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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의 말씀

은혜와 긍휼과 평강 요이 1:1-3

은혜와 긍휼과 평강                 요2서1:1-3               09.10.11

지난주에는 우리교회에서 큰 잔치를 벌렸습니다. 직분자를 세운 것입니다. 행사를 진행하면서 마음속에 주님이 주시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감사하고 감사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새롭게 새워진 직분자들과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서 서로 서로 섬기면서 하나님이 섬기라고 주신 동경제일교회를 위해서 충성을 다해서 섬겨나감으로 교회를 부흥시켜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라는 분이 쓴 “부흥” 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위대하고 경건한 조나단 에드워즈가 1735년에 매사추세츠 주 노샘프턴의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곧 그 마을을 영광스럽게 바꿔 놓았다. 그래서 연이어 찾아온 봄과 여름에 그 마을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했다. 그때처럼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면서도 고뇌로 충만했던 적은 없었다. 거의 모든 집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표시가 나타났다. 각 가정마다 자신들에게 주신 구원으로 인해 기뻐하던 시절이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새로 태어난 것을 기뻐하고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새로 태어난 것을 기뻐했다 그 당시에 공공 집회는 아름다웠다. 예배에 활기가 넘쳤다. 모든 청중은 목회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열심히 받아들였다. 어떤 이들은 슬픔과 고뇌로 울었고, 다른 이들은 기쁨과 사랑으로 울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이웃에 대한 염려와 연민으로 울었다."
부흥이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찾아오시는 일입니다. 천국의 나날들이 이 땅 위에 임하는 일이고,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한없이 넘쳐나는 일입니다.
우리교회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은혜로운 분위기가 우리교회의 분위기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새롭게 세움을 받은 이들과 함께 이런 은혜로운 교회로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요한이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모든 교회 위에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인사말을 건낸 내용입니다.
그는 정말로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요한2서는 요한1서의 속편이라고 할만한 성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참편지를 써놓고 그리고 또 못 다한 말이 있어서 또 편지를 쓴 것입니다. 이 말은 꼭 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쓴 편지가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입니다.  저는 오늘 그 못 다한 내용 속에서 하나님이 이런 은혜가 간절히 너희에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노종 사도요한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오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1. 은혜
여러분 은혜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혜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노력이 있든 없든, 자격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이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탕진한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죄많던 여인을 맞아주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이고, 사람들에게 이지매를 당하고 늘 혼자였던 외로운 사람 세리장 삭개오에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5)고 말씀하신 음성이고, 스테반집사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오히려 저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입니다. 
은혜란 어머니가 아파서 칭얼대는 어린애를 참고 달래는 것이며, 까다로운 고객에게 점원이 친절을 베푸는 것이며, 좀 둔하여 잘 깨우치지 못하는 학생을 선생님이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에 따라 다루지 아니하며 우리의 허물을 따라 갚지 아니하는(시 103:10 )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실 은혜는 사랑 받지 못하는 자, 약한 자, 부적한 자, 받을 만하지 못한 자, 멸시 받는 자를 대할 때 나타나는 사랑인 것이다. 아무런 조건 없이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며 대가없이 지불되는 호의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은혜의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교회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싸주고, 품어주고, 이해해주고, 용서해주고, 사랑해주고, 손잡아주고,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로운 분위기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보면 그 은혜가 어떤 때는 공평하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열심히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당연히 차등이 있어야 하나님은 공평할 것 같은데, 그렇기 않을 때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필이면 이 사람이냐!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에서가 아니고 야곱인가! 그는 나면서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와서 이름까지 교활한 야곱입니다. 배고픈 형에게서 팟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은 사람, 아버지의 축복기도를 받기 위해서 몸에 양털을 붙이고, 눈이 나쁜 아버지가 못 알아보게 목소리까지도 바꿔가면서 마땅히 형이 받아야할 축복기도도 빼앗아 버린 사람, 그런 치사한 인간을 하나님은 왜 사랑하셨는가! 이런, 저런 말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로마서9장에 보면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고 합니다.
또“왜 하필이면 솔로몬이냐?”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솔로몬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이 범죄 하여 얻은 부인으로부터 낳은 자식이 아닙니까? 한 나라의 왕이 한 여인에게 눈이 뒤집혀서 그 여인을 뺏기 위해 충성스런 신하 우리아 를 죽이고 비겁한 짓을 해서 얻은 아이가 솔로몬입니다. 율법으로 하면 다윗은 돌에 맞아 죽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태어난 아이를 선택하여 복을 주시고 영화롭게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에서 대신에 야곱을 선택하신 것,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밧세바의 몸에서 난 아이를 통해 성전을 짖게 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것,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제3자의 입자에서 보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이해할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게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이야기가 되면 다릅니다. 그 대상이 자신이 된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멘스가 된다고 하는 이야기처럼, 자신의 이야기는 은혜로 받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솔직하게 우리자신의 모습을 보면 내 안에 있는 내 솔직한 모습속에 야곱과 같은 면이 없습니까! 그런 교활한 모습이 없습니까! 다윗의 약점과 같은 약점은 우리에게 없습니까!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어느 누구하나 빠짐없이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똑같이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나는 너하고는 다르네! 하면서 폼잡을 것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날 농부는 해뜰 무렵에 거리로 나가 일꾼들을 구해 일을 시키면서 품삯을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일꾼이 모자라요. 그래서 점심나절에도 나가 몇을 부르고, 오후 세시에도 나가고, 또 끝나기 한 시간 전에도 나가보니 그때까지도 장터에 서성거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불러 일을 시킵니다.
일당을 지급할 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맨 처음에 불려와서 하루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들이 맨 나중에 불려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다는 것을 알면서부터 불평이 시작되었습니다.  불공평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은혜는 불공평합니다. 은혜의 비논리적인 계산법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비논리적인 계산법이 지금 나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잘난척할 수 없고, 폼 잡을 수 없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어는 누구도 다 이해해주고, 용서해주고, 사랑해 줄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지배하는 교회를 우리는 만들어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긍휼
