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마태1:18-25 10.12.19 성탄절예배
메리 크리스마스! 옆에 분들하고 인사한번 하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번주 토요일이 성탄절이지만 교회에서는 이번 주일을 성탄절 예배로 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주 금요일에는 크리스마스 이브 이기에 금요기도회 대신에 성탄파티로 가지려고 합니다. 시간에 허락되시는 분들은 함께 모여서 찬양하고 예배와 교제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성탄절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 그리고 오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미국에 존 하워드 그리핀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1920년 미국 남부에서 백인으로 출생했습니다. 미국 남부 지방은 당시 흑백 인종 차별이 극히 심했던 곳이었습니다. 신앙이 너무나 좋은 그리핀은 흑인들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그는 그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흑인들이 그를 이해하고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접근할 때마다'당신 같은 백인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며 멀리하고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그리핀은 마침내 흑인이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약품과 염료, 방사선을 이용해 자신의 피부를 검게 만들었습니다. 머리도 짧게 깎고 흑인 사회로 들어가 그들의 삶을 체험합니다. 1959년에 이 일이 알려지자 백인 사회는 그를 매도합니다. 심지어 그의 고향에서는 그의 모형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거행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모든 힘든 과정을 거친 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나 같은 흑인(Black like me)'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했고 그의 책은 미국 교회와 지성인 사회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리핀에게 돌아온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피부를 검게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했던 방사선의 영향으로 피부암을 앓았고 60세를 일기로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백인으로 태어났지만 흑인이 되어 흑인들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그들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다가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성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 하신 날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우리를 섬기고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탄절이면서도 우리는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예수의 탄생의 의미는 바로 이 성찬에 있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양 즐거워 할 수만은 없는 것은 예수님은 이땅에 오신 이유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탄의 기쁨과 함께 성찬을 통해서 성탄의 깊은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었던 요셉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에게는 마리아 라고 하는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혼녀가 어느날 임신을 하게 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당시의 율법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돌을 던져서 처형하게 되는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의롭고 순전한 사람이라서 조용히 이일을 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조용하게 혼인관계를 끊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이 든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들이 남의 이야기라면 우리는 쉽게 이래라, 저래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의 일이라면 달라집니다. 자기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 사실을 받아 들일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얼마나 배반감을 느끼고, 그리고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냐고 따지고 대들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순전하고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믿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이 든 상황이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감당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이 드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용납하는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주시면서 태어나기 좋은 환경을 찾으신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사람을 찾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이 좋으면 모든 것이 다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환경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습니다. 왕궁같은 좋은곳, 호텔같은 시설이 되어 있는곳, 최고의 출산시설을 갖춘 그런 장소를 찾으신것이 아니라. 그런 환경을 찾으신것이 아니라, 비록 가난하고 마굿간같은곳에서 태어나더라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아멘하고 순종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줄 알고, 받아들일줄 아는 순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신기한 일들도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실줄로 믿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요셉에게 이일이 하나님의 일이 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주시기 위해서 해주신 말씀이 있는데,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3)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땅에 오심은 임마누엘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느때에 임마누엘 하셨습니까!
1. 가장 어두울때 임마누엘
가장 어두울때의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때의 유대의 왕은 헤롯왕이었습니다.
이 헤롯은 B.C. 37-4년경, 유대의 분봉 왕으로 통치한 왕으로, 이 시기는 소위 신구약(B.C.400-A.D. 4년)중간기 라고 하는 기간 중 그 말기에 해당하는 때로는 B.C.63년 로마 장군 폼페이(Pompey)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마카비 왕가의 하스몬 왕조가 무너짐으로써 약 100여년간의 유대 독립 시대가 끝나고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던 때였습니다.
헤롯은 처음에 부친 안티파터 2세에 의해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되었었습니다. 그러다 헤롯은 후에 다시 로마에 의해 유대 왕으로 임명되어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심임을 받음으로써 유대 지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그 위치를 확고하게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이 로마에 대해 보인 과잉 충성은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적개심을 더욱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헤롯 왕가가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왕의 자리에 대해서 대단한 집착력을 가지고 있었던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 도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이런 의심이 있었던 자신의 부인과 장모 그리고 자신의 세아들까지도 무참하게 살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즉하면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는 “헤롯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보다 차라리 돼지새끼로 태어나는것이 더 낫다” 라는 말을 했겠습니까!
이런 사람에게 마태복음2장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있느뇨” 라고 물어본것은 헤롯에게 얼마나 큰 분노의 이야기였겠습니까! 결국 박사들의 이야기 때문에 당시의 두 살미만의 모든 남자아이들이 학살되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당신의 아들을 이땅에 보내주시는데, 선하고 좋은 왕들이 치리할 때에 보내지시 않으시고 가장 악한 왕의 때에 보내셨을까요.
