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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의 말씀

평화의 복음 행10:36-43

평화의 복음        
행10:36-43                       10.8.15

오늘은 8월15일입니다. 이날은 한국민에게나 일본인들에게나 의미 있는 날입니다. 한쪽에서는 패전과 종전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해방을 기념하며 기쁨을 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최근들에서 100년이라는 숫자가 귀에 익숙하게 들어옵니다. 2년 전에는 우리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재일대한기독교회의 100주년을 맞아서 한참을 100주년으로 떠들썩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100년이라는 이벤트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올 해 들어서 또 100이라는 숫자가 계속해서 들립니다.
다름이 아닌 한일합방100년이라는 것입니다. 올해로 일본에 의해서 강제합방이 된지 100년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일본정부에서도 한국에 대해서 정식으로 총리가 “心からおわびをします。"라고 하는 사죄를 하고, 재일대한기독교와 일본기독교단과의 심포지음이 지난 7월에 열렸었습니다.
이 심포지음의 주제는 ”진실, 기억, 미래를 향한 협동“한일병합”100년, 재일 100년으로부터“ 라는 주제였습니다.
이 심포지음의 발제자로서는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 총무인 권오성목사가 “일제강점100 이후의 경험과 과제” 라는 제목으로 ,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명예교수인 세키타 히로오 는 “한국강제병합 100년과 그리스도의교회” 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재일대한기독교회 나고야교회의 김성제목사 가 “광야의 기억과 약속” 이라는 주제발표가 있었고, 그리고 그때에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장 최영신목사와 일본기독교단총회장 야마키타 노부히사목사의  양 총회장의 이름으로 발표된 “평화 메시지 2010” 이라는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그 메시지의 결론으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재일대한기독교회와 일본기독교단은 한국병합100년과 한국전쟁 60년이 되는 해에 즈음하여 다음을 진지하게 기도하며 공동의 발걸음을 거듭해 갈 것을 표명합니다.
1.일본에 의한 한국병합 중에 행하여진 모든 불법이 분명하게 되고, 그 책임소재가 명확하여 질 것.
1.식민지지배 중에 빼앗기고 상처 입혀진 모든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 행하여지고 그 인권이 회복될 것.
1.일찍이 한국전쟁 발발에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그 전쟁특수에 의하여 얻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책임으로 한반도의 화해와 통일이 하루라도 빨리 성취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질 것.
1.외국인을 관리, 배제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입관법’이 재차 개정될 것.
1.정주외국인들이 안심하고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사회를 형성하는 ‘외국인주민기본법안’이 제정될 것.
‘애국심’이라는 슬로건 아래, 새로운 내셔널리즘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고 있는 이 일본 땅에서, 이러한 과제들이 성취될 것을 우리는 진심으로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와 나아감이야말로 의와 평화의 주님에 의하여 이 일본 땅에 보내어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우리가 거주하는 나라의 평화의 기둥을 만드는 역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재일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에는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아픔을 가지고 그 현장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마음대로 감정의 표현을 하지 못하는 어려움 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왜 이 땅에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기 위함인가! 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 이유로 있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개인적 꿈의 성취를 위해서 있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가정적 이유 때문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든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라는 사실을 또한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일본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안으면서 사명을 깨달아 가는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평화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안에서의 평화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 우리의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존재의 이유인줄로 믿습니다.

