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민수기 14:1-10 09.7.19
어떤 광고 중에서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친구, 모두가 아니오! 라고 말할 때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친구.”라는 광고 카피가 있습니다. 어느 증권회사의 광고 카피입니다. 증권에 투자할 때 자신의 주관과 분석을 믿고 투자하되 분위기에 편승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식에 투자하면서 소문이나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투자를 하게 됩니다. 자기의 소신과 주관을 믿기보다는 전문가의 의견에 더 많이 치중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소문에 “어디에 투자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라는 말에 그 분위기에 휩쓸려 투자를 했는데 하루아침에 망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소문을 무시는 못합니다. 그리고 전문가의 의견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소문이, 의견이 정답은 아닙니다. 전문가가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항상 예상인 것입니다.
결국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투자에 대한 자기만의 분석과 노하우를 통해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모 증권회사 카피의 내용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광고를 보면서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요 ” 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왕따” 당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소신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사회의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뒤에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이 갑자기 가나안에 대해서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정탐꾼을 보내봅시다. 라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탐꾼을 보낸 그 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는데, 바로 이일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불 신앙을 보이게 되었고, 그 불 신앙의 결과로 40일간의 정탐기간을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해서 40년 간을 광야생활로 발걸음이 옮기게 되는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오늘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정탐을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보려고 했던가를 묵상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가나안정탐을 허락하셨는데, 하나님은 또 무엇을 보여 주시려고 했던가를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누가 정탐꾼을 보내고자 했습니까?
성경에는 정탐꾼을 보내자는 이야기가 두 군데 나와 있는데, 민수기13:1-2, 과 신명기 1:21-22, 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의 말씀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으로 나오고, 신명기의 말씀은 사람들이 보내자고 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을 들어가도록 했는데, 사람들이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정탐을 통해서 보고 확인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모세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했으면 그대로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약해진 것입니다. 정말로 들어가도 되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이지,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물론, 다는 아니지만 아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석,박사들 보다도 시골의 할머니들이 더 예수님을 순수하게 잘 믿을 수 있는 지도 모릅니다. 성경말씀을 말씀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검증해보고, 조사해보고 확인해보고 비교해보는 일들이 물론 성경을 공부하면서 필요한 내용이지만. 그것보다는 그 말씀을 얼마나 확신 있게 믿고,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결국 에던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은 어디에서 시작이 되었습니까?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하나님께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그대로 있었으면 됩니다. 그런데 사탄이 와서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그러고 났더니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로”결국 말씀이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그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서 인류의 죄악이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들을 때에는 베드로가 물위를 걷기도 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대로 믿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가봅니다. 우리의 심성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가야 하는” 연약한 심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줄로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1973년 뉴저지주 에 있는 한 교회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었습니다. 그들은 최근에 구입한 8에이커의 땅에다 새로운 성전을 막 건축했는데, 그런데 그 땅의 나머지 절반은 산과 나무로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교회 뒤에 있는 불충분한 공간에다 합법적으로 필요한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파르게 우뚝 선 40피트나 되는 험준한 산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을 옮기는데 드는 비용은 교회로서는 엄청난 것이었다. 어느 주일 아침 예배에 레이 크로포드 목사(Pastor Ray Crawford)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회중들에게 선포했습니다. 그 말씀은,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 그리고 그는 덧붙이기를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믿으신다면 수요일 저녁예배에 나와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뒤에 있는 산을 옮겨 주시도록 함께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전화벨이 울렸는데 그것은 전화 회사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이 전화 회사는 새 빌딩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부지의 대부분이 늪지였기 때문에 이곳을 메꾸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런데 이 회사는 늪지를 메꾸는데 아주 적당한 모래와 흙과 돌이 잘 혼합된 땅이 교회의 뒷산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산을 옮겼을 뿐만 아니라 세 개의 주차장을 만들고도 남은 평지를 얻었고 포장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말씀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칠 때에 “네 병이 낳을지어다” 보다도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씀으로 고치신 일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확인해보고 또 확인해보고, 이리제어보고, 저리제어보고, 이리계산하고, 저리계산해서 우리의 논리로 맞을 때에만 믿음이 가는 그런 합리적인 믿음입니까? 죄송하지만, 그런 믿음 속에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런 일은 세상 속에서도 많이 일어나는 것일 것입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2. 그들은 무엇을 보고자 했을까?
그러면 그들이 과연 정말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젓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보고 싶어했을까요? 아니면 그 가나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싶었을까요?
