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소통하라
마태22:37-40 11.1.30
소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1월 한 달을 설교합니다.
하나님과 소통의 소통을 전했고, 사람과의 소통을 이야기 했으며, 세상과의 소통을 지난주에 전했습니다.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중요한 소통이 하나 빠진 것 같아서 오늘은 그것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소통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소통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면 안되겠고, 자기 자신의 허물이나 잘못에 대해서 자기용서가 없으면 자기 자신을 사랑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 이웃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웃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하십니다. 즉 내가 내몸, 나를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웃사랑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은 먼저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우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는 것을 봅니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한 잦대를 놓고 그 잦대로 평가를 하려고 합니다.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은 남들을 보면서도 자신이 힘들었던 것만큼 남들에게도 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나는 너보다 더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도 못하냐고 합니다. 그래서 자수성가한 상사를 만나게 되면 자신이 겪었던 것과 같은 희생을 부하직원에게도 요구하기 때문에 힘이 들어진다고 합니다. 살아온 시대가 다르고 살아온 환경과 여건이 다른데도 그것은 부정하려고 합니다. 군에서 막 제대를 한 청년이랑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스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군대가 그렇게 좋아졌는가! 합니다. 옛날 저희들이 군생활 할 때의 고생스러웠던 시절이 떠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 비교하면 지금 군대는 군대도 아닌것 같이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저보다 연배가 많으신 분들의 군대이야기를 들으면 저희는 굉장히 편안하게 군생활한 것이 되어 집니다. 그러나 지금 금 당사자들, 막 제대한 이들의 이야기는 자신들이 제일 고생한 사람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지금 막 입대한 군인들은 좋은 시절에 군에 간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같이 자기 기준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시절에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그것도 못 참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겪었던 만큼 남들에게도 같은 잦대를 가지고 그 고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절대로 남에게 너그럽지 못합니다. 내 고생한 만큼 남들도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드럽고 온유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상대방에게도 그런 부드러움과 온유함으로 대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행복을 맞보아야 합니다. 내가 잘되어야 합니다. 내가 여유를 가지고 살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맛있는 것을 먹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편안해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내가 먹어보고, 편안해보고, 내가 행복 했던 것들을 남에게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행복을 맛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즐겁고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내가 누리고 맛보고 편안했던 것을 내 이웃에게 똑같은 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웃사랑의 기준을 자기 사랑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귀한 줄 알면 상대방도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기자식귀한 줄을 알아야 남의 자식 귀한 줄도 안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자기를 알아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생물학적인 대답은 나는 누구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그리고 누구의 남편이고 아내입니다. 그리고 누구의 아버지고 어머니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학적 대답을 한다면, 어느 직장의 상사이거나 부하이고, 누구의 선생이고 누구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어느 사람의 친구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철학적이 대답을 한다면 많은 철학자들이 저마다의 대답을 하지만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신학적 대답은 어떤 대답입니까! 인간은 피조물이라고 대답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대답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창세기1장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누구의 아들, 딸이기 전에 우리의 본래의 존재의 모습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돋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1,27)라고 창세기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당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 인간, 아니, 여기 있는 나를 창조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고전10:31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의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또 하나의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죄인이라고 하는 실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창조의 목적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한 그 죄악은 오늘날 우리에게 까지 원죄라는 이름으로 유전되어 내려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죄 없이 착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죄인입니다. 성경에서는 죄의 결과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정의 합니까! “죄의 삵은 사망이라” 즉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는 죽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런 모습인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또 하나의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의 모습,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뭐라 대답할 수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이다” 라는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만큼 사랑하기에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을 만큼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죄악 속에서 있는 우리를 구하시려고 사람이 되어서 내려오시기 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보다 더 큰 사랑의 이야기가 어디에 있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사실입니까!
2. 자기를 용서하라.
그런데 우리는 불행하게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자식이 얼마나 부모에게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학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함부러 다루면 제일 가슴아파하는 분이 부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일 일어날 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 때문입니다. 스스로도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자기 자신이 이것밖에 못 된다는 사실 때문에 결국은 중요한 것을 놓아버리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떤 사람이 쓴 글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쓰신 사람들의 약점에 대해서 기록을 했습니다. 내가 이것밖에 되지 못하나 하고 스스로 한숨이 나올 때에 이 사람들을 기억 해보시길 바랍니다.