왜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시면서 좋은 환경속에서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가장 악한왕의 시대에 왕의 자리에 대단히 집착하는 그 사람앞에 또다른 유대인의 왕 이라는 이름으로 오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런 깜깜하고 어두운 잔인하고 살기가 등등한 바로 그런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빛이요 희망이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습니까! 나보다 더한 사람들을 보면서입니다. 나보다 더 고생하는 사람, 나보다 더 억울한 사람, 나보다 더 고통속에 있는 사람, 나보다 더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 나는 그것보다는 낮다, 저사람보다는 낮다, 라는 생각이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악이 득실 될 때에 그들에게 생명과 빛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위로와 힘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소망과 희망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오신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자리가 힘이 들고 어렵습니까!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이 듭니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근심, 걱정이 많으십니까! 예수님은 이땅에 그런 우리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헤롯의 칼 앞에 강하고 능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약하고 약한, 여리고 여린 아기예수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역시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암울하고, 캄캄하고, 어둡다 할지라도 이길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입니다. 힘겹고 어두움속에서 세상에 나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아무도 나를 찾아주지 않는 다는 외로움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2. 가장 절망적일때 임마누엘
또 아기 예수님은 가장 절망적일때에 임마누엘 로 오셨습니다. 구약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세례요한의 등장전까지 400년간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영적 기갈속에 있었습니다. 그 기갈속에서 세례요한의 등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은 몰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썩에 사무치듯 듣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영적인 절망감,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신 것일까! 라는 깊은 절망감 속에 이스라엘 놓여져 있었습니다. 오랜 기다림은 사람을 절망하게 합니다.
성경에 보면 깊은 절망감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보기 위해서 25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그는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던 것을 봅니다. 기다림의 고통입니다. 요셉의 감옥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소식을 2년간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기다림은 슬프게 만듭니다. 세상에 힘든 공간이 대화가 단절된 공간입니다. 부부사이에 대화가 단절되면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들고 한방에 있는 것도 힘이 들고 괴로울 것입니다.
김준수교수라는 분이 보통 부부간의 갈등에 대처하는 3가지 방법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갈등의 회피입니다. 갈등이 있음에도 문제를 직면하기보다는 회피함으로 무마하려는 것입니다. 부부갈등을 회피하기 위해서 남편은 자기의 일에 몰두해서 일중독이 된다든지 또는 취미생활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는 집에 들어가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잦은 술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아내는 자녀에게 더욱 집착하기도 하고 취미생활이나 혹은 교회의 일에 과다하게 매달리기도 한답니다.
또 다른 갈등의 대처 방법은 공격적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 싸움이 잦고 서로 언성을 높이면서 다툽니다. 서로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고 상처를 주는 말들을 일삼고, 서로 분노가 많고 감정이 고조되면 폭행도 일삼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등에 대처하는 방법은 화해하는 것입니다. 즉 갈등을 회피하거나 공격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직면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부부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화해의 구체적인 방법들로는 간과와 대화 그리고 제 삼자의 중재가 있습니다. 간과는 상대방의 잘못을 마음속으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간과가 되지 않을 때에는 대화를 하여야 합니다. 서로의 문제를 내어놓고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대화도 불가능할 때에는 제 삼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상담자를 찾아가서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덮어두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은 많은 부부들이 갈등에 직면했을 때에 처음에는 문제를 덮어두고 회피하려고 하다가 서로 감정이 악화되면 공격적이 되어서 대판 싸움을 하고 그 후에는 또다시 문제를 회피하는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더 이상의 대화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아모스 선자자는 말하기를 아모스 8장11절에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고 합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하나님이 대화의 물고를 트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을 걸어오신것입니다. 하나님이 입을 여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먼저는 세례요한을 보내시는 것을 통해서 대화의 물고를 트시고는 예수님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셨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바로 이런 대화의 단절 속에서 영적 절망감 속에 빠져 있었던 백성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적인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임마누엘은 바로 이런 대화의 단절감 속에서 절망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오신 줄로 믿습니다.
3. 가장 힘들 때 임마누엘
그리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가장 힘이 들 때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와서 이제는 자유민으로 독립국가를 형성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했지만, 그 기간은 100여년정도 밖에 되지 않고 또 다시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한 나라의 국권을 상실하고 강대국의 통치 속에 살아가는 백성들은 괴롭습니다. 여러 가지 학대와, 차별, 그리고 경제적 착취 속에서 힘든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고치시고, 힘과 용기를 주셨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약하고 힘이든 고아와 과부들을 늘 보호해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힘들어 할 때, 하나님은 임마누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우시고 힘과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이 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늘 응답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탄절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날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둡고 캄캄한 가운데 있을 때, 절망적이고 힘이 들어 할 때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있기에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고, 그분이 있기에 우리의 어떤 억울함도 하소연할 수 있고, 그분이 있기에 우리가 손만 내밀면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깊은 의미를 우리가 깨닫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성탄을 맞이하면서 진정한 기쁨과 감격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질 것입니다. 정말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이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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