두 번째는 긍휼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불쌍히 여긴다 는 말입니다.
누가복음10장에 보면 긍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걸어가고 있던 한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마침 으슥한 길을 걷다가 갑자기 나타난 강도를 만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털리고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반죽음상태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때에 멀리서 제사장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강도 만난 사람은 제사장을 보고서 저 제사장이 나를 도와 주겠지! 하고 생각을 했지만 제사장은 멀찍이 떨어져서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또 한사람이 걸어오는데, 그는 레위인 이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역시 그도 나를 도와주겠거니 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 역시 눈길한번 안주고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점점 힘이 없어지고, 이제는 이대로 죽는가 보다 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또 한사람이 옵니다. 그런데 그는 평소에 자신이 멸시하고 상대도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멀리서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살펴보더니 그대로 달려와서 그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상비약을 통해서 응급조치를 치하고는 자신의 나귀에 그 사람을 태우고 여관으로 데려가다 그를 여관주인에게 부탁합니다. 그리고 혹시 돈이 더 들거나 하면 돌아와서 갚아주겠다고 말을 하고 자신의 일을 위해서 떠났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그 사람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 그는 강도를 만나서 죽게되었다는 그 한가지만 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를 취해서 도와주었던 사람, 우리는 그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그런 긍휼함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불쌍히 여겨주시기 않았다고 한다면, 나의 모습 속에서 의로운 모습만을 찾기를 원하셨다면, 내가 선을 행하고, 온전한 믿음만을 찾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기준에서의 의로움도, 선도,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았던 우리, 내 고집대로, 내 욕심대로 살았던, 우리들입니다. 그러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까불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평소에 안 좋게 보이던 그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우리는 “그놈 까불더니 잘됐다. ” 하면서 고소해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를 안아주시고, 치료해주시고, 보호해주시고, 회복 시켜주시는 것이 바로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긍휼 하심을 받았기에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런 긍휼을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우리주변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그를 일단은 살려주고 보는 것입니다. 남들이 뭐라고 그러던 상관없이 그 영혼을 살려주고 도와주는 것이 긍휼을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사명을 세상사람들에게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존경을 받는 것은 곧 예수그리스도가 존경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런 긍휼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3. 평강
그 다음이 평강입니다. 평강은 불안할 때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불안해졌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이제 우리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면서 한곳에 모여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십니다. 초대교회당시의 교회들 역시 평강이 무엇보다도 필요할 때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들은 여전히 힘을 쓰고 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교회적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평강 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이 평강이 없어도 괜찬습니까! 우리 역시 평강이 필요합니다. 여기저기에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소식들이 많이 들립니다. 이번 태풍으로도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재산적 피해가 있었습니다. 지진 많고, 태풍 많고, 지구 온단화 현상으로 갈수록 자연재해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경제상황은 또 어떻습니까! 뉴스에서는 회복된다는 이야기를 가끔씩 하기를 해도 아직까지 그것이 우리의 피부로 와 닿지는 않는 먼 나라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고, 그래서 한국으로 다시 귀국을 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회적인 현상들은 또 어떻습니까! 얼마나 많은 흉악범들이 나타나고, 지능적으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우리의 자녀들을 밖에 내놓고 키울 수 없는 험한 세상입니다. 수많은 사건, 사고의 소식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 눈에 귀에 들려지고 보여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 잘 알지 못했던 일들이 지금은 인터넷과 각종 메스컴들을 통해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한순간에 다 알게 됩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는 이런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역시 필요한 것은 평강 입니다. 교회에는 그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불안해서 견딜수 없어서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곳이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곳에 가면 편안해지겠지, 교회에 가면 마음의 불안이 사라지겠지, 의지할 것이 있으면 마음놓을 수 있겠지! 라는 이런 마지막 소망을 교회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주님이 주시는 그 평강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얼굴 속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이 깆들어서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서 편안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이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불안해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근심에 쌓이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걱정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먼저 그리스도안에서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여러분이 예수님 앞에서 모든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이 쉬게 해주시는 거룩한 안식에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여러분의 얼굴 속에서 그전에 보지 못했던 편안함과 함께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나는 일들이 생겨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우리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가득 차게 될 때, 부흥은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흥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마시길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의 영혼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여러분의 얼굴 속에서 찾으시길 바랍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본회퍼는 당시 독일 교회의 연약해진 원인과 독일 교회의 능력과 사회를 향한 영향력의 상실 원인을 말하면서 이는 교회가 값싼 은혜, 개념에 집착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본회퍼는 값싼 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회개 없는 용서. 삶을 바꾸지 않고 용서만 가르치는 것, 고백이 없는 세례, 참된 신앙의 고백이 없이 의식에만 참여하려는 것, 교제가 없는 성찬, 하나님과 나 사이의 진정한 교제는 강조되지 않고 성찬이라는 형식만 강조되는 것, 십자가 없는 은혜, 희생이 없는 제자도, 그리스도를 따라가기를 원하고 축복 받기를 원하지만 희생을 거부하고 있는 성도들, 생활이 없는 그리스도, 삶이 없는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값싼 은혜라고 그는 비판했습니다. "그 날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것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습속에서 이런 행함으로 인하여 충만케 하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충만하게 깆들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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