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소통하라
사도행전2:43-47 11.1.23
소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가장 우선적인 소통은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히면 모든 것이 막히고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을 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소통의 방법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예배하는 자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푸시고, 예배하는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금년한해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소통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주일한번의 예배만이 아니라 수요예배, 금요기도회에도 많은 참석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공예배가 있는데, 이 공 예배는 모든 성도들이 힘을 써서 드려야 할 예배입니다. 그것이 주일예배이고 수요예배요, 금요기도회입니다. 주중에 드려지는 예배시간에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 예배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교회로 와야 합니다. 수요예배시간에 집에 있으면서도 나오지 않는 일이 없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의 재직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예배를 많이 드리는 사람이 영적으로 더욱 풍성해 질수 있고 하나님과의 넓은 소통의 통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삭개오가 사람과의 단절된 삶을 살았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는 사람과 소통하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 깊은 소통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세상은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우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세상이 교회를 부러워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가 아름다운 교제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도 교회를 향해서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 사람과의 소통을 이룰 수 있고, 성도의 아름다운 소통의 모습 자체만으로도 이미 세상은 교회를 향해서 부러움을 보내기 시작했고 그 부러움은 교회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던 것을 봅니다.
교회가 신앙의 거룩한 삶을 위해서 산속에 존재하지 않고 세상 속에 있는 것은 교회가 세상과 소통을 하면서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통해서 소통하라는 의미인줄로 믿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고, 세상으로 하여금 구원의 방주된 교회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지난 12일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애리조나 총기난사 사건 희생자들의 추모식에서 한 연설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평소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할 때에 불필요한 감정을 대중에게 노출시키지 않는 연설가로 유명한데, 그날의 연설에서는 복받치는 감정으로 51초씩이나 침묵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연설중의 침묵은 두딸을 가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에서 이번 사건으로 숨진 크리스티나 그린(8)을 언급하며 "나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크리스티나가 상상한 것과 같이 좋았으면 한다"면서 "우리 모두는 아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이후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을 중단했고, 10초후 오른쪽을 쳐다본 뒤 20초후 심호흡을 했으며, 30초후에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무려 51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어금니를 깨물고는 연설을 다시 이어갔다고 합니다. 이날 그의 연설은 2년간의 재임기간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를 하면서 그의 연설은 미국의 전 국민과 감정적인 소통을 한 연설이었다고 평가를 했습니다.
때로는 많은 말보다도 침묵이 더 큰 소통을 이룰 때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기사의 내용이었습니다.
1. 세상의 요구
요즘은 안티 크리스챤이라고 불리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곧장 공격을 시작합니다. 정말 무서울 정도의 공격입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무서운 저주를 서슴치 않고 내뱉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그 상대가 목사라고 한다면 더욱 강력한 표현들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그들은 왜 안티가 되었고, 왜 그렇게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핍박 할까요! 그런 이면에는 그들이 기대했던 기독교인들에 대한 기대치를 우리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교회에 대한 기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믿고 싶습니다. 세상은 크리스찬에 대해서 기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지독하게 박해를 했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학자들은 말하기를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 하게 된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먼저 콘스탄티누스 1세는 경쟁자인 막센티우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 로마시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때 그는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에게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그의 꿈속에서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와 “이 표적으로 정복하라”는 구절을 보고, 방패에 십자가를 그린 후 진격하여 312년 10월 28일 막센티우스 군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 싸움을 그리스도의 능력과 기독교의 우월성의 증거로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당시 로마의 힘이 있는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로 옮겼고, 또한 기독교를 수용하여 기독교 세력을 키워 귀족 세력을 견제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계기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공인화 합니다.
그런데 그 배후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입니다. 당시의 로마는 타락할 때로 타락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의 귀족들이 자신들도 그런 타락 속에서 살아가지만 자신들의 며느리를 구할 때는 정절하고 깨끗한 여인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인들 중에는 그런 며느리를 얻을 수가 없었는데, 사람은 있었답니다. 정결하고 깨끗하고 예쁜 여자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독교인들을 며느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 며느리들이 로마의 귀족사회로 들어가면서 서서히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면서도 그들 마음속에는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박해를 하면서도 기대치가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그들의 기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이 기대하는 기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서,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어떤 기대치를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정직일 것입니다. 도덕성일 것입니다. 검소일 것입니다. 믿음일 것입니다. 교회가, 기독교인이 빛이 되어 지기를 기대하고, 소금의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교회가 시대에 맞는 사명을 다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아직도 믿을 곳은 교회밖에 없다는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치를 교회에서 기독교인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티가 생긴 것입니다.
안티가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기대치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기회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역으로 말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포기를 했다면 화도 나지 않습니다. 그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말 것입니다.