노아는 술 취한 사람이었고, 아브라함은 아내를 동생이라 거짓말 했고, 이삭은 공상가였고, 야곱은 거짓말쟁이였고, 레아는 못생겼고, 요셉은 온갖 고난을 받았고, 모세는 말을 잘 못했고, 기드온은 겁쟁이였고, 삼손은 바람둥이였고, 라합은 기생이었고, 예레미아와 디모데는 너무 어렸고, 다윗은 간음자, 살인자였고, 엘리야는 심한 우울증 환자였고, 이사야는 벌거벗은 설교자였고,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달아났고, 나오미는 과부였고, 욥은 파산 하였고, 세례요한은 벌레를 먹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 하였고, 제자들은 기도하다 잠이 들었고, 마르다는 모든 일에 대해 근심 하였고,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들렸었고, 사마리아 여인은 여러 차례 이혼 하였고, 삭개오는 키가 작았고, 바울은 너무 율법적이었고,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도 들어서 사용을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는 안돼” 하면서 학대를 합니다. “나는 큰 죄를 지었어! ” 하면서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유다와 베드로의 경우를 종종 비교해서 설명을 잘합니다. 둘 다 예수님을 배반하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유다는 목 메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가져왔습니까! 바로 용서입니다. 베드로는 닭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울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돌이켰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하게 했습니까! 스스로를 용서한 것입니다. 얼마나 자기 안에서 갈등도 많았고, 남들의 시선도 의식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그래! 그런 만큼 더 열심히하자, ”하면서 스스로를 용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에게도 돌이키고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이 똑같이 주어졌지만, 그는 예수님을 팔았던 사실 앞에 자기가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끝내 그는 목 메달아서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가 사울시대에 저질렀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 했던 그 죄악이 얼마나 그를 괴롭혔을까요! 더욱이 바울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던 수많은 시선들, 사도들 마져도 그런 의식으로 쳐다 볼 때, 그는 얼마나 괴로웟을까요! 그런데, 그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용서했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용서를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더욱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죄책감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책하게 만들고, 스스로 올무에 빠지게 만듭니다. 하나님도 용서하셨는데, 예수님도 용서하셨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과 소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용서할 때 자기와의 소통도 시작되는 것입니다.
3. 자기를 사랑하라.
그러므로 자기와의 소통을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의 존재가치를 높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야! 라고 스스로의 가치를 소중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일의 나치스들이 유태인들을 학살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나치스들이라 할지라도 사실은 맨 정신으로는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수가 없답니다. 그래서 가스실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집단 살상을 하기도 했는데, 독일군이 군인들에게 유태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게 하기 위해서 사용한 방법이 있답니다. 유태인들의 수용소에서 여러 군데 있었던 화장실을 다 없애고 하나밖에 남기지 않았답니다. 그리고는 하루에 한컵의 물밖에 주지 않고 그물로 하루 종일 살라고 했습니다. 씾는 것부터 마시는 것 모든 것을 한컵의 물로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일어나는 일들이 무슨 일입니까! 생리적 해결에 대한 스트레스들이 유태인들에게 몰리기 시작합니다.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으니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누군가는 늘 먼저 들어가 있고, 그래서 하루, 이틀을 지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수용소의 여기저기에다가 배변을 해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물 한컵으로 하루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몸에서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온통 지저분하게 되어집니다. 점점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어 집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독일군이 보게 합니다. 정말로 인간의 모습을 상실한 동물과 같은 모습을 보게 해서 그들을 죽여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답니다. 그런데, 그런 나치스들도 차마 죽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를 단장한 사람들이었답니다. 그 작은 물로도 언제나 얼굴을 깨끗하게 씻고, 또 깨진 유리조각으로 수염도 늘 깍고 해서 단정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아무리 죽음과 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관리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소중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은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기를 소중하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을 하시고 사랑받는 사람답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어떤 때는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비친 이름을 불러주면서 스스로를 칭찬도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 참 잘했어, 너는 할 수 있어, 잘 견뎠다, 수고 많이 했다, 너 참 잘생겼구나! 너는 복 받을거야! 너는 잘 될거야! 너는 인기가 많아! 그래 다시한번 해 보는거야! ”이렇게 칭찬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고 나면 없던 자신감도 회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상을 주시길 바랍니다. 늘 누구만을 위해서 살아왔다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한번 살아보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맛있는 것도 먹어보고, 자기를 위해서 재미있는 것도 한번 해보고, 자기만을 위해서 여행도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남편들은 가끔은 부인들에게 용돈을 좀 주어서 하루 종일 자신을 위해서 위로하고 즐겨보라고 시간을 줘보시길 바랍니다. 그러고 부인들도 남편에게 가끔은 자유의 시간도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고 나면 서로에게 여유도 생기고 더 다정하고 더 많이 사랑하는 부부가 되어 질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해야 자기 자신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자신과 소통이 되어야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들이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을 더욱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자신이 누리던 행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자신과 소통하시길 바랍니다. 자신과 소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설사 한다 할지라도 이루고 난 다음에는 허무가 몰려 올 것입니다. 남들은 웃지만 자신은 웃을 수 없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내가 한평생 뭐하며 살았나! 라는 생각이 몰려오게 되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소통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이 행복하고 웃고 즐거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얼굴이 늘 밝고 명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물며 부모 된 우리들도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얼마나 더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소통을 위해서 이제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기억하시고 자기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실수 할수 있고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누구나 반복된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육신이 약해서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 했다면 이제는 스스로도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수록 더욱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받은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일을 했지만, 열심히 봉사를 하고, 열심히 헌신을 했지만 때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몰라줄 때에 서운하기도 하고, 힘이 빠질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는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주고 스스로에게 상을 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과도 자신 있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내가 행복해야 이웃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금년한해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먼저는 하나님과 예배를 통한 영적 소통을 하고, 그리고 성도와의 아름다운 사랑의 소통을 이루고 지역사회와 복음의 소통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신과의 소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금년한해 소통의 해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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