미안하지만 그들이 보고 싶었던 것은 그 땅의 사람들이 어떤가를 보고 싶었습니다. 왜요? 실제적으로 그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그림의 떡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직접 자기들과 싸워야할 대상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그 땅의 사람들이란 약하디 약했으면 좋은 것입니다. 자기들이 들어가기만 해도 그 사람들이 겁에 질려서 도망 할 수 있는 약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기뻣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았던 것은 대장부들이었습니다. 그 대장부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그들은 좌절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그중에 광야길을 걸으면서 불만이 있었던 사람들은 “거봐 내 그럴 줄 알았다!”하면서 말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핑개할 것을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애메모한 말을 만들어서 이렇게 하면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말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책임을 질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라면서도 좋은 말보다는 나쁜 말을 먼저 배우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는 소리보다는 남들을 욕하는 소리에 더 귀가 기울여지고, 머릿속에 더 강하게 기억이 남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죄의 유전을 안고 태어나는 것인 것 같습니다. 이 땅에 부정적인 모든 것은 다 마귀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그것을 우리의 기억 속에 강하게 인식을 시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사람이 아무리 선하게 살아왔다 하더라고 마지막에 한번실수를 하게 되면 그동안 그가 쌓아왔던 선한 것은 다 어디로 가고 부정적인 것만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탐꾼들이 한 말 중에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리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민13:27)하면서 보여준 정말 크고 맛있는 과실들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그 뒤에 이어진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자손을 보았으며,, (28)하는 말에 그만 앞에 있는 그 좋은 말은 다 잊어버리고 맙니다. 아니 생각지도 않습니다.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좋으면 뭐합니까! 그림의 떡 인데,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땅에 살아가면서 더러는 무엇을 보고 싶어합니까? 무엇을 듣고 싶어합니까? 어디가 조금만 아파도, 그 병은 말이야! 하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부정적이고 우리를 죽이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감기만 걸려도 이 감기가 심해지면 폐렴이 되고, 폐렴이 되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끝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만일의 경우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줄 아십니까!. 글자그대로 만일의 경우는 만개 중에 하나 걸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자기의 인생을 망쳐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이스라엘백성들이 정말로 보고 싶었던 것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그들은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 인것에 더 마음이 걸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정적인 것에 마음이 걸리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이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보고를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향하여 돌을 집어던지려고 했던 것이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사고는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파괴력은 반드시 죄악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3. 하나님은 무엇을 보여주시고자 했을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여주시고 싶어서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을 정탐한다 할 때에 허락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 땅을 보여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땅의 소산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포도 한 송이를 두 사람이 메고 오는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땅의 기름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애굽에서 나온 일이, 광야 길을 걸어 온 것이, 헛되지 않구나, 하는 소망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점령할 땅을 보라고 하셨지, 사람을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때에 사람 보면 실망합니다. 사람 보면 시험이 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긍정적인 것입니다. 그 땅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땅의 실과를 사람들에게 가져와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시면서, 매일같이 하나님의 현현을 보여주셨습니다. 무엇을 가지고요.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만나가 내리고, 목마르면 물을 주시고, 그들이 입고 있는 옷과 신발은 광야여행이 다 끝날 때까지 떨어지거나 헤어지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매일같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느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고 싶으신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자연까지도 이스라엘백성들을 위해서 움직이시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그까지 사람하나를 못 주관하시겠습니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그 가나안의 거민들 하나 못 주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그 땅 이었습니다. 미리 들어가서 살 땅을 보고서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샘플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 샘플은 실제의 물건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 샘플을 보면 본 물건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입니다. 수펴마켓에 가도 시식품이 있지 않습니까! 그 시식품을 먹어보면, 그것을 살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탐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탐을 허락하실 때에는 그 땅의 실제를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은 긍정적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은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십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기억 하십시오.
여러분 기적을 보고 싶으십니까? 믿음의 눈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영국의 존 메이어수상은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열여섯살 때 학교를 중퇴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노동의 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새벽부터 공사현장에서 콘크리트를 반죽했습니다. 두 시간의 새벽노동을 마치고 간단한 토스트로 아침식사를 대신했습니다.
후에 그는 은행의 간부와 정치가로서 명성을 얻은 후에도 서민들이 출입하는 식당을 즐겨 찾았습니다. 그의 집도 주로 서민층이 밀집된 지역에 있었습니다.
존 메이어는 수상이 된 후 기자들로부터 고난의 세월을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비관적인 생각을 갖지 않았다. 항상 희망을 갖고 일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진다. 하늘은 표정이 밝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에게 복을 내려준다.
여러분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은 행복을 갉아먹는 좀 벌레입니다. 표정을 바꾸면 생각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영안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결론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주님이 나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계획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꿈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은 그 큰 꿈을 끌어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시킬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를 나약하지 않고 강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그때에 주님은 마음껏 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나약함이 언제 극복되어졌습니까?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을 때부터입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함께 하지 않으셨어도, 실패하지 않고 끝까지 제자의 길을 걸어가고 완성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긍정적인 것을 바라볼 능력이 없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만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런 면에서 성령이 충만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보였던 그 가나안의 거민들은 오히려 우리의 밥이다 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주시는 영적 가나안의 비젼이 여러분의 것으로 성취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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