2. 교회에서 세상으로
동독이 무너지고 통일이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지만 교회가 주도한 평화적 촛불행진이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촛불행진은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몇 십명의 성도들이 기도회를 가진 후 평화적으로 촛불 시위를 시작한데서 출발하였습니다. 이 교회의 성도들은 기도회를 마친 후 촛불을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어두운 밤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몇 십명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어 몇 백명, 몇 천명, 몇 만명으로 늘어나더니 급기야 거의 도시 인구 전체에 해당하는 50만 명이 참여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동베를린의 시민들도 백만 명이상이 모여 시가를 돌며 평화적인 촛불시위를 벌였습니다. 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이 있었으나 이 거대한 평화의 행진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베를린 장벽은 총 한방 쏘지 않고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 라이프치히 시가에 거대한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감사하노라.” 이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교회가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교회가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평가가 왔습니까! 세상은 교회에 감사를 했습니다. 마치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 것처럼, 세상이 교회를 칭찬했습니다. 이 칭찬으로, 이 감사로 하나님은 얼마나 영광을 받으셨겠습니까!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존재합니다. 산속에 있지도 않고, 수도원처럼 높은 담을 쌓아서도 안됩니다. 우리끼리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속에서 확장되어져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의 한복판에 있는 것은 세상을 향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끝나고 마지막 축도를 하는 것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세상으로 향해서 나아가는 성도들을 위해서 비는 축복의 기도인 것입니다. 교회가 우리끼리 모여 있으면 병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세상으로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세상에서 교회로
솔직히 말하면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거룩해져 가야할 사람들, 거룩해져 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은 의인과 착한사람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죄인이라고 정죄된 사람들을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알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 의인이 되어서 들어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교회 안에서 신앙고백을 통해서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세상 속에 살던 사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세상속에 있던 사람이 들어와서 변화되어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람들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살던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문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일년에 4차례씩 세상속의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공식적인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리방입니다.
그리고 매주 화요일 한국어교실을 통해서 세상의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사람들이 편안하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들은 요즘 문화카페라는 것을 작은공간 이라도 만들어서 지역사회의 사람들이 편안하게 와서 차를 마시면서 쉴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지역사람들을 초청해서 음악회를 본당에서 열어주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유명한 가수를 초청하든지, 연사를 초청해서 집회를 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사회에서 좋은 문화를 선도하는 곳이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끌려가던 교회가 이제는 세상을 문화적으로 리더하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람직한 일들입니다.
저도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조그마한 문화카페를 만들어서 동네사람들을 초청해서 음악과 찬양과 간증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교회를 만드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정성스럽게 섬기는 것입니다. 작은 아이 하나에게 한 것이라도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섬기기 시작한다면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피곤하고 지친 수많은 영혼들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오는 놀라운 일이 벌어질것이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본문의 내용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세상과 소통할수 있는 교회가 된것은 교회의 영적권위가 분명했습니다. 42절의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면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현 힘쓰니라”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지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었습니다.
그 진지한 섬김의 모습이 있었기에 그들은 성도와의 소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44절부터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믿는 살마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통의 모습입니까! 서로 나누고, 베풀어주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정생활이 신앙적이었습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고 합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아주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영적관계가 있었고, 성도와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었습니다. 마땅한 모습이고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만으로도 세상은 교회를 부러워했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세상은 이미 교회에 대해서 존경을 했습니다. 부러움을 보였습니다. 교회는 저런 곳이구나 하는 기대치를 가지게 되었고, 교회에서 희망을 보았고, 교회에서 소망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와 소통을 하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바라는 교회부흥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더해주시는 교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입니다.
부흥을 이야기하고, 부흥을 기대하고, 부흥을 기도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소통을 하십시다. 먼저 하나님과 가로막혀 있었던 우리의 영적 관계를 다시한번 확인합시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예배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이여야 합니다. 예배 없는 신앙생활은 있을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을 예배를 통해서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하시기 원하시고, 예배를 통해서 응답을 해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배합시다. 우리 안에 예배드리는 무리들이 많아야 합니다. 성전을 가득 체우는 예배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층에서 예배드리는 분들도 이제는 가능한 1층으로 오시길 바랍니다. 수요예배, 금요기도회를 소중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새벽기도회를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모이면 예배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배하는 공동체는 서로, 서로의 관심과 사랑이 있어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예배자들은 서로 소통해야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도 한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도 한목소리로 할 때에, 성도가 서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지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아플 때 돌아볼 수 있고, 힘들 때 함께 해줄 수 있고, 좋을 때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소통이 있으면 세상은 우리를 부러워 할 것입니다. 세상이 먼저 소통하자고 우리도 넣어달라고 손을 내밀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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