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부담감 느헤미야 1:1-5 10.10.3
부담감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리 좋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왠지 무겁고, 그 부담감이 사람을 힘들게 할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부담감보다는 편한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저 역시 성도들이 부담감을 갖지 않고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담감은 모두가 다 피하고 싶은 것일까요!
6.25당시에 어떤 사람이 전쟁 고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필림에 담아서 미국의 상류층 사교 클럽에서 공개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 와 있던 홀트부부가 그 영상을 보면서 동정심을 느끼고는 얼마의 돈을 기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서도 부모를 잃고 헤메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귀전에 들리고, 눈을 멍하니 뜨고 배가 볼룩한 아이들이 빈 밥그릇을 들고 두드려대던 모습이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홀트 부부는 한국 땅에 도착해서 그 현장을 보고 가슴 아파하면서 미국으로 돌아가서, 서너명의 아이들을 입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마음이 편하겠지 생각을 했는데, 계속해서 한국에 두고온 아이들이 눈에 어른거리고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우는 아이들 때문에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결국 다시 한국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렇게 수십명의 아이들을 키우기 시작하다가 오늘의 홀트 아동복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상류층의 사람들에게 가난한 아이들의 영상을 동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몇푼 돈만 내어놓으면 자선이 되고 자선을 했다는 만족감으로 자신들의 부를 계속해서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심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담감을 떨치려고 시작 했던 것이 이땅에 많은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꿈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 홀트부부가 가졌던 부담감은 거룩한 부담감이었고, 그 거룩한 부담감은 자신들의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고, 사명이 되었던 것을 봅니다. 지금도 비록 홀트부부는 재단 뒤뜰에 조용히 묻혀있으나 그 일은 그의 딸 홀트 마리에 의해서 이어져서 지금도 이 땅에 버려진 수많은 아이들에게 생명이 되어 주고, 희망과 꿈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담감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한 유대인출신으로 바사제국의 높은 관리로 있었던 느헤미야에게 자신의 고국인 예루살렘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이 그에게 큰 부담이 되어서 결국 그 부담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끌려와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3차 귀환 시키는 일로,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로 이어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부담감이 없는 신앙생활만을 원하는 것보다도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을 거룩한 부담으로 승화시켜서 하나님의 일을 할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1. 부담감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의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끌러갔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포로민이 바사제국의 아닥사스다왕의 신임을 얻어서 그의 술맡은 관원장이 되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의 경호실장과도 같은 위치입니다. 그것으로도 그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는 세상적으로 정말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까지 올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그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었을 것이고, 그리고 아무 탈 없이 그 자리를 내려놓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만약에 느헤미야가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끝은 냈다고 한다면 느헤미야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 안될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그냥 한사람 성공해서 잘먹고 잘살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처럼 수산궁에서 그저 왕의 술잔이나 살피는 일로 자신의 인생을 마쳤을지도 모를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또 에스더라는 왕비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에스더역시 이스라엘이 포로민으로 있을때의 인물입니다. 당시의 아하수에르왕 때에의 일이므로 느헤미야가 섬겼던 아닥사스다왕이전의 왕이 아하수에르왕입니다. 당시의 왕비였던 와스디가 폐위를 당하고 다시 왕비를 찾게 될 때에, 유대인이었던 에스더가 하나님의 은혜로 왕비가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왕비가 된후에 포로민출신이 왕비가 된것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하만이라는 사람의 강한 반발을 얻게 되어서 결국 하만의 흉계에 의해서 당시 포로민으로 있었던 유대인들이 몰살을 당하게 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때에 이사실을 안 그의 사촌 오빠였던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왕에게 이사실을 알리게 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왕궁의 법도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왕의 부름없이 함부러 왕에게 나가는 것은 죽음을 전제한다는 사실앞에 주저하게 됩니다. 여러분, 에스더 역시 성공한 여인입니다. 세상에 포로민으로 와서 이것 이상으로 어떻게 성공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만약에 그 성공의 자리를 그대로 누리려고만 했다면 그의 삶의 자리는 스스로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잘먹고 잘살았다!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역시 그녀의 모습도 성경에 기록될 이유도 없었을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공의 자리에게 그는 목숨을 내어 놓은 일을 하게 됩니다. 왕궁의 규례를 어기고도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각오로 왕앞에 나아갑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왕비가 되고 난다음에 겪었던 최대의 부담감이었습니다. 그는 그 부담감을 갖게 되는 것이 에스더가 왕후가 된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에게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할 정도의 부담감이었습니까! 그것은 에스더만이 할수 있는 일이었고, 위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는 부담감을 갖게 하기 위해서 왕후라는 자리를 하나님은 주신 줄로 믿습니다. 느헤미야역시 그의 위치에서 부담감을 가졌기에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하는 놀라운 일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부담감은 살아가는 이유인 것입니다. 부담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부담감이 있어야 나의 존재감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부담감을 가진다는 것은 나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능력이 없으면 부담감도 없습니다. 힘이 없으면 부담감도 없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부담감도 없습니다. 부담감이 없는 곳에는 책임감도 없고, 나하고 하나도 상관이 없는 곳이 되어 집니다.
2. 부담감을 놓으면 죄를 짖습니다.
