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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의 말씀

빛으로 오신 예수님    요한1:1-5

빛으로 오신 예수님

요한1:1-5 10.12.5 (대강절2째주)

벌써 12월이 되었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들입니다.

올 한해 동안 이루지 못했던 것들이 있다면 이번한달 동안에 이룰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 할 시간들입니다. 대강절 둘째 주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야 했던 이유들, 그리고 이땅에 오시는데,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하는 것 들입니다.

미국의 링글린 브러더즈 서커스단이 뉴욕 공연을 할 때였습니다.

공연중 갑자기 정전이 됐습니다. 1분 간이었지만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무대에서는 조련사가 호랑이 네 마리의 재주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철창 속이니까 관중에게는 위험이 없었으나 캄캄한 데서 조련사가 호랑이의 공격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하고 캄캄한데 무대에서는 조련사의 채찍 소리와 호랑이의 동작을 지시하는 명령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불빛이 다시 켜지자 관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뒤에 기자회견이 열리자 조련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들은 나를 잘 봅니다. 내가 호랑이를 못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 속에 있듯이 행동해야 합니다." 조련사가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를 여전히 제압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의 사람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죄악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 원수 마귀를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려면 우리는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5:8-11)하였고,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5-7)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먼저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분은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어둠속에 살아가는 인생들

한국불교계의 거성이었던 성철스님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성철 스님은 불교계의 대표로 일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사람이라고 그쪽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는 10년간을 좌정하고 불심을 닦았고 10년간은 말하지 않고 지냈다고 합니다. 또 16년간은 생식만 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1989년 불교 종단 종정에 취임하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그 유명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뭔가 심오한 뜻이 있는 것 같지만, 아리송한 이야기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아무튼 유명한 사람이 한마디하면 그것이 곧 유명세를 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죽으면서 한 말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불교계에서는 세 개의 하늘이 있다고 합니다. 허공에 풍륜이 있고, 그 위에 수륜이 있고, 맨 위에 금륜이 있는데 그 복판에 수미산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산 높이가 112만 Km나 되는 높은 산입니다.

그런데 성철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그렇게 고행을 했어도 아직도 자신의 죄가 수미산 보다 높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아비규환의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을 갈기갈기 찢어지기를 소원했습니다. 이렇게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고행을 하고도 죄 사함에 대한 확신 없이 불교계의 대표는 죽어갔습니다.

이것이 죄악에서 떠나지 못하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죄악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곧 어둠의 생활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두움에 익숙한 삶을 살다 보니까 그것이 어두움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캐나다의 케이프 브레톤 섬에는 엄청나게 큰 탄광이 하나 있습니다.

이 탄광에서는 작업을 위해서 여러 마리의 말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들을 한 번 깊고 어두운 탄광 속으로 들여보내면 다시는 탄광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미 오랜 어두움에 적응되어 밖으로 나오는 순간, 말들은 바로 실명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번 탄광 속으로 들어간 말은 늙거나 병들어 죽을 때까지 계속 어두운 땅속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칠레 산호세 탄광에서 갱도에 매몰됐던 광부 33명이 69일만에 극적으로 구출되어서 한동안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구출되는 순간 그들의 눈에는 전부가 시커먼 썬그라스를 쓰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눈이 69일 동안 땅속에 있으면서 이미 어두움에 익숙해져서 갑자기 빛이 있는 곳으로 나오면 실명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하나같이 짖은 썬그라스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 오래 있다 보면 그 어두움에 모든 것이 익숙해 져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환경에 금방 익숙해 버립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에 쌓인 세상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냐고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그 어두움이 오히려 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소음이 많기 때문에 아이들은 오히려 적당한 소음 속에서 더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경우들도 보게 됩니다. 저녁에 하루 종일 박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은 집에 틀어놓은 TV 소리를 들으면서도 잠을 잘 자는 것을 봅니다. 소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적당한 소음은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무 깨끗하거나 너무 조용하면 그것이 더욱 불안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불안함을 없애려고 보지도 않는 TV를 일부러 커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소음 속에서 자유를 느끼게 되었고, 어두움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들이 되고 맙니다.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차 있기에 그 속에서 살아가려면 우리도 그들처럼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러면 안된다고 외치던 사람도 점점 그 소리가 작아지고 나중에는 동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런 어두움, 죄악의 세상에서 더 이상 사람들은 빛을 생각하지 않고 필요로 느끼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더 이상 어두움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빛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빛으로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둡고 혼돈된 세상에 묻혀서 살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불편함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잘못되었다, 어두운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면 안되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빛 가운데 살았던 사람입니다. 질서정연한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정상적이고 법이 통하는 사회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잘못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나라에서 일부러 많은 돈을 들여서 국비유학생으로 선진국에 유학을 보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선진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우리나라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고서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공헌하라는 투자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은 어두움이 없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빛 가운데 계셨던 분이십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어두움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빛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2.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인생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빛을 몰라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빛을 필요로 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오랬 동안 어두움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싫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 빛 때문에 자신들의 더럽고 추한 모습이 들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심으로 스스로 자신의 더러운 것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더럽고 추한 것들이 들어났습니다. 그래서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9), 라고 하고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라고 합니다. 빛을 미워하고 어두움을 사랑하는 자들의 소원은 이사야30:10절에 “그들이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나 거짓된 것을 보이라” 라고 합니다.

