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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의 말씀

받은 은혜 감사 눅17:11-19

받은 은혜 감사                누가17:11-19                    07/11/4
 
미국 보스턴 시에 스트로사라고 하는 청년이 바턴이라고 하는 거상(巨常)을 찾아가서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워싱턴가에 소매상을 하나 차릴 생각인데 2천 불을 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에게는 담보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턴은 담보물이 없이는 돈을 빌려 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청년은 그냥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턴은 후에 그 청년에게 관심이 생겨 동료 사업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돈을 은행에 두기보다는 유망한 젊은이의 앞길을 돕는 것이 훨씬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 무담보로 2천 불을 빌려 주었습니다.
후에 그 청년은 열심히 일을 했고, 역시 바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는 사업으로 성공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무담보로 빌렸던 2천불을 깨끗하게 갚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10년 뒤에 미국에는 큰 경제 공항이 닥쳐왔습니다. 이 일로 바턴의 사업도 모두 도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스트로사였습니다.
스트로사는 바턴의 부채를 갚아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바턴은 놀라서 "아니, 그때 그 돈은 벌써 다 받았는데 뭘 또 준다는 것이요?" 라고 말하자, 스트로사는 "아닙니다. 빌렸던 돈은 모두 드렸지만 도와주신 은덕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선생님이 당하고 계신 어려움을 얼마라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이 선생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저의 도리입니다." 라고 하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은혜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1. 내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요즘 흔히 말하는 한센병 입니다.
한센병은 '한센씨병(hansen's disease)'이라고도 하는데 노르웨이의 의학자인 한센(g.a. hansen)이 1873년에 이 병의 바이러스를 발견하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치료가 불가능했던 예전에는 '문둥병' 또는 '천형병(天刑病)'이라 해서 하늘이 내린 병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저주받은 병으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이병은 전염성이 강하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활동성 양성인 경우만 전염이 되며 양성인 경우도 약을 복용하면 음성으로 전환되기에 전염률은 현재에 와서는 희박한 상태입니다. 1941년 특효약 dds가 발명되면서 완치가 가능해졌으며, 초기 발견 시에는 쉽게 낫기도 합니다. 한센병이 유전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유전과는 무관한 질병입니다. 따라서 이런 병은 유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염에 의해서 걸리는 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생적으로 좋지 않았던 옛날에는 어느날 갑자기 이런 병들이 걸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다가온 불행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병을 가진 사람들은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을 해서 동네에서 추방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멀쩡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런 병에 걸렸다고 생각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얼마나 날 벼락같은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이런 날 벼락같은 일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TV드라마 같은데서나 보는 일들이 내 삶 속에 일어났다고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멀쩡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당하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고통 하는 일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는 이런 일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고통 하는 것은 엄청난 것이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늘 조그만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기를 두고도 만병의 출발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을 잘못 방치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발목을 붙잡는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도 그 병에 걸리기 전에는 그 병과 무관하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도 행복한 가정이 있었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장래를 꿈꾸면서 행복한 미래를 설계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금방 결혼을 하고 이제 첫아이를 낳고 행복하고 달콤한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는 일이 잘되어서 모든 것이 계획하는 대로 되어주어서 성공의 가도를 달리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병원이나, 장래식장에 가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잘나가던 사람들이고, 잘난 사람들입니다. 큰 사고현장이나, 불행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꿈이 많은 사람들이고, 그 꿈을 향해서 달리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인생에 어느날 드라마같은 이야기가 자기의 이야기가 되어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꼭 이런 엄청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인생을 살펴보면, 우리 성도들의 삶을 드려다 보기만 해도 인생 속에 일어난 뜻하지 않은 일들로 힘들어하는 성도들도 있는 것을 봅니다.