다윗은 성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모습속에서도 아픈 부분이 있었습니다. 간음죄를 짖고, 자신의 충신을 간접살인을 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나단선지자의 책망앞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며 회개한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었습니까! 다윗은 왕이면서도 군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늘 부담감이 있었는데, 국가에 대한 부담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나서 그는 왕이 되어서도 긴장감을 늘 놓지 않고 스스로 전쟁에 앞장서서 나가곤 했습니다. 늘 다윗왕이 전쟁의 앞장에 서는 곳마다 승리를 하곤 했습니다. 다윗만 앞에 나서면 병사들은 힘을 얻고, 그 위세에 적군은 늘 눌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전쟁의 승리를 거두자 이제는 왕은 어느 순간부터 전쟁에 대한 부담감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전쟁을 치렀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될것 같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사무엘하11장에 있습니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 쌓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역시 그랬습니다. 이번에도 승리입니다. 왕이 나가지 않아도 승리를 한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전쟁을 하고 있는 중에서도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궁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실컷 낮잠을 자고 저녁때가 되어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저녁에 바람이나 쐴 생각으로 지붕을 거닐다가 그만 한 여인이 저녁에 다들 자겠지 하고 방심하면서 목욕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본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그 여인을 범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 여인이 자신의 충신 우리아장군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범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일을 숨기기 위해서 충신을 적군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으라는 밀서를 통해서 그를 죽이는 일까지도 벌어지기 된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는 여느 때같이 전쟁이 일어나면 앞장서서 나가야 했습니다. 적군들도 왕들이 앞장서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전쟁을 치르다가 늘 승리만 하다 보니까! 긴장감은 없어지고, 전쟁에 대한 부담감마져 없어지고 편한 것을 찾고, 하다 보니까 그가 범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부담감이 없다는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적당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감감은 다른 말로 책임감이기도 하고, 긴장감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편하게 믿을 것을 유혹합니다. 그래서 잠언 24장33절에 보면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합니다.
편안한 것은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고 게으름은 결국 우리를 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도 너무 편한 것 만, 찾지 마시길 바랍니다. 부담감을 준다고 싫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부담감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요, 부담감이 우리의 삶의 이유와 목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부담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젊은 남녀들이 만날때도 결혼을 생각하고 진지한 만남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부담 없이 만나서 헤어질 때도 부담 없이 헤어질 수 있는 그런 가벼운 만남을 선호하게 된다고 합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부담 없는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메뉴를 찾느라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자신들이 부담 없는 교회를 찾느라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들 부담감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부담감이 있어서 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담감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발전하게 하고, 성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고, 편한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부담감이 있어야 긴장감도 있도, 또 책임감도 생기게 되어서 열심히 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가족에 대한 책임감, 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돈 벌 생각은 안하고 자기 좋은 것, 하고 싶은 것만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가족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결혼해서 부양해야할 식구가 생기고 아이가 태어나서 책임져야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부담감일수 있지만 부러움입니다.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입니다.
3. 부담감은 사명이다.
그러므로 부담감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느헤미야가 고국 예루살렘의 황폐한 소식을 듣자 마자 그는 심한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그 부담감이 그를 기도하게 만들었고 금식하게 만들었습니다. 본문 4절에서는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기도하여” 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불탔다는 사실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포로로 끌려올 때 이미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그냥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포로로 끌려온 거 아니냐! 라고 가슴 아프지만 묻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슴아파한다고 어떻게 할수도 없는 일이니까! 그냥 그렇게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힘이 들었으면 몇 날을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사명입니다. 사명은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것을 들었는데, 나에게 심하게 부담이 되고, 그것 때문에 잠도 못 자겠고, 하면 그것이 나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사야선지자를 부르실 때에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 일을 할 사람을 부르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사야는 그 말에 이사야는 부담감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보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하셨다면 굳이 자기가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가 해야할 사명이 백성들을 축복하고, 위로하고, 안아주는 사명이라면 기쁨으로 하겠지만,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해야하고, 회개할 것을 요구해야하는 사역이기에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고, 때로는 화를 당할수도 있는 사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부담감에 이사야는 대답을 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부담을 사명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메시야에 대한 소망과 희망의 메시지를 함께 선포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부담을 받아들이면 사명이 됩니다. 사명이 되면 하나님은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할 수 있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말은 그 사명자의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십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반드시 성공하게 하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을 섬기면서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습니까!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부담을 느끼시는 부분이 있습니까! 교회의 어려운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십니까! 그래서 부담이 되십니까!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사명이 됩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감당하지 못하겠거든 피할 길을 내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담이 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시고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왜 부담감을 느끼고 그 부담감이 너무 무겁게 느껴집니까! 그것은 내가 거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공부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공부를 거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일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일을 거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거부하고 편한것을 찾으려는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머리 아픈것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귀찮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피하려고 하니까 힘이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을 바꾸어서 받아들이면 그 모든 것은 나에게 도움이 되고, 나를 통해서 참 많은 일들을 할 수가 있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담감을 받아들이싶시오, 그러면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거룩한 부담감으로 바뀌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것이고, 세상에서의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강하게 만들고, 세상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수 있게 되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동경제일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부담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세상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수 있는 성도들이요, 교회안에서의 느끼는 부담감들은 기쁨으로 순종함으로 받아들여서 거룩한 부담감으로 승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수 있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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