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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의 말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2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21:15-17                           10.6.13

어떤 사람이 사랑에 대해서 33가지의 종류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이고, 가치 있는 사랑은 오직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며, 헌신적인 사랑은 되돌려 받을 생각 없이 하는 사랑이다. 소중한 사랑은 영원히 간직하고픈 사람과 나누는 사랑이고, 행복한 사랑은 마음의 일치에 의하여 나누는 사랑이다. 뿌듯한 사랑은 주는 사랑이며, 포근한 사랑은 정으로 나누는 사랑이고, 아름다운 사랑은 두 영혼이 하나가 되는 사랑이며, 황홀한 사랑은 두 육체가 하나가 되는 사랑이다.
건강한 사랑은 부부끼리 나누는 사랑이고, 용기 있는 사랑은 사랑하고픈 사람과 나누는 사랑이며, 끈끈한 사랑은 핏줄에 대한 사랑이다. 감격적인 사랑은 오랫동안 떨어졌다가 다시 만난 사랑이고, 깜찍한 사랑은 아이와 나누는 사랑이며, 때묻지 않은 사랑은 첫사랑이다. 순간의 사랑은 마음의 배제된 사랑이고, 영원한 사랑은 마음이 합치된 사랑이며, 끝없는 사랑은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나누는 사랑이다. 불행한 사랑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과 나누는 사랑이고, 값싼 사랑은 사람의 대상을 자주 바꾸는 사랑이고. 억울한 사랑은 마지못해 하는 사랑이며, 비참한 사랑은 굶주린 상태에서 하는 사랑이며, 가난한 사랑은 받는 사랑이다.
무모한 사랑은 주인 있는 사람과 하는 사랑이고, 우울한 사랑은 사랑할 수록 아픔이 더해지는 사랑이며, 애절한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비굴한 사랑은 일반적으로 매달리는 사랑이고, 외로운 사랑은 짝사랑이며, 아쉬운 사랑은 미련이 남는 사랑이다. 고독한 사랑은 혼자서 나누는 사랑이고, 추한 사랑은 강제로 나누는 사랑이며, 쓰디쓴 사랑은 이별한 사랑이다.
여러분은 어떤 사랑을 나누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가 참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갔던 제자들,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같은 제자로서의 열정적이 삶을 살아가기를 포기하고 자신을 잃어버린 제자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옛날생활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고 있는 힘없고, 맥빠진 생활을 다시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다시 예수님께서 찾아가 주시는 장면입니다.

1. 불피워놓고.
어떻게 보면 제자들은 이미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처음 예수님을 따랐을 때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정말로 신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마치 뭐에 홀린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었는데, 그날따라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아서 이제 접으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서 그물을 깊은데 가서 던지라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였는데, 평소 같으면 웃고 농담으로 넘길 일이었지만, 그날따라 그 말대로 하고 싶어서 던졌더니, 상상하지 못하는 엄청난 고기가 잡힌 것으로 인해서 따라 나섰던 발걸음이었습니다. 어느때 같이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고, 돌아서는 나에게 손가락질하는 그 느낌을 늘 달고 살았던 사람이었는데, 나를 따르라는 그 한마디에 제자가 되었었습니다. 배를 버려 두고, 그물을 버려 두고, 아버지의 말리는 소리도 뒤로 두고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것같이 따라나설 만큼 예수님은 그들에게 신비스러운 분이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했던 3년은 정말로 꿈과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생애에 그렇게 많은 기적과 이적들, 그리고 예수님이 입만 벌리면 받아 쓰지 않아도 마음속에 쏙쏙 새겨지는 말씀들, 뼈에 사무치도록 새겨지는 말씀들, 그리고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경험했던 그 신비스러운 일들, 정말로 그들은 한평생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라면 뭐든지 다 맞는 말이고,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그 말이 맞을 것 같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정말 자신들이 오늘 이렇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꾸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찿아 온 로마병정들 앞에서 그들은 정말로 무기력하게 무너졌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쉽게 예수님을 떠날 수 있었고, 또 배반해 버릴 수가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허무하고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베드로의 경우는 더욱 황당했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는 질문에 얼마나 당당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얼마나 정확하고 당당하게 대답을 했었던 그였습니까!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큰소리 쳤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날에는 너무도 황당했었습니다. 권세 있는 대제사장 앞에서의 배반도 아니고, 로마군인의 창, 칼 앞에서의 부인도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황당하게 성전의 문안에 있었던 어린 여자아이 앞에서, 그리고 불을 같이 쬐고 있었던 일하는 사람 앞에서의 부인이었습니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었던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너무나 허무하게 부인하고 말았던 그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보면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어온 사람들도 있지만, 어느 날 갑자가 찾아온 구원으로 인하여 갑자기 뜨거워진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갑자기 은혜를 받아서 헌신을 하고, 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평생에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거야! 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시간을 정해놓고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평생을 변함 없이 섬겨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중간에 이런 제자들과 같은 일들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동역자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중간에 떠나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4:10“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합니다. 지도자가 바울 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속에서도 세상을 사랑해서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실패자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분명 실패자였습니다. 세상에는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고,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울창한 산에 많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서 나무를 베어서 잘라갑니다. 목재로서 훌륭한 나무들이 제일먼저 잘려나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든 나무들이 다 그렇다면 산은 벌거숭이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산은 여전히 푸릅니다. 여전히 나무가 많습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도 여전히 그곳에도 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을 자세히 보면 못생긴 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산을 지키는 나무는 못생긴 나무들입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고린도서에 보면 1장26절부터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이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 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라고 합니다.  못생긴 나무들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당신의 나라를 지키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의 모습은 정말로 못생긴 나무 같습니다. 정말로 못난 사람들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에게 오늘 예수님은 다시 찾아가 주십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가십니다.
그 날도 제자들은 고기 한 마리 제대로 잡지 못했던 날입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가 잘나가고, 고기 많이 잡고 할 때는 가만히 놔두실까요, 왜 그때는 찾아가지 않으시고, 실패하고, 좌절했을 때, 절망하고 있을 때, 그때에만 나타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도 그랬는데,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룬 성공 앞에서 교만과 거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잘나갈 때 부르면 지가 잘나서 부른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 체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르시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놓는 사람들입니다. 뭐든지 아멘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는 고기 좀 잡았냐! 하고 물으시고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보아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밤새도록 차가운 호숫바람에 일을 한 제자들을 위해서 해변가에 모닷불을 피워놓습니다. 그리고는 미리 떡을 구워서 놓습니다. 그리고는 잡은 고기를 좀 가져오라고 하시면서 해변가에서 아침 식탁을 마련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여러분 이분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다 아시면서 그것을 책망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부드럽게 감싸 안으시기 위해서 준비해놓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다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붙잡으십니다. 놓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는 그분의 손에 붙잡힌바 된 줄로 믿습니다.

