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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의 말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창5:18-24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창세기5:18-24                      10.5.16

성경을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할 때 가장 변역하기 어려운 것이 '보혜사'라는 단어입니다. 희랍어 '파라클레토스'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보혜사(保惠師)'인데, 이는 그 뜻이 매우 풍부합니다. 즉 '안위한다'는 뜻뿐만이 아니라 '훈계한다', '권고한다', '격려한다', '도와 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뜻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일본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다수케누시’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도와주시는 주님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필리핀 남부의 쫄로아노 모로 족은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령이야말로 신자와 항상 같이하시는 동반자이시기 때문이시지요. 중앙 멕시코의 오토미 인디언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를 "우리 영혼에 따스함을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아이보리코스트에 사는 빠울리 족 그리스도인들은 보혜사를 "생각을 꽉 동여매시는 이"라고 합니다. 근심에 쌓인 마음의 생각은 무감각하고 괴로운 혼란으로 사방에 흐트러집니다. 보혜사께서 이 흐트러진 생각을 꽉 동여매어 자기 통제 밑에 두신다는 뜻입니다.
어째든, 보혜사는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이 보헤사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던 구약의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바로 에녹 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노아 이전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노아를 기준으로 그 앞의 이야기는 인류의 죄악이 가득 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나서 죄악 속에서 살았으면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 지었음을 한탄하셨다고 합니까!(창6:5) 그래서 인간들의 죄악이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방주를 짖게 하고 온 인류를 물로 다 심판을 해버렸었겠습니까!
주변에 죄악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수많은 유혹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러한 환경이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했다고 믿음의 승전가를 부를 수 있는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어떤 고혈압환자가 자신의 질병에 대해서 나는 참 행운이라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고혈압은 평상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것 질병입니다. 고혈압이 있다고 일상적인 생활에 지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냥 방치해 놓고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생활에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 행운이어서 내가 고혈압의 심각성을 깨닫고 병원에 올 수 있었고, 그리고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질병으로 인해서 생활의 불편을 느낀 것이 행운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죄악이 관영한곳이라는 사실들은 인식하기 시작하고, 이런 일들이 영적 싸움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하다고, 그 속에서 나는 영적 심각성을 깨닫고 그 죄와 싸우기 위해서 믿음으로 살기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주어질 때에, 고난받고, 박해를 받는 일이 생길 때에  믿음의 사람들은 신앙의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직장 속에서, 죄악을 이기기 어려운 환경이 주어질 때에, 믿음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이야 말로 내가 믿음으로 승리해야 할 때다! 라고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고도의 장소가 어디인줄 아십니까! 사실은 세상이 아닙니다. 교회 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실족을 합니다. 교회 안에서 실망을 하고 떠나가는 일이 생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은 우리가 예수 믿지 못하도록 우리의 발걸음을 교회 안으로 옮기지 못하게 온갖 방해를 교회 밖에서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발걸음이 교회당으로 옮겨지니까 사단은 다음 높은 단계의 방해를 시작하는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는 이유는 교회 안에서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믿음 없는 행동을 보게 해서 교회 다녀도 별 볼 일 없구나! 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에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일이 생기면 사탄에 물러가라~! 하시면서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아직 믿음이 없어서 그래! 아직 거듭나지 못해서 그래! 나도 옛날에 다 그랬어! 내가 이해해야지! 내가 기도해줘야지! 이런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보시면서 용서하시고 품어주시고, 오히려 사랑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의 에녹은 65세까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65세때에 아들 무드셀라를 낳고 난 다음부터입니다.  성경은 에눅이 므드셀라를 낳은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라고 합니다.