정말로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정으로 인해서 적지 않은 부수입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정직한 사람이 와서 쓰고 남은 것을 다시 되 돌려주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너 혼자 잘난 척 하려고 하느냐! 너만 깨끗하냐! 하면서 핍박을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정직한 사람 때문에 그동안 자신들이 먹어 왔던 것을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부수입이 끊어지게 되기 때문에, 너도 나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른 소리를 하는 것도 힘이 들게 만들고, 정직하게 사는 것도, 깨끗하고 청념하게 사는 것도 힘이 들게 만드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그동안 어두워서 감추었던 것들이 다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게 되었는데,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서민들이었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었습니까! 약하고 병든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같이 당시의 권력자들이었고, 종교적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부정과 부패 속에서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고 돈바꾸는 사람들을 채칙을 들어서 치시면서 그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을때, 그들은 이미 예수님이 눈의 가시로 못 박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우리가 빛으로 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싫어합니다. 핍박합니다.

어떤 직장 여성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동료들 사이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신앙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으로 목사님에게 찾아갔습니다. 상담하는 중에 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등불을 둡니까?” 그녀가 답변을 하지 못해서 우물거리고 있는데 목사님은 말씀을 대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곳에 등불을 둡니다.” 하나님께서 그 여성을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직장에 배치하신 것은 그렇게 어두운 곳에 생명의 빛을 비추라고 하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몇주후 다른 여성들과 함께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목사님, 이 분은 오늘 밤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이 분은 우리 직장에서 13번째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신 분입니다.” 그녀가 어두운 세상을 탓하는 않고 생명의 빛을 발하는 동안 그 직장은 그만큼 밝아진 것입니다.

3. 그럼에도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여러분 분명 세상은 빛을 싫어했습니다.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빛의 자녀로 세상에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거부를 하고, 세상이 핍박을 해도, 세상이 그 빛된 예수님을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하도록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데도,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그럴까요! 우리에게는 그 어느것 보다도 빛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빛을 몰라서, 그렇게 하지만, 빛을 알고 나면 그들도 빛을 찾을 것이다. 그들도 빛의 자녀로 살게 될 것이다, 라는 희망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것 때문에 기어코 세상에 오시고야 말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아서 비록 마굿간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빛이 너무 너무 싫어서 십자가로 내몰아 버려도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서도 빛을 비취셨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을 세상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불란서의 무신론자 볼테르는 호언장담 했습니다. “기독교가 건설되기 까지 수 백 년이 걸렸지만 자기는 50년 안에 기독교를 다 파괴하는 것을 보여 주겠다” “100년 후에는 성경이 다 없어진다” 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이성의 힘이 하나님을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죽음에 임박하자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였구나! 의사 선생님, 나를 6개월만 더 살게 해 주세요. 그러면 내 보물의 절반을 주겠소!” 의사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6주간도 못 삽니다’ 그는 무서워 떨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당대의 지성은 이렇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파괴 되지 않았습니다. 후에 스위스 성서공회가 그의 집을 사서 성경 저장 창고로 삼았습니다. 집안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가득 성경으로 차고 넘쳤습니다.

아무리 어두움이 판을 치고, 어두움이 빛을 반대하고 빛을 죽이려고 해도 빛은 어두움앞에 위축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칡흙 같은 어두움이라 할지라도, 성냥불하나라고 밝히면 적어도 그 주변만이라도 어두움이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비추셨던 그 빛은 제자들에게 옮겨붙게 되었고, 그 제자들에게 옮겨 붙었던 불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 붙어서 그 불길은 온 세상에 옮겨 붙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길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옮겨 붙어서 우리가 이 일본 땅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들에게 선한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가 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캄캄하고 어둡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기게 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등불을 둠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이땅에 빛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주님이 빛으로 오실 수밖에 없을 만큼 세상은 어둠고 캄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빛을 싫어했습니다. 그냥 싫어한 것이 아니라 저주했습니다. 결국은 빛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어두움 속에서도 예수님은 빛을 비추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팔았던 가롯유다에게까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는 말로 연민의 빛을 비추셨던 것을 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들을 향해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면서 여전히 빛을 비추고 계셨습니다. 그 빛이 결국에는 죽음의 무덤을 이기셨고, 딱딱하고, 깜깜하고, 어두웠던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서 한사람씩 한사람씩 빛으로 나아오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의 입에서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둠속에서 있었던, 죄악속에서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일 드디어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빛의 자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행성 중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은 태양뿐입니다. 밤하늘을 비추는 달빛도 태양으로부터 받은 빛을 반사하는 빛입니다.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찬란한 별빛도 반사 빛일 뿐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빛을 따라 찾아온 곳이 바로 예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마굿간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을 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받은 빛을 세상을 향해서 반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을 향해서, 어둠속에서 빛을 찾아 헤메이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어디 희망이 없는가!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반사해주어야 합니다. 빛이 있는 곳은 따뜻함이 있는 곳입니다. 따뜻함을 그리는 추위에 떨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빛의 밝음과 따뜻함이 되어주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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