어느 사람에게든지, 이런 일들은 모양과 강도가 달라서 그렇지 다 있는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편하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고, 사업이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아서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고, 계속되는 난제로 인해서 힘들어하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회사의 사고로 인해서 늦게까지 퇴근도 못하고 회사에서 정신 없이 그것을 수습하려고 신경이 곤두선 사람들도 있고,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디 조금만 아프고 힘이 들어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음대로 병원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는 이런 힘들게 하는 일들이 늘 놓여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문등병에 걸린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2. 그것을 견디어 내는 아픔.
이런 아픔들이 있을 때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반응하게 됩니다.
암에 걸린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보통 5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부정입니다.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왜! 이건 말도 안돼, 내가 얼마나 건강관리를 잘했는데, 감기한번 안 걸리던 나한테, 말도 안돼, 하면서 그 의사 엉터리다. 다른데 가서 또 검사를 받아봐야지! 하면서 모든 현실을 부정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단계가 지나가면 분노하는 단계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왜! 나보다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나한테! 하면서 분을 냅니다. 보는 사람마다 다 화를 냅니다. 이때에는 어떤 사람도 달래지를 못합니다. 세상에 자신에게만 불행이 찾아온 것 같고, 불공평하고,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하면서 닥치는 대로 화를 냅니다. 그런 단계가 지나고 나면 우울증의 단계가 옵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싫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혼자 있고 싶어하고, 아무하고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믿고 싶지 않지만 현실 앞에 좌절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다가 네 번째 나오는 단계가 협상하는 단계입니다. 조금만 더, 아들 장가가는 것만 보고, 딸애 시집만 보내고, 그때까지만 제발 살아있게 해달라고 협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단계는 현실을 용납을 하고 받아들입니다. 그 단계가 되어야 다시 제정신이 들어서 자신의 삶을 냉정하고 차분하게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빚진 것이 있으면 갚고, 싸운 사람이 있으면 화해를 하고, 마음에 평강이 그때서야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 병을 이해를 하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막혀 있던 대인관계가 다시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견디어보려고 애를 써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10명의 문둥병자들은 이제는 그들의 신분과 상관이 없이 그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과거나 높은 신분이었던 천한 신분이었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문둥병이라고 하는 한가지 병으로 하나가 되었고, 또 혼자보다는 함께 다니는 것이 사람들에게 더 손가락질을 덜 받을 수 있고, 고통을 나눌 수 있게도 되었고, 서로들 힘이 되어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서 다니지 않고 무리를 지어서 다녔던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어려운 형편이 되어지면 같은 형편 속에 놓은 사람들과는 금방 친구가 되어집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똑같이 보호소나 피난처에 가보면 다 똑같은 입장이기에 차별이 없습니다. 빈손으로 빠져나온 것은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같이 가난할 때는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가난한 시절의 이야기를 이야기합니다. 그때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때는 가난했어도 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로 서로 도와주고 힘이 되어주던 시절을 이야기를 합니다. 이웃사촌이라고, 먼 친척보다도 가까이 얼굴 맞이하는 이웃이 더 정겹고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살기 좋아졌고, 모든 것이 풍부하지만 세상이 점점 삭막해 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병자들도 그런 마음에서 무리를 지어서 함께 다녔습니다.
 
3. 그 모두를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
그런 10명의 문둥 병자를 예수님은 보셨고 오늘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 말씀으로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10명 모두가 깨끗하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는 언제나 이런 모든 슬픔과 고통이 사라지고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10명이 다 같은 병으로 고생할 때는 함께 다녔는데, 그들이 병이 낮고 치유함을 받고 난 다음에 은혜를 기억하고 예수님께 나온 사람은 오직 한사람밖에 없었다는 입니다. 그것도 유대인중에서 한사람이 아니고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10명의 병자 중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얼마나 되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이방인은 그 사람 혼자가 아니었겠는가 싶습니다. 치유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분리되어지고, 멀리하는 사이가 되었던 것을 봅니다. 병들었을 때는 너나 나나 같았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는 서로 의지하고 위로했지만 회복되고 부자가 되어지면 서로들 신분에 따라서 갈라지게 됩니다.