1. 세상과의 평화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들의 고백은 36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평화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땅에는 평화가 깨어진 시대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타락이후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져 버렸었고, 죄악이 이 땅에 들어옴으로부터 사람과 사람들의 평화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한번 깨어진 평화는 쉽게 해결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좋은날 아침에 닭 한 마리가 어쩌다 실수를 해서 오리를 밟았습니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발끈 화를 내면서 "네가 나를 밟아? 그럴 수 있느냐" 그리고 못마땅해하면서 "한번 해볼래?" 그러고 대들어서 오리가 닭하고 싸우게 됩니다. 푸드득거리다 보니까 그만 실수를 해서 옆에 있는 거위의 뺨을 때렸습니다. 거위가 또 화를 내며 하는 말이 "아니, 오리가 건방지게 거위를 때려? 네가 어디 그럴 수가 있느냐?" 그리고 또 한바탕 소란을 떨었는데 그러다 보니까 옆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를 그만 밟아버렸습니다. 고양이가 소리를 지르면서 "이 건방진 것들!" 그리고 물어뜯겠다고 쫓아다니게 되니까 얼마나 요란스러웠겠습니까. 그랬더니 옆에 있는 염소를 그만 건드렸습니다. 염소가 "이 건방진 고양이가 어디 염소에게 대드느냐"고, 그리고 고양이를 받아버리겠다고 쫓아다닙니다. 그러다가 그만 말의 옆구리를 차버렸습니다. 말이 호령을 하면서 "이것들 감히 어디다가 이렇게 손을 대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이러다 보니 순식간에 마구간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온통 싸움판입니다. 농부가 나와서 이 꼴을 보고 큰 소리로 고함을 지릅니다. 조용 하라고. 비로소 조용해졌답니다.
깨어진 평화는 누군가의 강한 힘에 의해서 억지로 조용해졌습니다.
그 조용함의 한계는 언제까지일까요, 그 강한 세력이 힘을 잃을 때까지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세계는 “팍스 로마”에 의해서 로마의 힘에 의한 평화가 유지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언제까지입니까. 로마가 힘이 있을 때까지 였습니다. 그 후로 계속해서 강대국들이 등장하면서 그것 역시 깨어집니다. 힘의 의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또 다른 힘에 의한 평화를 기대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야에 의한 평화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에 사람들은 열광을 했습니다.
드디어 우리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풀어줄 이가 등장을 했다고 하는 강한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은 극에 달하는 환호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일들, 말들을 하십니다. 그리고 자꾸만 죽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로마병정들에게 아무런 반항도 한번 못하시고 힘없이 잡히시고 마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강한 반발이 일어났고, 그 반발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외침으로 뒤바뀌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강한 외침에 본디오 빌라도는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에 내어준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기대는 무엇이었습니까! 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신의 능력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응징하고 자기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희생에 의한 평화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에 일어난 일들 중에 가장 큰 사건은 성전의 휘장이 갈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겨우 우리가 로마에 의해서 자유로와 졌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가 우선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먼저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평화도 깨어진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사람들과의 평화만을 먼저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먼저 회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평화 하십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어지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통해서 우리는 지체로서의 회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통하는 말이 “샬롬”입니다. 이 샬롬 이라는 말 한마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서로 몰랐던 사람들도 그 샬롬 안에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힘으로는 이루지 못하던 평화를 그리스도안에서는 이루어낼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 속에서 정치적으로 한일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일본의 영향력 있는 목사들이 한국교회에 방문을 해서 진심으로 눈물어린 사과와 회개를 하는 모습이 메스컴을 통해서 종종 비쳐집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한국민이 용서하고 서로 끌어안고 사랑하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많은 한국선교사들을 일본에 보내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고, 예수 믿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무조건 끌어안고 사랑하고 믿어주는 일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일본을 사랑하는 다는 고백을 수많은 성도들의 입을 통해서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민족이 민족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2. 자기와의 평화.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던 또 하나의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평화하지 못했습니다. 늘 우리를 괴롭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심리학자의 말입니다. “상처를 해결하는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두 가지다.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모든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는 사람은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타인에 대한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히기 마련이요,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하는 사람은 강박관념과 노이로제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자기를 비난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어렵지만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자신을 늘 비하하면서 스스로 나는 못난 인간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식하는 것을 통해서, 어떤 사람들은 필름이 끊어질 때까지 과음하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괴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의 밑바닥에는 '참 못할 짓 많이 했어' 라 든가 '내가 잘못했지' 아니면  '내가 무슨 자격으로 행복하게 사냐고'라고  스스로에게 질책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심한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수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 상처는 자신의 실수로 인한 것도 있고, 잘못으로 인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죄악으로 인한 것 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나, 죄악에 대해서 심한 죄책감 속에 빠져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심한 죄책감은 자기 자신의 영혼에 평화를 깨어버립니다. 내 마음에 평화가 깨어지니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어 갑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영혼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죄책감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역시 자신의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삭개오를 예수님은 용서하시고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칭해주십니다. 그 일로 삭개오는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며 웅크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향해서 자신의 손을 펴서 내어주는 것을 통해서 관계의 회복과 더불어 평화를 이루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괴롭히지 마십시오.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면 자기 자신을 억압하고 괴롭히게 됩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우리 몸을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심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 이상 죄책감에 사로 집힌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 주심으로 우리를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모든 실수와 죄악들을 이미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이 용서하신 것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스스로를 용서하십시오. 스스로를 사랑하십시오, 스스로와 평화 하십시오. 그래야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가 오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3. 환경과의 평화.
우리는 요셉이라는 사람을 압니다. 요셉은 그야말로 지독한 환경 속에 쌓여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형들에 의해서 죽을 위기에도 넘겨졌었고, 겨우 살아난 것이 애굽의 노예시장에 팔리는 것이었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려가서 열심을 다했지만, 요즘말로 성폭행범이라는 죄목을 누명으로 뒤집어쓰고서는 감옥에 들어갑니다. 아마도 그의 인생 속에서 가장 치욕스러웠던 순간일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는 놀라운 은택을 입습니다.
그리고 가뭄으로 인해서 먹을 것을 구하러온 자신의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아마도 옛날을 생각한다면 치가 떨리는 원수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세를 이용한다면 당장에라도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환경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형들을 용서하고 온가족을 애굽으로 이민하게 합니다. 그리고 한평생을 형제들을 돌보며 사는 것을 봅니다. 환경과 평화 한 것입니다. 자신의 환경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저주하고 싶은 때가 많았겠습니까! 노예시장을 저주하고, 노예생활을 저주하고, 보디발 장군의 아내를 저주하고, 감옥을 저주하고, 자신을 도와주겠다던 술 맡은 관원이 2년씩이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저주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환경과 평화 했습니다. 어떻게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모든 환경이 요셉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환경과 평화 하십시오. 환경을 불평하려면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을 사랑하려면 얼마든지 그 또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은 나에게 축복이 되려고 예비 된 것이다, 라고 생각하시면서 환경과 평화 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이 십자가에게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일본에서 맞이하는 8.15광복절을 맞이하여서 주님이 주신 평화를 맞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이 일본 땅에 지금 있는 이유는 바로 평화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아시고,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평화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과 평화 하십시오. 늘 괴로운 인생 길을 살아가는 것 같은 얼굴이 아니라 화평한 얼굴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자리가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려운 자리라 할지라도, 불평과 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자리, 이 환경이야말로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주신 최고의 자리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심으로 그 자리, 그 환경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최고의 축복을 누리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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