에눅이 처음부터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같이 그냥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 계기점이 바로 아들 무드셀라를 낳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그에게 어떤 극적인 사건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서 우리가 잘 알 수 없지만,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한 계기가 아들 낳는 것이었다면 그에게는 자녀의 문제로 인하여 심각한 고민의 상황이었지 않았는가! 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랜 기도제목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고,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작정을 했으면 내 평생을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리라고 결단했습니다. 그리고는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도 이런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오랜 기도의 응답을 얻기도 하고, 기적을 경험하기도 하고, 치유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듣다가 기도를 하다가 찬송을 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뿐입니다. 그때 잠깐 반짝 열심을 내었다가, 다시 시들어 집니다. 내가 언제 그랬느냐! 는 식입니다. 그래서 쉽게 뜨거워지기 쉽고 쉽게 식어지기 쉬운 냄비신앙을 가진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냄비신앙이 아니라 한번 뜨거워지면 오랜 세월 식을 줄 모르는 무쇠솥과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에녹은 바로 그런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고, 그의 신앙을 흔들어 놓을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떤 일이 생겨도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일을 그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그가 그냥 아무런 유혹도 없이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하나님이 에녹을 죽음을 보지 않게 하고 데려갈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에녹 뿐 이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에녹만 그냥 하늘로 불러 올린 것은 하나님이 에녹을 너무 좋아하셨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많은 죄악의 유혹 속에서도 변함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모습이 너무 좋고, 변함 없이 하나님 옆에 있는 것이 너무 좋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은혜 받으면 그 은혜가 얼마나 지속이 되십니까! 약효가 얼마나 지속되십니까! 바라기는 여러분의 신앙의 연조가 깊어갈수록 은혜의 지속의 시간이 에녹 처럼 길어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 크리스토퍼 이야기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달픈 길을 가는데 길거리에 어린아이가 보채고 있습니다. 나 혼자 가기도 힘들기에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 크리스토퍼가 어린아이를 업고 길을 갑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어린아이를 업고 가니 더 피곤하고 고달파야 하는데 오히려 발걸음이 더 가벼워졌습니다. 콧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그가 “네가 누구니? 너를 업고 가니 발걸음이 가볍구나” 등에 업힌 어린아이가 말했습니다. “네가 업고 가는 나는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나사렛 예수다” 성 크리스토퍼는 부지중에 예수님을 업고 간 것입니다. 왜 그의 발걸음이 가벼웠을까요? 등뒤에 업히신 예수님이 도와주어서 가벼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함께 걸으면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보폭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보폭을 맞추어주지 않으면 동행이 어렵습니다. 이 보폭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보폭을 맞추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사는 동일한 환경 속에서 사시면서 우리들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시고 우리의 삶을 보살피시고 필요한 것은 공급하시면서 우리와 보폭을 맞추셨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유명한 책을 썼던 성자 토마스 아켐퍼스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토마스 아켐퍼스야, 네가 너무도 나를 사랑하고 내 뜻을 받들어 살려고 하니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기 원하노라 네 소원을 말하라”, “주님, 주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아니다. 내가 네 소원을 들어주고 싶으니 말하라” "주님 함께 계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더 소원이 없습니다." "아니다. 말하라" 세 번이나 물어봐도 여전히 토마스 아켐퍼스는 "더 이상 소원이 없사옵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함께 하심에 만족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네 번째 음성이 들려옵니다. "토마스 아켐퍼스야, 너는 세상에 아무도 부러울 것이 없는 가장 좋은 것을 가졌느니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면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 형제를 위해 세워진 기념비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웨슬리목사가 했던 세 마디가 새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군은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특히 세 번째 것은 웨슬리에게 힘을 주던 말씀인데 그는 임종을 맞아 죽기 직전에 팔을 높이 들고 승리의 기쁨이 넘치는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2. 가족과 동행하십시오.
함께 걷는다는 것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일본에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같이 걷는 프로그램을 한답니다. 그러면 지난 3년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도 풀리고, 오해도 풀리고, 다 걷고 나면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더욱 생겨난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골프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골프장에서는 걷는 일이 많아서 공을 멀리 처내고는 그 공이 있는데 같이 걸어가면서 풀밭을 같이 걸으면 동화감이 느껴서 어려웠던 비즈니스도 잘된다고 합니다. 작년 가을에 남전도회 주최로 함께 같던 등산대회는 참 좋았습니다. 힘든 산행 길을 성도들과 같이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같이 걸으시길 바랍니다. 함께 발걸음의 보조를 맞추면서 걷다 보면 상대방의 성격에 대해서도 알 수 있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막혔던 감정의 골이 풀려지기도 합니다.