2.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는 밥을 다 먹고 난 후에 물어보십니다. 밥을 먹고 있는 중간에 물어봤다면 아마도 그 밥이 체했을 것입니다. 그 떡이 그 생선이 제대로 넘어가기나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밥상 앞에서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님도 밥상 앞에서는 그저 웃기만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이거 더 먹어라, 저거 더 먹으라 하면서 그들이 편안하게 식사하게 해주십니다. 그들이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난 후에 예수님은 조용하게 물어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갑자기 받는 질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종류의 질문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많은 이야기는 하셨지만, 이런 질문은 처음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을 해보니 그때는 말 안해도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다 아는 시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집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직업도 버리고 다 따라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할수록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마치 누가 더 주님을 사랑하는가! 제자들 사이에서 경쟁이 될 만큼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사랑의 질문이 필요한 때입니다. 왜요! 그들은 주님을 떠나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데, 스스로는 돌아가기가 어려워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하고 떠나버렸던 자신들의 잘못을 충분히 회개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예수님께 손을 내 밀수는 없었던 제자들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손 내밀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깜짝 놀라 대답합니다. “네!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아시쟎아요!  주님은 세 번을 반복해서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사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아시는대로 헬레니즘 문화권에서는 네 가지로 분류 하고 있는데, 첫째, 에로스(eros) 남녀 간의 뜨거운 애정을 말합니다. 둘째, 스톨게(storge)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입니다. 셋째, 필레오(Pileo) 친구 간의 우정입니다. 넷째, 아가페(agape) 아무 대가없이 주는 무조건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처음 두 번을 물어 보셨을 때는,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세 번째의 사랑은 필레오 하느냐!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에 세 번 물어보신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다 맞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듣고 싶었던 말은 바로 사랑의 고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 니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라는 고백의 확인을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 이예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하노라♪“
그래요! 주님이 듣고 싶은 사랑의 고백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이런, 저런 이유를 같다 붙이는 사랑이 아니라. 그냥,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게 다입니다. 주님이 아시잔아요! 정말 그것뿐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얼마나 간절한 고백이었습니까! 얼마나 진실한 고백이었습니까!  이 고백이 베드로의 인생을 또 한번 바꾸어놓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런 저런 문제가 있습니까!   주님사랑으로 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사랑했을 때, 첫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부간의 문제가 있을 때도, 처음 만나서 사랑하던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간다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부모 자식간의 문제 역시 사랑으로 돌아가면 해결됩니다. 모든 문제를 사랑으로 돌아가면 다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못합니다. 쑥스러워서 못하고, 너무 늦어서 못하고, 민망해서 못하고,  어색해서 못하지만, 늦어도, 쑥스러워도, 용기를 내어서 사랑한다고 말하면 해결됩니다.
여러분 사랑의 고백을 하십시다. 영적인 문제, 육적인 문제, 인생의 모든 문제 앞에서 사랑한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더 많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3. 내양을 먹이라.
그때에 주님의 대답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을 때마다 하신 대답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누구의 양입니까! 예수님의 양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먹이시고, 치셔야할 주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일을 우리에게 맡겨 주십니다. 당신의 그 거룩한 일을 우리와 같이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단 한가지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맡겨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많은 일 중에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 어느 일보다도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말은 목회자에게만 주어지는 대답은 아닙니다. 이 말은 주님의 일을 우리에게 맡겨주시고, 그 일을 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주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여러분이 맡고 있는 직분들, 그리고 성도 된 모습,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일들, 이 모든 일이 주님의 일입니다. 그 일을 우리에게 맡겨주시고,  그 일을 하게 합니다. 오로지 주님의 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맡겨진 일은 언제든지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것을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가장 멋있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당신의 그 양을 먹이는 그 중요한 일을 양을 치는 경험이 많은 사람, 양에 대해서 많이 아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맡기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제자로서의 첫 번째 부름 앞에 실패했었던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가 주셔서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그리고 다시 사명을 주시는 모습을 봅니다.  당신의 가장 중요한 일을 맡겨 주시는 그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이 그 일일 맡기실 때, 확인하셨던 단 한가지는 사랑이었습니다. 그것만 확실하면 모든 것을 맡겨주어도 안심할 수 있겠다고 믿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일을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사랑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있으면 내 능력의 많고 적음을 넘어서 우리는 충분히 주님의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주님이 오늘도 실망과 상실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 오셨듯이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물어 보실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그 대답이 여러분의 일을 결정해 주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 는 주님께서 당신의 일을 여러분에게 위탁해주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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