감명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성경을 읽은 간디는 하나님을 위해 그의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결심하고는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 미개한 나라이었고 인종차별이 심한 때이었기 때문에 그의 결심은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찾아다니며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여러 차례 청원을 해 보았으나 교회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쫒겨 나기가 일쑤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쫓겨 나면서 한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경멸한다.”
그는 결국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10억 인구의 인도를 움직이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 때 교회가 간디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인도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간디가 기독교의 영향을 인도에 끼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은 이 편견을 버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보물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3. 설명이 아니라 경험입니다.
이 편견을 빌립은 어떻게 떨쳐버리게 만들었습니까?
"빌립이 가로되 와보라" 그렇습니다. 보여 주면 됩니다. 직접 와서 경험하게 되면 모든 편견을 떨쳐 버릴수 있습니다. "백문이 불효일견"이라고 했던가요! 한번 보여주면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백마디로 설명하는 것 보다 한번 믿어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상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전도를 할 때 말로 할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말로 하겠습니까? 그럴 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와봐! 일단 와보면 알아" 음식을 아무리 맛있게 설명해면 뭐합니까?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모르는 것입니다 .일단 먹어보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멋있고, 그것 그렇다고 설명하면 뭐합니까? 한번 보여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다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언변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일단 데리고 와서 그 분도 예수를 만나게 하면 그것이상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오늘 빌립은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나다나엘을 일단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49절에 보면 "당신은 하나님의 이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라고 당장에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백마디로 예수를 설명해주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험하는 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미국에서  아주 젊은 선교사가  현지에 부임하여  첫 설교를 하였습니다. 무척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용어들을 써가며 30분 정도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말틴 목사가 통역을 맡았었는데 그 통역의  내용은 3분도 안 되는 짧은 것이었습니다. 설교를 한 젊은 목사가 의아하게 생각하여 "나는 30분간 설교하였는데 목사님께서  3분 동안 어떻게 통역을  하셨습니까?"하고 반문하였습니다. 말틴목사가 원주민에게 통역한 말은  요컨데 "나는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말틴선교사는  젊은 목사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선교사의 성공은  현주민과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위하여는  긴 설명보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한 마디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설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경험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설명으로 보여주는 이들이 아니라 경험시켜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주변에 많은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같은 논쟁자로서가 아니라 경험자로서 인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구원의 기쁨을 그도 역시 동일하게 갖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빌립을 보면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그는 기본적으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알고 있는 그 내용들, 그리고 그 내용에 딱맞는 바로 그분이 오셨는데, 아무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서 나를 쫒으라는 그 말 한마디에 이분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 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삶을 헌신하고 자기 친구에게 메시야를 전했던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당당하게 메시야를 소개하는지, 친구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말을 무시하고 일단 한번 와보라! 는 강한 메시지로 친구를 예수님께 이끄는 그의 모습 속에는 확신이 넘처 났던 것을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고 있으면서, 나는 이런 확신 속에서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본 기억이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 혼자서는 충분히 믿겠지만, 남에게 전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내가 얼마나 믿음이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는 한 성도가 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조건 칭찬입니다. 무조건 우리교회가 좋다고 말합니다. 무조건 우리목사님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와보라고 합니다. 이런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십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구원의 감격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만난 구원의 감격이 다시 한번 뜨거워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 전체에 새로운 기운이 감돌고 생기가 나고, 행복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성도들로 우리교회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