저녁때면 동네 한 바퀴를 아내와 함께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같이 걸으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신앙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있고, 아이들이야기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말못하던 이야기도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하면 그동안의 오해가 풀리기도 하고, 또 새로운 면을 보기도 합니다. 저희 부부도 이제 얼마 있으면 결혼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20여년 간 같이 살면서도 알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서도 새록, 새록 깨닫는 것도 많습니다. 한 20년 살았으면 이제는 아내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에 새삼 여자들은 참 신비롭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가족들과 함께 걸어보셨습니까! 자녀들과 함께 걸어보셨습니까! 함께 걸어보시길 바랍니다. 생각해 보니 저도 아이들과 같이 걸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저도 해보렵니다.
가족은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걷기 위해서는 내 걸음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부모의 걸음과 아이들의 걸음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의 생각과 사고방식은 이미 옛날 방식일수 있습니다. 너무 무거운 신발을 신고 걷는 것 일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부모들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자녀들에게 너는 내가 시키는데로만 해면 돼! 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시대가 얼마나 빨리 변해 가는지 모릅니다. 자녀들 역시 늘 자신의 생각이 현실적이고 맞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때로는 보모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결국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쫒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걸음의 보폭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다른 입장들, 생각들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해가 되고, 서로들 상대방에게 맞추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아름다운 가족이기 때문에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식구가 따로 떨어져서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가족은 함께 걷는 동행자입니다. 반드시 같은 공간 안에 있어야만 동행자는 아닙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함께 가족된 끈을 놓지 않는 이상 우리는 같은 동행자입니다. 그 가족의 끈은 바로 믿음의 끈입니다. 사랑의 끈입니다. 이 끈으로 우리는 한 가족으로 서게 된 줄로 믿습니다.

3. 이웃과 동행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와 동행하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또 다른 동행자를 주셨는데, 그것은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말은 이웃과도 좋은 동행자가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가 나옵니다. 그 속에 등장하는 이웃은 어떤 관계의 이웃이었습니다. 서로들 적대시하는 관계였습니다. 한사람은 유대인이고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서로들 무시하고 적대시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한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참된 이웃이라고 생각했었던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제사장이 지나가고.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저는 절대로 나의 이웃이라고 생각해 본적도 없는 사람이 지나갑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이 참된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자신을 응급조치로 치료해주었고 자신의 말에 태워서 함께 걸어 가주었고, 그리고 안전한 곳에서 그가 치료 받을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 일을 위해서 물질까지도 헌신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냐고 우리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한 여행자가 말과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기뻤으나 도중에 당나귀가 먼저 지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나귀는 동행하는 말에게 "견디기 힘이 드니 나의 짐을 조금만 덜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같이 친구 삼아 가던 말은 당나귀의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결국 힘에 지친 당나귀는 얼마 못 가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은 당나귀가 지고 가던 모든 짐과 죽은 당나귀의 털가죽까지도 벗겨 말의 등에 실었습니다. 결국 울상이 된 채 그 여행이 다 끝날 때까지 말은 큰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돕고 보살펴야 쉬워집니다. 혼자만 잘 살려다가 결국은 고난을 혼자 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내 주변에서, 내 옆에서 함께 지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좋은 조화를 이루면서 화합을 이루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요리방을 통해서 교회의 이웃들을 초청하고 그들에게 우리의 것을 나누어주는 것은 바로 이웃과 동행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함께 걷는다는 것입니다. 함께 보폭을 맞추어가면서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한 목적지를 같이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바로 이런 동행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여러분의 가족과 동행하시며 그리고 이웃들과 동행을 통해서 이 땅에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길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만들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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