출세하면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인생사의 모습입니다.
아무튼 한사람만이 자신을 치유해준 예수님께 나아와서 섬겼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많은 사실을 이야기 해줍니다.
우리는 자주 잊어버리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생을 하고 힘이 들었다 해도 그 고통을 감싸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프고 힘들었을 때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무슨 자랑꺼리처럼, 무슨 벼슬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서 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 모든 고통을 감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내년이면 우리교회가 속해있는 재일대한기독교회가 100주년을 맞이합니다. 제가 교단 가입을 위해서 오사카에 내려가서 교단 안에 교회들을 방문해 보았습니다. 하나같이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믿음하나로 견디어온 고난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100년이나 보냈지만, 그 백년의 세월의 고통을 감싸주시고 계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고난에서 회복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교단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해야 하고 우리가 당한 고난보다 더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오래 사신 우리교회 권사님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분들이 일본에서 힘든 시절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그 고난의 세월을 견디지 않으셨으면 오늘날 우리들이 한류를 이야기하면서 길거리에서 한국말로 큰소리로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당한 고난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밝게 웃으시는 우리교회 권사님들과 성도님들을 존경합니다.
제가 한국에 갔을 때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 받았습니다. 일본에서 선교하면서 고생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일본선교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고생을 했다고 생각을 했기에 그러겠다고 말하고 무릎꿇고 단에 앉아서 기도하는데, 주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왔습니다. 너 정말로 그렇게 이야기하려고 하니! 그러면 그동안 네가 너에게 베풀어주었던 은혜는 다 어디에 갔니! 하면서 슬퍼하시는 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저는 단에 서서 설교를 했습니다. 신나고 즐거웠던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설교를 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고생을 하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었어도 오늘 우리는 여전히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고통을 감싸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고생을 이야기하고, 힘들었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역사 하셨던 하나님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 아픔을  감싸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치료받고도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고 각자 자기 길로 돌아간 나머지 9명과 같은 것입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얼굴이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 차 있습니다. 염려, 근심, 걱정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얼굴로 있으면 안됩니다. 아무리 고생을 많이 해다 하더라도 그것까지도 감싸고 계셔서 우리를 그 속에서도 견디게 해주셨고, 참을 수 있도록 힘주셨고, 또 누군가를 보내주셔서 그것을 도와주셨던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손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다시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집으로 가기 전에, 부모형제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유럽의 어느 마을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 사람들에게 친절한 것은 물론이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돕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는 으레 그 부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부자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자는 언제든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가 불행히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죽기 전, 병상에서 부자는 이상한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꼭 새벽 3시에 장례식을 치러 주시오." 부자의 이 말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저 분이 죽음이 임박하니까 정신이 좀 이상해 진 것 아닌가? 세상에 그 누가 장례식을 새벽 3시에 치른단 말인가? 허허, 정말 이상한 유언이구만."  하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부자의 마지막 유언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그가 말한 대로 새벽 3시에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알렸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내심 "아니, 그 시간이면 한참 잠에 곯아 떨어져 있을 시간인데 미쳤다고 거길 가? 어차피 죽은 사람은 누가 왔는지 알 길이 없으니까 가지 말아야지. 나중에 무덤에나 한번 가지 뭐." 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새벽 3시, 장례식이 치러지는 날, 단 네 명만이 참석한 쓸쓸한 장례식장 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네 명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습니다. 슬픔에 눈물짓는 사람들 앞에 평소 부자의 모든 일을 돌보던 변호사가 한 장의 종이를 갖고 나왔습니다.  바로 부자의 마지막 유언장이었습니다. 유언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내가 갖고있는 전 재산을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나눠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께로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은혜를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하시길 바랍니다. 고난보다, 고통보다, 아픔보다, 슬픔보다, 힘들고 애처로웠던 시간들보다도 더 큰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은혜를 더 크게 간증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감사의 계절에 우리들이 갖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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